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2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84-295

*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오늘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강해 여섯 번째 시간으로 ‘사랑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첫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두 번째는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참으로 겉모습은 교회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교회 답지 못하고 성도 답지 못한 모습을 참 많이 가진 교회였습니다. 서로 간에 자기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분파를 만들어서 매일 계보에 따라서 싸우는 것도 모자라서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매일 교회 안에 갈등과 반목이 많고, 성도들끼리 다투고, 남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상처를 주는데 교회 안에 모든 문제는 사실 그 자체의 문제는 크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를 추적하고 추적하면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2장에 온갖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너희가 엄청난 은사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은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지금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그들이 사랑이 없었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1장 21-22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전 11:21-22)

칭찬하지 않노라고 하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상황입니다. 우리가 2,000년 전 고린도교회로 가 봅시다. 그들은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기 전에 꼭 애찬식을 먼저 했습니다. 식사를 먼저하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 예식을 거행하고 시편으로 된 찬양을 부르고, 그다음에 사도들이나 또 속사도들이 나와서 3시간 또는 4시간

동안 설교를 합니다. 이것이 거의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찬식을 하려고 집에서 각자 음식을 마련해 왔습니다. 그 당시에 코린디우스는 굉장히 번창하고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코린디우스에는 코린디우스 운하도 있고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코린디우스의 유물들을 보면 유적지가 굉장합니다. 엄청난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고급 관리들도 많았습니다. 세상적으로 굉장한 철학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동네에서 교회도 계층 간, 분파 간에 갈등이 심했는데 음식을 각자가 조금씩 가지고 와서 잔치를 했습니다.

부자들은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을 갖다 놓고, 가난한 자들은 가지고 올 음식도 없는 것입니다. 첫 번째 21절에서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한다”라는 것은 각자 분파별로 먼저 먹고 나중에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 보면 그래도 힘이 있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 먼저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 음식을 가지

고 왔으니까 엄청나게 많은 양을 가지고 와서 자기들끼리 먹어서 나중에 줄을 선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먹을 것이 많아서 엄청나게 버리는 데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전혀 남에게 대한 배려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음식은 우리가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대지 말고 자기 것은 자기가 먹고, 취하고 먹고 남은 것을 버리는데 어느 한쪽에는 가지고 온 음식도 없고 순서가 안 되어서 먹을 것이 없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고린도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은사도 기적이었습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에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잘 났고 너는 못 났고 내가 가진 은사는 대단하고 네 은사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하합니다.

더 나가서 8장에 보면 우상의 재물 문제를 가지고서 사람들이 서로 남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한쪽 부류는 시장의 음식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시장의 물건을 사서 먹어야 하는데 시장에는 우상의 제물이 많이 팔렸습니다. 우상에게 제사 지냈던 물건들을 파니까 백성들이 사 먹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한쪽에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상 제물로 쓴 것을 사서 먹어?” 여러분 그러면 굶어 죽어야 하나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명쾌한 답을 줍니다. ‘거리낄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자기가 지금까지 해왔고, 자신의 경험과 내용을 가지고 성도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남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 비판합니다. 고린도교회와 지금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Love is not self-seek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사상 헬라어를 가장 잘 했다고 하는 목사님은 윌리엄 바클레이(Willam Barclay)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헬라어를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기도 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번역한 영어 성경을 보면 굉장히 분명한 것이 많습니다. 본문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문장을 어떻게 번역을 하느냐 하면 “사랑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남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으로 번역한 헬라어 ‘타 헤아우테스’라고 하는 말은 자기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자 하는 모든 마음, 자기의 이익만을 구하는 마음, 소유욕, 자기 권리 등을 말하는 굉장히 포괄적인 단어입니다. 작은 일 하나에도 남을 배려하고, 내 주장보다는 남의 주장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작은 부분부터 남의 권리를 인정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참 사랑은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으로 몇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좀 더 적극적인 말로 뒤집어 보면 ‘남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내 유익과 이기심만 앞세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남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참 많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4)

