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1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58-271

* 본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인생을 후회와 여한이 없이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사람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이 공통되게 하는 말이 “열심히 사랑하며 살라”라는 것입니다. 13년 전 주교 김수환 추기경의 임종 시 던진 두 가지의 말은 당시 온 국민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바로 “고맙습니다. 사랑하며 사세요”라고 하는 감사와 사랑의 실천에 대한 두 가지 당부의 말이었습니다.

인생의 종착역에서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인가를 이루어내지 못해서도, 원수를 갚지 못해서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로빈슨(John A. T. Robinson)의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에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악의 주된 원인을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결핍이야말로 모든 인생 문제의 중심에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랑의 사도였던 요한도 늘 말년에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도 사랑하며 사세요”였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다혈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중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요한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변함없으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사랑하지 못했던 자신을 바라보며 후회와 아쉬움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가 말년에 에베소에서 목회를 할 때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도저히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을 때에도 옆에 젊은 제자가 양쪽 겨드랑이를 부축을 하여 강대상에 올라가면 “여러분, 사랑하며 사세요”라는 한마디 말씀만 하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성령의 열매 첫 번째가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때가 약 A.D. 47년경입니다. 그는 안디옥을 출발해서 서쪽으로 수백 리를 여행해서 현재 터키 땅 갈라디아 지방에 도착해서 많은 교회들을 설립합니다. A.D. 49년경에는 제2차 전도여행을 하는데 이때 다시 한번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하고 설교하게 됩니다.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온 바울은 자기가 보고 온 갈라디아 교회의 사정들을 생각하며 성령의 감동하심 따라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갈라디아서가 탄생했습니다.

글을 쓴 첫 번째 이유는 바울이 처음에 전도하고 떠난 후, 거짓 교사가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하여 잘못된 것을 가르침으로써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신앙의 뿌리를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례와 안식일 등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잃 어버립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또다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예수에 대한 바른 소개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윤리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근본적인 죄 문제 해결과 구원의 유일한 길과 믿음의 대상으로 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문제의 답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갈 5-6장).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면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방언, 예언, 신유, 뭔가 색다른 신비한 체험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산에서 기도하다가 특별한 체험하는 것이나, 은사의 체험을 성령세례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잘못 이해해서 ‘은사’와 ‘세례’를 혼돈하여 해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하던 일이 무엇이든지 접고 신학교를 가서 목회자가 되거나 아니면 특별한 일과 사명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자 노력하며,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삶의 현장에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란 말은 19절의 ‘일’이란 말로 대치될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의 일을 하고 삽니다. 주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내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내 속에서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는 당연히 주님의 인격을 닮습니다. 주님을 닮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바울은 9가지의 열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성령의 열매 9가지 중 첫 번째 맺어야 할 열매로 ‘사랑’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열망 또한 있습니다. 저에게도 내면 깊은 속에 열망이 있다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고 싶습니다. 마음껏 사랑하고 싶습니다”라는 열망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란 의미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만나면 만날수록,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이 일게 됩니다.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원리가 담겨 있고, 사랑하며 살 때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인생의 길, 특히 성도의 길을 걷는 데 있어서 사랑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한마디로 성도가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달콤하고, 야릇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을 할 때 아픔도 있고, 희생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종 차별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바로 그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곳에서는 백인과 흑인은 함께할 수도 없고 심지어 예배도 함께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고난주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흑인들이 출석하는 시온교회라는 곳에서 담임목사님이 고난주간 특별행사를 광고하고 신문에도 내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특별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정신을 본받아 금번 고난주간에는 정말 자신이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예식을 거행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족식을 거행하는 예배에 상상할 수 없는 인물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차기 대법원장으로 내정된 ‘올리버’라는 이름의 백인 판사였습니다.

그는 세족 예식의 광고를 듣고 자기 집 흑인 여종이었던 마르다 포트윈의 발을 씻어 주고자 신청했던 것입니다. 그의 차례가 되자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발을 씻어주며 연신 “고맙다. 고맙다”를 연발합니다. 심지어는 조용히 더러운 늙은 여종의 발에 입을 맞추기까지 합니다. 예배 후에 목사님이 사연에 대해 간증을 요청하자 올리버 판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마르다는 내 집 종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내 아들딸들을 돌보아 왔고 나는 마르다가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주는 모습을 수십 번, 수백 번 보아 왔습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모두가 그의 작은 사랑 앞에 숙연해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이 사건이 소문이 나서 결국 그는 백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대법원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판사직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온교회 목사님이 위로차 심방을 가서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데 의외로 올리버 판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판사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다 내려놓고 가야겠지요. 무덤 갈 때는 이런 것도 다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 다. 정말 올리버 판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정말 느끼고 산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관계가 아직 회복이 되기도 전에 반역하고 불순종한 원수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희생시키기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인간의 능력과 이성으로 이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이 가슴에 와닿는다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할 것입니다. 당연히 이 땅에서도 그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며 살려고 할 것입니다.

2. ‘사랑’은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살신성인의 사랑으로 불과 몇 사람을 살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극치이며 사랑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전 삶을 통해 완전한 사랑의 진면목을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자체가 이미 엄청난 사랑의 증거입니다. 권능과 영광의 하나님께서 크신 영광 버리고 이 땅에 비천한 피조물의 형상으로 오셨다는 것은 지극하신 사랑이라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선이나 동정의 내용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사랑이 머문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의 표현이셨습니다.

