* 금요예배 3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82-295

* 본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존 스타인 백(John Steinbeck)의 『진주』라는 글에 보면 평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글의 줄거리를 보면 이렇습니다. 작은 어촌에 젊은 부부 키노와 주아나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진주 잡이’였습니다. 늘 허탕만 치던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깊은 바닷속에서 오색이 영롱한 큰 조개를 주웠습니다. 그 속에는 갈매기 알만큼 큰 옥진주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은 큰돈이 되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큰 진주만 잡으면 인생의 고생은 끝이요, 행복하고 평안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온갖 행복한 생각들로 가득 찼습니다. 성당에서 결혼식도 하고, 자녀 교육도 훌륭하게 시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글은 갑자기 찾아온 행운 때문에 주변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쓰고 있습니다. 악덕 의사는 그의 진주를 빼앗을 생각으로 병이 오래가도록 투약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두 부부의 진주 소문을 듣고 담 너머로 기웃거리며 떠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한밤중에 강도가 침입하여 놀라는 일도 있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던 친척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간청을 하기도 합니다. 성당의 신부는 큰 헌금을 기대합니다. 키노와 그의 아내는 얻은 진주로 인해 마음의 평화가 없어지고 오히려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엄청난 진주를 보관할 장소도 없고,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를 찾을 길도 그들의 생각에는 없습니다. 끝내 젊은 부부는 찾아낸 큰 진주를 도로 깊은 바다에 던져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질로 평화를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코 물질이나 세상의 조건으로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평안을 누리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소 덜 먹고, 덜 편리하고, 덜 좋아도 사람들은 평화롭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인사할 때도 “평화를 빈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게 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샬롬’, ‘샬롬 헤레켑’이라는 인사를 자주 하고, 좋아합니다. 얼마나 좋아하면 성지순례 시에 출입국 직원들이 딱딱하고 힘들게 하면 ‘샬롬’이란 인사를 건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샬롬, 즉 “평화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는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평안하세요”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은 화평케 하고, 평화를 원하지만 이 땅에서의 인간의 화평이 가진 것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진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평화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참된 평화를 얻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22절에서 평화, 평강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평화로운 길을 열어 주셨으니 참된 평화는 “주님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 다 갖추어도 영적 존재인 인간은 ‘영생’, 즉 영원한 생명과 죄 사함,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허무, 불안, 초조, 근심, 염려로 결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평화하다고 자위하는 것일 뿐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심지어 고난이 찾아와도 평화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 안개와 같은 짧고 유한 인생을 사는 자에게는 결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영원한 영생과 아름다운 천국을 소망하고 확신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과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내세의 소망으로 힘든 고난과 시련을 흔들림 없이 이겨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불안해하지 않고 기다리고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영생과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때는 늘 불안해했습니다. 배신하고 낙심하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선포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이제는 가장 무서운 불안의 요소인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이겨내었으니 평안하라, 이 땅에서 아무리 고난이 와도 영생이 예비되었으니 평안하라”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너무도 확신에 차서 두려움 없이 평안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예 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던 제자들,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던 의심 많은 제자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그들은 마음의 평안과 확신을 얻고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찬송가 468장 2절에 ♬“주 십자가에 달리사 날 구원해 주셨으니 주 예수님 고난받아 나 평화 누리도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진정한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백성이 맺는 ‘성령의 열매’ 중 화평의 열매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참된 평화를 얻은 백성은 자신도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당연히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화평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평정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저 조용하고 평정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고, 열정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1. 화평케 해야 할,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화평이란 뜻은 헬라어 ‘에이레네’로 ‘싸우지 아니한다’라는 소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란 말로 ‘화평의 약, 번영, 갈등이 없다, 싸움이 없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레마 주석에 보면 화평은 좀 더 확장된 의미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건강함과 온전함의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레위기 26장을 보면 샬롬에 대한 정의와 다양한 복이 나와 있습니다. 3-13절에 보면 “화평한 자에게는 땅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6절에는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26장 12절에서는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샬롬의 축복은 오직하나님께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화평이란 주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약속된 평안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왜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평안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은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저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심으로써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셨습니다. 성경의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큰 사면과 탕감을 받은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히 이 놀라운 사면, 은혜받은 자는 옆에 있는 형제들을 껴안을 수 있는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고 현재형으로도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독생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의 사도가 되어 주셨습니다.

