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2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72-281

* 본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유머 중에 웃지 않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영안실에 시체가 3구가 들어왔는데 모두가 웃고 있더랍니다. 첫째 시체는 수백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어 너무 기뻐 웃는 순간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고, 두 번째는 전교 꼴등하던 아들이 전교 1등을 한 소식을 들은 엄마가 웃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경우, 세 번째는 번개 치는데 사진 찍는 줄 알고 승리의 V자를 그리고 웃은 정신병자였다고 합니다. 현대인은 기쁨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합니다. 돈, 자녀 정도 때문에 웃을까, 그렇지 않다면 미친 사람이나 웃지, 웃을 일이 없다 는 자조 섞인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저는 세 가지의 이야기를 통하여 진정한 삶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느 맥주 회사 술 광고에 보면 ‘멋있는 삶의 진정한 기쁨을 알라’는 문구와 함께 나름대로 세상적인 기준에서 기쁠 것 같은 장면을 내보내었습니다. 퇴근한 남편에게 아내가 시원한 맥주를 준비하여 몇몇 동료와 둘러서서 맥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뒤뜰에는 근사한 안주로 바비큐가 익어가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남자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기쁨의 조건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텍사스의 한 부자가 자신을 금관 속에 넣어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다는 것이 외신을 통하여 알려졌습니다. 참으로 수많은 어리석은 사람 중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미국의 한인 이민 2세 청년이 명문 대학교의 의학과정을 마치고 해외 오지 의료 선교사로 떠난 이야기였습니다. 그를 향한 부모님의 기대는 대단했습니다. 전문의가 되어 이제는 대접받으며 부유하게 살기를 원했던 부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수술 한 건에 수천 불을 받았던 유능한 의사였습니다. 지금은 수천 명을 진료해도 한 달에 생활비 정도만 겨우 선교회를 통해 받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가 그에게 전화를 해서 그만하면 됐으니 돌아오라고 권면을 합니다. 이때는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 천 불도 받지 못하는 저는 누구를 고쳐주었다는 기억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곳 생활 후에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어느 때도 느껴보지 못한 큰 기쁨이 있어요.”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쁨을 찾으려고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진정한 기쁨보다는 고통을 거두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환경이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기뻐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종교는 어느 때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지 기쁜 생활을 합니다. 특히 기독교의 여러 가지 특징 가운데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도 바 울도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대해서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 안에서는 기쁨에 대해 잘못된 의식이 있습니다. 왠지 신앙생활하면서 밝고 기쁘면 안 될 것 같고, 조금은 경건하고, 조용하고, 뭔가 반성하는 분위기가 종교생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칼뱅(Calvin)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지는 ‘기쁨과 감사’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얼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받으면 맺는 두 번째 열매로 희락, 즉 기쁨(Joy)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조건과 형편에 따라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말하는 기쁨은 환경에 상관없는 기쁨을 말합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편지를 쓰면서도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했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씀하며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쁨의 열매를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기쁨을 방해합니다

한 처녀가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염려할 것이 많아 세상과 단절하고 베네딕트 수도원(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원장 수녀 왈 “이 안에서 생활하다가 아직도 마음에 세상에 대한 염려나 답답함이 있으면 총을 한방씩 쏘아 마음을 풀라”고 하며 권총을 줬습니다. 권총을 쏘아도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지 않자 원장을 찾게 됩니다. 보좌(비서) 수녀가 말합니다. 저 뒷산에 가면 원장 수녀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뒷산 너머로 갔다가 기절할 뻔했습니다. 원장은 권총도 아니고 기관총을 ‘따따따’ 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크고 작든 간에 염려와 근심거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직 닥치지도 않을 것들과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것까지 고민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550번이나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 “염려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만큼 염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걱정과 근심의 노예로 삼는 것입니다.

월터 캐버트(W. Cavert)란 의사는 그의 책에서 ‘사람의 염려 가운데 92%는 상상에 따른 염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염려 거리는 고작 8%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염려하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염려합니다. 예를 들면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망하면 어떻게 하지?’ 하며 망할 걱정부터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성경에서는 ‘메림나오’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뜻은 마음이 첫째, ‘나누어진다’. 둘째, ‘갈라진다.’ 셋째, ‘목을 조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8절에서도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 마음이 갈라지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국은 염려라고 하는 것은 기쁨을 빼앗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불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염려를 버릴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신뢰하되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번 주님께 맡겼으면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흔히 양창삼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낚시기도’(Fishing Prayer)라고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걱정을 힘껏 던져 놓는가 했더니, 낚시처럼 얼마 안 가 다시 끌어올려 놓고 또다시 걱정,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 모습이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번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의 어느 집회에서 은혜받은 한 청년이 목사님에 이런 질문을 하더랍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이때 목사님의 대답은 “하나님은 당신의 죄, 실패, 반역, 염려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연약하 고, 죄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분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의 염려를 맡아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더 이상 염려를 내 것으로 품지 맙시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걱정하고 계십니까? 가정, 자녀, 사업, 건강 염려 속에서 잘 모르면 주님이 해결해 주시도록 내어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3. 주님 안에 있을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변함없으신 주님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즉,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단순히 기뻐하라고 하지 않고 빌립보서 4장 4절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찬송가 455장에 보면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만 근심, 염려, 걱정이 사라집니다.

