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예배 1주차

* 설교자 :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 페이지 : 210-221

* 본문:

사무엘하 9장 1-13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왕의 몰락은 필연적으로 그 왕과 함께한 고관대작들과 관료를 포함하여 직계가족과 일가 친인척의 몰락과 패망으로 이어집니다. 사울 왕이 길보아 전투에서 아들 셋과 함께 전사해 사울 왕조가 끝이 납니다. 그때부터 사울 왕에게 갖은 고초를 당했던 다윗이 왕이 되고 다윗 왕조가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사울 왕과 그의 집안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식과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의 죽음을 이스라엘 그 누구보다 슬퍼하며 애통함으로 백성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고, 투항하던 ‘아브넬’을 ‘요압’이 죽이자, 그의 죽음에 애가를 지어 부름으로 통곡하는 모습이 투항을 주저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안심을 안겨주면서, 배척이 아니라 포용으로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다윗은 나라를 세울 때 죽이고, 숙청하고,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품고, 함께 울고,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세웠습니다. 다윗은 품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오히려 두 지파와 열 지파로 나누어졌던 이스라엘은 신속하게 하나로 회복되었고,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니 강력한 힘이 생겼습니다. 그 하나 된 힘으로 주변 국가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갑니다. 서쪽으로는 블레셋으로부터, 위로는 ‘다메섹’과 ‘아람’, 동쪽으로는 ‘모압’과 ‘에돔’, 남으로는 ‘아말렉’까지 모두 점령하여, 다윗의 나라를 사무엘하 8장 9절 하반 절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삼하 8:9b)

어느 정도 왕권이 안정되고 주변 나라들과도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다윗의 왕국은 든든하게 세워졌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 같은 그때 오히려 다윗의 마음에 풀지 못한 숙제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자기가 가장 힘들 때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던 친구 ‘요나단’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이미 죽었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자니 그의 가족을 찾아서 은혜를 베푸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 내용이 9장 1절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삼하 9:1)

다윗은 요나단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요나단 집안의 사람에게 그 은혜를 대신 베풀고자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요나단과 세운 언약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0장 15절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마지막 부탁 하나를 합니다. 요나단은 이미 자기의 왕조가 멸망하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생명을 살려주던 그 시간에 한 가지 언약을 체결합니다.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삼상 20:15)

다윗이 그날에 요나단과 맺은 이 언약을 기억하고 요나단의 집안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한 것입니다. 요나단 집에서 일하던 종 하나를 불러 그에게 요나단 집안 사정을 묻습니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삼하 9:3)

사울 왕의 종이었던 ‘시바’는 다윗이 ‘므비보셋’을 챙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므비보셋이라는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그냥 하는 말이 “요나단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저는 자입니다”라고 그의 신체 특징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살아있는데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13절에 보면 한쪽 다리만 저는 것이 아니라 두 다리를 다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시바가 “다리를 저는 자니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 장애인은 왕궁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바의 이 말의 뜻은 “요나단의 아들이 있으나 왕궁에 불러들일 만한 사람은 못 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에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의 거처를 물어보니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고 합니다. ‘로드발’ 뜻은 ‘목초가 없는 황무지’입니다. 므비보셋이 나무도 풀도 없는 광야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다윗 왕 앞에 끌려오다시피한 므비보셋이 왕 앞에 엎드려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므비보셋이 여” 므비보셋이 대답합니다. “보소서 종이 여기 있나이다.” 이렇게 다윗과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자, 이제 카메라의 앵글을 돌려 므비보셋을 주인공으로 해서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왕인 사울 할아버지와 왕자인 요나단의 아들로 태어난 므비보셋은 그야말로 금수저로 태어났습니다. 시간이 가면 아버지가 왕이 되고, 시간이 더 흐르면 그가 왕이 되는 왕족입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다섯 살 되던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같이 블레셋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길보아 전투에서 두 분 다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됩니다. 순간 사울 임금의 집안사람들은 블레셋과 다윗의 군대를 피해서 급하게 도망을 갑니다.