둘째로, 화평한 삶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요, 요구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1절은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신다”라고 했고, 마태복음 5장 9절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자녀로 인정할 만큼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고 기뻐하십니다. 자녀를 키우다가 여러분은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대다수의 부모님은 바로 자녀끼리, 형제끼리 싸우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동일하실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아름다운 일이며, 형제끼리 우애하고, 사랑하고, 화평하게 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화목하게 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고(19절), 심지어 화목하게 하는 직분까지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2.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먼저 자기 자신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하라’는 말은 어색하여 모순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화평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 자신과 화평하라’라는 말은 분명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화평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평화롭게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미움, 분쟁, 불안, 분열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선한 본성과 인간의 타락으로 생겨난 악한 본성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롬 7:19)

자기 자신을 함부로 굴리고, 멸시, 학대하면 결국 불행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거룩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소중한 존재임을 알 때 진정한 화평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웃과 화평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즉, 참된 평화와 기쁨은 하나님 자녀인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삶을 살아갈 때에 찾아옵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빌 1:19-21)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을 떳떳하게 할 때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와 위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불안과 초조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가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합시다.

둘째로, 화평케 하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생활 자체가 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이것은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이웃과 이웃 사이 등등 모든 인간관계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온유와 겸손, 인내와 성실로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가정의 평화, 교회의 평화, 나라의 평화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자존심도 버려야 합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번은 어느 부부가 싸움을 해서 서로 냉전 상태가 한 달 이상 갔다고 합니다. 이 두 부부의 특징은 서로 싸우면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다음날 너무 중요한 일로 출장이 있어 새벽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남편은 아침잠이 많아 자명종을 켜 놓아도 못 일어날 때가 많았습니다. 할 수 없이 아내의 도움이 필요한데, 말하려고 하니 자존심이 상하고, 안 하려고 하니 중요한 출장에 실수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아내에게 작은 쪽지를 써서 냉장고에 붙여 놓습니다. “내일 중요한 출장을 가니 새벽 5시에 깨워 주시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남편이 일어나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고, 그만 중요한 출장에 늦고 말았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편이 아내에게 화를 버럭 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내가 그렇게 중요한 출장이고 쪽지까지 남겼는데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때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침대 옆에 가봐요.” 남편이 가보니 아내도 똑같이 작은 쪽지로 “5시에요. 일어나세요”라고 적어 놓았더라는 것입니다. 두 부부가 똑같이 화평을 모르고 화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부부입니다. 남편은 출장을 기회로 삼아 아내에게 따뜻하게 사과하고 깨워달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아내도 모른 척하고 아침에 따뜻한 음성으로 깨우면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 한마디로 화평을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화평은 어느 한쪽이라도 하기를 원하면, 그 길이 쉬워집니다.

원망과 분쟁과 불화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정결한 새가 더러운 곳에 앉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역시 평화가 임하는 곳에 임하게 됩니다. 아무리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항상 원망과 불평과 불안이 생기는 곳에는 그 모든 축복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잠언 17장 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시편 133편 1절에도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나와 함께 손을 잡아주고 주의 영광을 위해 힘써 일할 동지로 바라볼 때,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생겨나게 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무한한 경쟁자로 보아 시기하고, 질투하고, 끝없는 투쟁이 계속되어 평화는 깨지고 맙니다. 세계적 문호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의 책에는 ‘평화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 그것은 정의와 예절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평화에는 사랑의 힘이 있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평화는 사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고 반성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죄의 벽을 헐어버렸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경외라고 하는 말은 “두려워한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아무 일에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구약의 요셉의 경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이었을 때나 죄수의 신분이었을 때나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삶을 살았기에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너무도 행복한 일입니다. 구약성경의 에녹의 삶을 보면 그는 365년을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식 때문에 고민도 하였습니다. 생활 때문에 걱정하는 평범한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생활의 시련과 장애물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그의 생활과 상관없이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간섭, 섭리, 축복은 우리에게 진정한 화평을 주십니다.