같은 처지가 되고, 같은 조건이 될 때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한 처지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잠시 잠깐의 사랑이 아닙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도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은 ‘용서’의 사랑이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용서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용서를 실천하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랑이 더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죄로 인해 어그러진 왜곡된 성품을 가진 인생이 타인의 실수와 잘못이나, 심지어 자신에게 극심한 피해를 준 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어려운 일이지만 해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닮을 수 있나요? 용서의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서양 사람은 용서에 대해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 번째는 ‘용서하고 잊으라.’ 용서했다고 하면서 마음에 두고 있으면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그 사실까지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 용서는 하되 그 교훈만은 잊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을 그들의 아픔의 현장인 맛사다로 데려갑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 저린 아픔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근대에 일어난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을 향하여서도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라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대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미리 대비하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마음에 품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용서를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는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완전히 용서하고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진정한 용서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12장 20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용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불쌍한 처지까지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까지는 못하겠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합니다. 이것까지라는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몫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에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기독교의 모든 덕목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균형 있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띠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조건부가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7절에서도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랑은 형제, 친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사랑의 대부분은 이 사랑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희생적 사랑, 조건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손해 보고 불이익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거룩한 사랑을 본받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사랑을 강조하는데 ‘사랑의 Paradox’라 할 수 있습니다. 3가지로 요약하면 하나,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은 자신을 낮추고 이웃 사랑을 극대화 하라. 둘, 우리를 박해하거나, 피해를 준 자를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어주라. 셋, 원수가 있다 할지라도 돌보아줄지언정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라.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행동 중의 하나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의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봐주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봐주고 긍휼히 여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복을 빌어주고 도와주는 단계까지를 말합니다.

3. ‘사랑’은 자신과 상대방의 장점을 보는 것입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행복의 정복』이란 책을 보면 불행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많다, 적다, 높다, 낮다, 크다, 작다, 잘한다, 못한다는 식의 비교의식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가진 것보다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관심을 두게 합니다.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자신에게도 장점이 있음을 알고 자기 자신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부족하지만 불쌍히 여기시고 나의 장점을 바라봐 주십니다. 부족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상처많고, 문제 있고, 연약한 자를 들어서 승리케 하십니다. 사랑은 좋게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장점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찬송가 411장 3절을 참 좋아합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세상 사람은 연약하고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무시합니다. 함부로 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수록 오히려 더욱 귀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인데, 솔로몬 왕과 시골처녀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 간의 사랑을 상징한 노래입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아 1:5-6)

술람미 여인의 형편은 가히 실망스러울 정도입니다. 계모 슬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배다른 형제의 미움을 받습니다. 젊은 처녀가 힘든 포도원 농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외모도 작열하는 태양빛에서 장기간 일을 하다가 보니 피부가 검게 그을렸습니다. 윤기도 없었을 것이며 다른 외모도 형편없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심지어 피부는 자신이 표현한 대로 게달의 장막 같았습니다. 게달의 장막 같다는 말은 늙고 병든 염소 가죽을 의미하는데, 구멍 나고, 털이 숭숭하며, 뻣뻣하여 못쓰는 가죽을 말합니다. 즉, 현실은 정말 볼품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긍정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사람도 그를 아름답게 볼 수 있습니다.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이 사랑하시므로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며 남의 사랑도 받을 수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약점, 단점을 받아들이되 자신은 사랑받는 여인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부심과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객관적인 자격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솔로몬의 진실한 사랑을 받습니다. 형편없고, 힘들어도 변치 않고 나를 예쁘게 봐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장점을 보고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도 나의 단점을 보지 않으시고, 장점과 좋은 점만을 먼저 보십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아름다운 것과 장점을 먼저 보십니다. 우리도 남을 볼 때에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의 결과일 뿐 아니라 성도에게 명령하신 중요한 의무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9절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웃의 단점을 보고 솟아나는 미움의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장점을 보고 사랑의 감정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4. 참된 사랑은 아픔과 고난 속에서도 참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절정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특징은 ‘지속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내어주기도 합니다. 그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 같습니다. 영원할 것 같다가도 금방 기분 상하는 말 한마디에 때론 알아주지 않는다고, 손해 보는 것 같다고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어 주는 일보다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일이 더욱 어렵고도 소중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를 보면 사랑을 하시되 전부 희생과 인내의 사랑이셨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인내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조건적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너무도 이기적일 때도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동물보다도 그 사랑이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을 하되 희생이 요구되고 인내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조금 하다가 쉽게 포기하거나 지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달라질 가능성이 없으면 포기하고 맙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참고 기다려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인내하셨을 뿐 아니라, 희생하셔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살전 5:14)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받은 사람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내가 과연 지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필자가 미국 유학 중에 9·11테러라는 엄청난 상황을 직접 현지에서 듣고 보았습니다. 당시 이 사건이 있은 후 CNN등 주요 방송에서는 계속해서 사고 상황과 함께 수많은 희생자들의 죽기 전의 통화 내용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후회하는 것은 사랑하지 못하며 산 것입니다. 후회 없는 삶,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핵심은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톨스토이(Leo Tolstoy)의 말처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곳은 바로 우리가 있는 곳이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바로 지금 여러분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분명 지금은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언젠가는 확실히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히 볼 날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희망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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