도망을 가던 유모가 므비보셋을 떨어뜨려 그만 두 다리를 모두 절게 됩니다. 후천적 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목발 없이 걸을 수 없고, 들키면 죽게 되고, 부모도 없이 자란 인생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 셋 중의 하나만 겪어도 불쌍한데 므비보셋은 고아로, 장애인으로, 도망자로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다윗 왕이 자기를 어떻게 찾아내었는지 왕궁으로 당장 소환을 합니다.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는 마치 도살장으로 가는 양처럼 다윗의 궁으로 끌려갑니다. 다윗 앞에 끌려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므비보셋은 죽은 자처럼 엎드려 있습니다. 당장에라도, “여봐라 저놈을 죽여라”라는 소리가 들릴만한데, 자기를 부르는 다윗의 목소리가 너무 따듯합니다. “니가 므비보셋이냐?” 그러자 대답합니다. “예, 제가 당신의 종 므비보셋입니다.” 다시 다윗의 말이 이어집니다. “므비보셋이여, 내가 너의 아비 요나단에게 많은 사랑과 빚을 졌다. 너의 아버지와 내가 옛날에 언약을 하나 세웠다. 요나단의 집안사람을 지켜주는 것이다. 내가 이제 그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려 하노라. 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은혜(헤세드)를 베풀어 주겠다. 너 아버지의 땅뿐 아니라 할아버지 사울에게 속한 땅을 너에게 모두 되돌려 주겠다. 그리고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다. 이제 다른 왕자들과 똑같이 왕자의 옷을 입고 왕궁에 거하면서 다른 왕자와 똑같이 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여라. 너의 생명을 내가 지켜주겠다”

지금 므비보셋에게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헤세드의 은혜. 그 말을 들은 므비보셋의 반응이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슴 먹먹하고도 뭉클한 고백을 합니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삼하 9:8)

“이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 같은 나를 돌보시나이까?” 원어를 그대로 해석해서 옮기면 “이 종이 무엇이기에 저를 돌보십니까? 저는 죽은 개입니다.” 이 고백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죽은 개 같은 나”가 아니라, “나는 죽은 개입니다”로 훨씬 더 비참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였던 므비보셋에게 헤세드의 은혜가 임하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죽었던 모든 것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빼앗겼던 신분이 다시 왕자로 살아났습니다. 빼앗겼던 재산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도망자의 신분이 왕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빼앗겼던 세마포 옷을 다시 입게 되었습니다. 헤세드가 임하니 완전히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헤세드가 임하면 신분의 회복, 신분에 어울리는 소유의 회복, 죽은 개와 같은 운명에서 살아있는 왕자로 완전히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은총, 은혜, 헤세드가 임할 때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자, 여기에서 므비보셋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이런 회복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에게 임한 이 헤세드 은혜의 단 한 가지 이유는 ‘요나단과 세운 언약’ 때문입니다.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삼하 9:7)

므비보셋이 받은 은혜는 므비보셋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요나단 때문입니다. 우리는 므비보셋과 다윗의 모습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요나단 때문입니다.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지, 우리가 잘나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는 은혜라고 해석될 수 있는 단어가 세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은혜인 ‘헤세드’, 하나는 자비에 가까운 ‘라함’, 하나는 호의로 해석할 수 있는 ‘헨’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은혜는 ‘헤세드’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이고, 변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Unbreakable Grace.’ 지금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다고 할 때 이때 단어는 ‘헤세드’ 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유는 요나단의 후손을 책임지기로 요나단과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살아있다면 다시 불러서 약속을 수정할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취소할 수도 있지만, 요나단이 죽었으니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야 할, 변할 수 없는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과 세운 언약 때문에 므비보셋을 무조건 살려주고 보호해주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도, 우리에게 무슨 선함이나 구원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서로 언약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간의 약속이기 때문에 수정되거나, 바뀌거나, 취소되지 않고 영원한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을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행 15:11)

또한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5)