3. 화평은 십자가 안에서 성취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위로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옆으로는 사람, 즉 이웃과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원수 된 인간을 위하여 희생하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보통 용서하고 용서를 빌어서 화평을 원하는 사람은 잘못한 쪽이 먼저 와서 용서를 비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고 죽으실 이유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화평을 깬 당사자도 아니셨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먼저 찾아오셔서 화평을 이루심으로써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증하셨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0-11)

일반적으로 자기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문 현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신 생명을 바쳐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의 크신 십자가의 사랑과 화평을 받은 자는 어떤 경우에도 더 큰 화평과 용서가 없기에 화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주고도 얼굴색 하나 달라지지 않고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빌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찾아가서 그를 용서해주고 서로 마음의 장벽이 높이 쌓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을 회복하는 길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4. 화평을 위해서 때로는 우리의 희생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감사라는 열매가 기쁨으로 나타나듯이, 용서라는 열매는 화평으로 이어집니다. 나 자신이 손해 보고 내가 먼저 용서할 때 화평은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설사 원수를 갚는다고 해도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원수를 맺어 다음 대까지 내려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희생과 사랑의 용서는 깨질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를 회복합니다. 화평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희생하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화평하게 된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 진정한 화평은 없습니다.

옥한흠 목사의 『빈 마음 가득한 행복』이란 책에 보면 “용서는 나에게 있는 좋은 것을 날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푼도 손해 보지 않고 한마디의 불쾌한 말을 듣지 않겠다는 계산으로는 아무도 용서하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 내가 희생을 감수할 때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많은 부분 중 돈과 관련해서는 용서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돈의 매력과 유혹은 신앙과 관계를 파괴할 만큼 강한 모양입니다. 돈과 관련되면 사탄이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한국인은 심지어 자존심은 용서하고 이해하더라도, 별것도 아닌 돈과 관련되면 피를 나눈 형제고 친구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물질적인 손해를 볼지라도 형제와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은 후속 조치가 필요합니다. 상한 감정을 없게 한 다음에 그 위에 피차 용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피차 용서한 다음에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힘써 지키라”라는 헬라어 ‘스푸다조’는 ‘죽지 않으려면 죽을힘 다해 최선을 다하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유리그릇과 같아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의 평화가 나로 인하여 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깨뜨리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이것은 어느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화평을 깨는 자, 교회의 화평을 깨는 자 등 하나님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람의 관계, 가정의 화평, 특히 주님이 피 흘려 사신 교회의 화평을 깨는 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습니다.

함부로 인간관계를 깰 수 있는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험담이나 뒤에서 욕을 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 모함을 하는 사람은 화평을 깨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5장 22-24절을 보면 형제에게 욕을 한 자, 미련한 놈이라고 저주한 자, 별생각 없이 남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을 비판한 자 등 모두가 화평을 깨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보며 예배의식에 큰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길고 유창한 기도에 감동받는 것도 아닙니다. 뛰어난 성경 지식에 감동하여 예수를 영접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찬송을 듣고 회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용서하고, 희생하고, 사랑하고, 화평의 사도가 될 때, 하나님의 자녀로 감동을 받으며 그 모습을 통하여 믿음 생활에 대한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사도’(Peace maker)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삶을 기뻐하시고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가는 곳마다, 화평의 주님을 증거하고 화평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이 있습니다. 놀라운 평안을 누리는 자는 반드시 평화를 전하고 평화를 이룰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평화의 사도가 됩시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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