레마 주석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즐거움은 세상의 자극적 쾌락, 즐거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 기쁨의 근거로 모든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죄 사함의 은총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심’때문입니다. 셋째, 짧은 이 땅의 나그네의 삶을 마친 후 영원한 천 국에 대한 소망과 내세에서의 영생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기쁨을 소유하며 환란 가운데서도 커다란 기쁨을 맛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2)

이 땅의 것을 다 잃고, 염려 거리만 남았다고 해도 ‘주님을 통하여 받은 구원, 영생,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슬픔의 상황이 되어도 슬픔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겼기에 결코 괴로움과 고행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이며, 특히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철저하게 미워하시지만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으로 인한 기쁨의 종교입니다.

평소에 절에 다니던 할머니가 신실한 기독교인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이했습니다. 며느리가 너무도 착하고 시부모를 잘 모셨습니다. 할머니는 며느리의 소원이라 해서 교회를 한 번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그 다음주, 또 그다음 주도 계속해서 교회에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가 하도 신기해서 시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어머니, 그렇게 오랫동안 절에 다니셨으면서 어떻게 교회에 적응하셨어요?” 이때 시어머니의 말씀이 “얘야, 절에 다닐 때는 내 마음이 평안했었고 맑은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기쁨은 없었단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이 할머니는 교회의 표징을 너무도 잘 보신 것입니다. 죄 용서하심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인해 결코 슬퍼하지 않습니다. 기쁨에 찬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는 감옥 안에서도 주 안에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이 지은 위대한 책 『천로역정』에 보면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천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한 발만 잘못 헛디디면 빠져 죽는 수렁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앞에 갑자기 통로가 열리면서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라. 그리하면 무사할 테니” 그것은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아무리 인생이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안에 거하면, 위험한 고비나 장애물도 거뜬히 건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동행해 주시는 것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참으로 멋있고,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4. 감사할 때 기쁨이 찾아옵니다

저는 성령의 열매를 묵상하며 처음에는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 중 하나인 ‘감사’가 열매의 종류에서 왜 빠져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한참 후에야 기쁨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나름대로의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감사는 늘 기쁨과 함께 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망, 불평 속에는 결코 기쁨이 없습니 다. 표정에서 우울하고, 눈치 보고, 인상 쓰는 사람의 마음과 생활에는 결코 감사가 없습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곧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도 서두에 “기뻐하라”라는 말씀을 한 후 ‘감사와 자족’에 대한 말씀으로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0절에서는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11절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감사는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잃은 것보다 남은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코는 『감사해요, 고마워요』라는 책에서 이렇게 그의 부부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적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둘 다 몸이 너무도 병약했습니다. 성격 또한 자존심이 강하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늘 원망과 불만 그리고 슬픔 속에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두 사람의 생각과 생활은 너무도 바뀌었습니다. 비록 몸의 상태와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마음은 너무도 달라졌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여보, 만약 자아가 유달리 강한 우리가 몸마저 건강했더라면 아마 오만, 방종하고 잘못된 길을 가서 우리는 교도소에서 만났을 거야.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 너무너무 감사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는 순간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 은혜에 맞추게 됩니다. 또한 잃어버린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순수한 감격이며 고상한 즐거움입니다. 기쁨은 꼭 요란하게 방실대는 것이 아닙니다. 기질마다 표현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어떤 분은 말을 안 해도 빙그레 웃으며 늘 기뻐하고 감사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큰소리로 고백하고 웃으며 감사하는 분이 있습니다. 물질로 하나님께 표시하는 분도 있습니다. 기쁨은 언어로 표현됩니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그 언어 속에 드러납니다. 기쁨은 감사라는 언어로 표현됩니다. 또한 기쁨은 말로만이 아니라 표정으로, 행동으로, 드림의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 기쁨이 없다면 진정한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나지막하면서도 강력한 권면의 소리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그것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십시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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