구원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공로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일 뿐이지,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속에서 여러분은 누구를 제일 많이 닮았습니까? 어떤 인물을 보면 가장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고, 도전이 되고, 예수님께 고마움을 느낍니까? 모세를 닮았나요? 다윗을 닮았나요? 온유한 노아를 닮았나요? 아닙니다. 므비보셋을 가장 많이 닮았을 것입니다. 버려진 인생(그가 살고 있었던 ‘로드발’은 – 목초가 없는 황량한 광야라는 뜻),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생, 죽음에서 도망치는 인생이 므비보셋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 그날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무능한 인생, 누가 나타나 살려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생, 자력으로 지옥 가는 인생에서 천국으로 바꾸어놓는 능력이 전혀 없이 운명의 사슬에 묶여서 사는 인생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므비보셋은 두 발을 저는 사람이라 장애인이라 했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디 다른 모습이던가요? 눈이 있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귀가 있어도 음성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 입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고 찬송하지 않는 언어장애인, 손이 있어도 봉사하지 못하는 지체장애인, 발이 있어도 전도하지 못하는 지체장애인, 우리의 힘으로는 단 한걸음 천국으로 걸어갈 수 없는 지체장애인,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유명한 강해 설교자이면서 달라스 신학교 총장이었던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그의 책 『Grace Awakening(은혜의 각성)』이라는 책에서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아주 감동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저녁 만찬을 알리는 종이 왕궁에 울려 퍼지자, 다윗이 식탁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얼마 후 영리하고 간교한 ‘암논’이 다윗의 왼쪽에 자리를 잡습니다. 사랑스럽고 우아한 ‘다말’,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이 젊은 여인이 도착하여 암논 옆에 앉았습니다. 저쪽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솔로몬’이 천천히 걸어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아들은 조숙하고 영리하며 공부에 여념이 없는 왕자입니다. 그리고 ‘압살롬’, 잘 생기고 쾌활한 압살롬이 어깨까지 늘어진 까맣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찰랑거리며 등장합니다. 그 특별한 날 저녁, 용맹한 전사이자 다윗 군대의 사령관인 ‘요압’이 만찬에 초대받았습니다. 구릿빛의 근육이 돋보이는 요압이 왕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 다. 다 모인 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고, 철커덕철커덕 목발 소리 요란하게 ‘므비보셋’이 등장하여 조금은 어색한 듯 자기 자리를 찾아 쓰윽 의자에 앉습니다. 그는 식탁보로 자신의 발을 가립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이 순간 므비보셋은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20대에 이 책을 읽고 이 부분이 너무 감동적으로 다가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이 이야기를 기억할 때마다 저는 천국에서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해 보곤 합니다. ‘천국의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녁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식탁의 상석에 앉으십니다. 얼마 후 수염을 길게 기른 교양미 흐르는 ‘모세’가 들어와 예수님께 가벼운 목례를 하고 왼쪽에 앉습니다. 조금 후 찬란한 옷을 입은 ‘에스더’가 ‘미스 페르시아(페르시아 최고의 미녀)’의 위용을 과시하듯 사뿐히 걸어와 그 옆에 앉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있는 음악이 들리는가 싶더니 ‘다윗’이 하프를 연주하면서 환한 얼굴로 들어와 예수님께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습니다.

성큼성큼 발자국 소리가 자신감 넘치게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데, 보니 수염이 덥수룩한 ‘베드로’가 시장함이 충만한 얼굴로 들어오면서 한쪽 눈으로 예수님께 윙크를 하고 자기 자리에 앉습니다. 조금 후에 대머리가 반짝반짝하는 ‘바울’이 볼록 나온 배를 쓰다듬으면서 두꺼운 책을 허리춤에 끼고 들어와 앉자마자 책을 펴서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어있는 오른편 자리에는 모든 천군과 천사를 관장하는 ‘미가엘’ 천사장이 예수님 옆을 지키고 앉았습니다. 조급한 베드로가 헛기침을 한두 번 하더니, “예수님 이제 식사하시지요…” 하면서 포크

를 집어 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직 아니야…잠시만, 한 사람이 더 와야 해”라고 하십니다.

그때 저만치 복도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그 발자국은, 소리만 들어도 자신 없는 발걸음입니다. 두 발짝 걸어오다가 세 발짝 뒤로 물러나는 듯, 서성이는 발소리입니다. 그 발자국 소리는 많이 지쳐있고, 고단한 발자국입니다. 점점 그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에스더도, 다윗도, 베드로와 바울도 모두 시선이 그 발자국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드디어 문소리가 들리고, 그 발자국의 주인공이 들어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반갑게 일어나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정면으로 보는 맞은편 식탁에 앉힙니다. 당신의 엉덩이가 식탁에 닿는 순간 천국의 저녁 만찬의 음악은 다시 울리고 축제 같은 저녁 식사가 시작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쳐다보며 눈으로 묻습니다. “예수님, 제가 무엇이관데, 저를 이리 대하시나이까?” 그때 예수님께서도 눈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는 너를 위해 태초부터 남겨둔 자리였단다. 영원토록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왕의 식탁에 참여하 도록 하여라.”

그 천국의 잔칫집 같은 저녁 식사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여러분을 조롱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주고, 불에 던지고, 칼을 휘두르고, 사자를 풀어 물어뜯게 했던 사람들, 지금은 지옥에서 소리치며 날 살려달라는 그 사람들 눈에 식탁에 앉은 여러분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지옥 불의 고통보다 더 부럽고 큰 고통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시편 23:5, 새번역)

은혜가 무엇입니까? 부름받을 수 없는 자가 부름을 받아, 될 수 없는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먹을 수 없는 자리에 매일 초대되어 영원한 왕의 식탁에서 살아가는 자가 된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나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조건을 충족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아무 공로 없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시고, 평생에 천국의 식탁에서 먹고 살아가는 왕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헤세드의 은혜입니다.

오늘 그 천국에서 모세와 다윗,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천군 천사가 시중드는 그 영광의 자리에 여러분 모두 반드시 초대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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