오늘 나왔던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면서 뒤에 붙은 말이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절에도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에베소서 6장 6-7절에는 좀 더 적극적이고 세부적인 말씀으로 가르쳐줍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데, 우리 주님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중요한 단어를 뭐라고 보느냐 하면, ‘억지로’ 하고, 또 내가 그것을 형식적이거나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그 기쁜 마음이라는 단어가 ‘단 마음’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단 마음’으로, 물론 한문을 보면 단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단호’라는 말을 안 쓰고, ‘단’이라는 말을 쓸 때는 ‘기쁘게, 단호하게’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리고에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전달하시고자 했던 메시지는 ‘너희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살아라.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라.’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는 물론 일상생활 속에서도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을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시간 날 때 예배드린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가장 위대한 종교개혁가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정상적인’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 말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남에 대해서 3가지 마음이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한번 테스트해 보시길 바랍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짐과 고통을 꼭 같이 담당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어려운 입장과 환경이 다 이해가 되는 마음이 든다. 셋째, 다른 사람의 처지를 자기 문제처럼 생각한다. 저 사람의 문제가 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저 교회의 문제가 내 교회의 문제이고, 저 가정의 문제가 내 가정의 문제처럼 생각이 될 때 같이 동참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이 세 가지가 있어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목적으로 삼거나 주인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스스로 지음 받은 것도 아닙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베드로전서 1장 19절을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피로 살게 된 존재’임을 보여 줍니다.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 보혈의 피로 살게 된 우리들은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가 성공하는 어느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다릅니다. 인본주의는 다릅니다. 인본주의는 모든 가치, 기준, 모든 중앙에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아 추구는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인 무기이고, 사람들이 자아를 실현하고자 할 때, 가장 도덕적이 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기를 많이 생각하고,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제일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가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건강도 챙기고, 무엇을 하든 내 것을 생각합니다. 사회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도 “우리의 최고의 소명은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인본주의는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엄격합니다. 자기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모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도, 밖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해도 자기가 말하는 것은 모두 맞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뭘 해도 다 맞는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는 엄격해야 하고, 남에게는 관대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위해, 동료와 이웃과 성도들과 연합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 12:5)

요즘 이 시대는 어떻게 하든지 내가 잘 되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갤럽에서 100명의 청소년에게 “어떻게 하면 위대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청소년들은 충격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4위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으면 된다. 3위 재벌이 되거나 돈을 많이 벌면 된다. 2위 스타가 되어야 한다. 1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을 누르고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요즘 젊은 청소년들이 위대해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 다. 남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을 죽이고 남을 이겨야 한다. 그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과거의 씨름 선수 가운데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이 세 사람이 이름을 날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TV를 보면 키도 더 크고 덩치도 좋은 이준희 선수가 항상 이만기 선수에게 집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준희 선수가 라이벌이던 이만기 선수를 이긴 적이 있습니다. 이만기 선수를 이기고 나면 보통 상대방 선수들은 기분이 너무 좋아 세리머니로 모레를 던지기도 하고 팔을 벌려 파이팅 하며 포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준희 선수는 지기만 하다가 힘겹게 이만기 선수를 이겼는데 빙그레 웃기만 하고 자기의 자리로 가더랍니다. 기자들이 와서 물어봤습니다. “이만기 씨는 당신을 이기고 나면 손들고 환호하는데 당신은 왜 조용하게 웃기만 하지요?” 그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저는 패자의 아픔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만기 선수가 맨날 이기다가 졌으니 얼마나 속상하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역시 신사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한 사람입니다. 패자의 아픔을 읽을 줄 아는 승자, 상대방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마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은은한 예수의 향기가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남을 섬기며 살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주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리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주장,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느냐’의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대속물로 죽게 하심’, 또 하나는 ‘섬기심’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절정은 주는 것이며, 섬기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성도는 좋은 것을 주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셨습니다.

남에게 주더라도 늘 좋은 것을 주십시오. 어떤 분은 말 한마디라도 꼭 좋지 않은 것(나쁜 것)을 줍니다. 빈정거리고, 남을 비난하고, 모욕하고, 업신여기고, 깎아내리고, 그래서 자기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것이 다 자신에게 갑니다. 주님이 갚아주신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야기처럼 말한마디라도 좋은 말로 해주세요.

저의 은사였던 리처드 포스터(Richard J. Foster)는 “예수님의 사랑하면 떠오는 것이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십자가’고 하나는 ‘섬김’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바로 목숨까지도 주는 사랑입니다.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한 것을 남을 위해 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주장과 권리를 포기한 일인데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를 팔 원수, 자기를 배신할 제자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큰 섬김보다 더 힘든 것은 삶의 작은 섬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진실로 하라’는 단어가 들어갈 때는 굉장히 강한 강조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0) 우리가 작은 자에게 하는 헌신 하나는 예수님에게 하는 것이라고 마태복음 25장 45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 삶, 즉 오직 남을 사랑만 하며 살아가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맨날 손해 봐라! 바보같이 살아라! 네가 망해라!”라는 이런 유의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얘야, 평생 사랑에만 관심 가져라, 작은 헌신과 사랑만 하며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반드시 후회합니다. 그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라는 책에는 예수님께 마리아가 예수님이 향유를 부은 그 섬김의 특징을 몇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 침묵 속에 섬겨라. 말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둘째, 눈물이 있는 섬김을 하라. 그것은 감사하며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서 하라는 겁니다. 셋째, 자기를 하찮게 여기는 섬김을 하라. 넷째, 그 대상이 누구든지 존경과 사랑으로 섬겨라. 다섯째, 향기로 섬겨라. 섬김이란 이렇게 예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할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바로 저 자신에게 먼저 던져진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남은 인생을 이렇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그런 진정한 진짜 그리스도인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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