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1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72-283

*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1-4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대만의 제2의 도시인 가오슝에 가시면 성광신학교라고 하는 개신교 신학교가 있습니다. 그 신학교에는 ‘다니엘 첸’이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총장님으로 계십니다. 그분은 원래 세계적인 핵물리학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은혜를 받고 신학공부를 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신학교 교수 생활을 하다가 총장까지 되신 분이십니다. 정말 겸손하신 성품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니엘 첸 총장님은 다른 동료 교수들이나 젊은 교수님과 함께 출장을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 꼭 아침 이른 시간에 먼저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손수 준비를 하시는 것입니다. 또 식사 후에 마실 차까지 준비를 해 놓은 다음에 다른 교수님들이 일어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일어나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대접을 하고 차까지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대접받는 젊은 교수님은 상당히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총장님 이렇게 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런 행동을 하냐고 물으면 따뜻한 눈빛과 웃음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저는 단지 예수님의 흉내를 쪼금 내 보고는 것입니다.”

삶에서 작은 부분이나마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끝없는 사랑을 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받은 자로써 삶의 흉내를 내본다는 것, 참 괜찮은 일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생을 섬겨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 2가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사랑은 낮고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에 는 자기 생명까지 대속물로 주시는 모든 것을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장 강해 다섯 번째 시간으로 사랑의 덕목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덕목인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사랑은 절대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여러 가지 문제가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한 말씀을 쓰게 만든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교회를 향한 말씀이고,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말씀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당시에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분파의 문제였습니다. 교회가 다. 자기의 생각 따라 계파를 나누고 서로 잘 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자기 은사를 자랑하며, 교만하여 함부로 행동했던 사람들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 보면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라고 안타까워하는 바울의 탄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모일 때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서 하라”라고 안타까워하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될 단어는 ‘각각’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각각을 싫어하십니다. 부부도 각각, 자녀도 각각, 성도도 각각, 모임도 각각, 이것은 정말 안 좋은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모습도 14장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배당 안에 오면 사람들이 모두 각각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할 일과 자기를 드러내는 것만을 한다는 것입니다. 한 쪽에는 찬양하고, 한쪽에는 말씀을 암송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또 한쪽에는 서서 혼자 중얼거리며 방언 받았다고 방언하고, 또 한쪽에는 계시 받았다고 하고, 또 한쪽에는 방언 통역하고, 전부 자기 팔을 흔들며 각각의 자기 자랑만을 늘어놓는 안타까운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이고, 자기의 은사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교회 안의 무질서함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은 전부 무시합니다. 무례히 행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써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아닙니다. 사랑은 겸손한 자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섬기는 자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첫째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왜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하는데, 자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한 부분을 자랑하면 그 한 부분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자랑하며 고백합니다. “나는 좋은 부모 만나서 유산도 많이 받고, 생활도 이렇게 편안하게 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해.” 물론 맞는 말이고,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 중에 부모님을 통해서 가난을 물려받고, 빛을 물려받고, 상상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감사보다는 원망의 마음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낙심하게 되고, 용기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절망을 안겨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정말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적인 자랑은 엄청난 폐해입니다. 절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선한 의지마저 좌절시킵니다. 독한 시기를 일으켜 헛된 자랑의 경쟁에 불을 댕깁니다. 물론 사람의 이목에 집중과 박수갈채를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열심히 해서 남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남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랑을 하다 보면 대부분이 거기에는 반드시 숨은 함정이 있는데 자랑 속에는 과장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과장에는 거짓말이 들어갑니다. 허풍을 떨면서 뭔가 모르게 본질보다 더 크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자랑 속에 숨겨진 함정입니다. 거짓말이 뒤따르다 보면 어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릅니다. 막 자랑을 하다 보면 자기가 함정에 빠집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자신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도 모르는 단계까지 이릅니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허언 망상증이라고 합니다. 자랑은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부러워할 때 맛보는 우월감이 있지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자랑은 성도들이 금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랑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역대상 16장 10절과 시편 20편 7절에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5장 17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마음껏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자랑하고 교회도 자랑하고 목회자도 자랑하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도 자랑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도 마음껏 자랑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그 십자가로 내가 죄 사함 받았고, 그 십자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영원한 영생을 얻었는데 자랑할 것이 그것 말고 무엇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자랑을 합니다. 사람들은 외모 자랑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재능을 자랑합니다. 학식도 자랑합니다. 이 자랑은 자기도 남에게도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루이스 B. 스미스(Lewis B. Smith)라는 분은 ‘사람이 자랑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의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자랑한다’라고 했습니다. 자랑한다고 하는 것이 진짜 잘나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돈 자랑 많이 하는 사람은 돈에 대한 핸디캡이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부분에 자족하는 사람은 다 감사하는데 어느 한 부분을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어느 한 부분을 자랑하고 있다면 한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균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랑한다.’ 공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저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굳이 내 자랑을 한다면 사도 바울처럼 내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0절에 사도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내 부족함을 자랑합니다. 내 연약함을 자랑하고 사람들에게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위로와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교만은 자랑보다 더 위험합니다. 자랑이 외적인 것이라면 교만은 내적인 것입니다. 자랑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교만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자랑은 자신이 잘났기에 남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주장만을 말합니다. 고집이 아니라 자기 입장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8-19절에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배경으로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4가지의 파벌은 좀 쉬운 말로 하면 바울파는 교회설립 목사파입니다. 아볼로파는 현직 담임목사님파입니다. 게바파는 교회에 와서 집회를 하던 부흥사파입니다. 그리스도파는 여기 저기 하도 싸우니까 “나는 예수파다”라고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현직 목회자인 아볼로를 추종한 아볼로파와 설립자인 바울을 추종하는 바울파는 늘 싸웠습니다. 싸움의 이면에는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맞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바울에 대해 그는 몸도 약하고 말도 좀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아볼로파가 보기에는 더 이상 바울에게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볼로파가 바울파를 무시합니다. ‘내가 잘났고 맞다’라고 주장합니다. 교만한 자는 남을 깎아내리기를 좋아합니다. 서로 대적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특히 교만한 자의 가장 큰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결국을 자신을 패망에 이르게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서로 미워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겸손하므로 남을 나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장점을 칭찬하고 아볼로는 아볼로대로 성경공부도 잘한다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바는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수제자로서 은혜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던 게바파는 그가 바울보다 대단하고 크다는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안 하지만 깊은 심정에 그렇게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의 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사랑』이라는 책에 보면 겸손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가치하며 비열한 존재임을 알고 그에 합당한 생각과 마음의 습관을 가지는 것이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다’라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내 동료와 비교해도 보잘것없는 존재다.’ 셋째, ‘나는 내 능력과 지식이 보잘것없다’라는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심지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람의 직책에, 물질, 지식에 따라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그리스도인은 나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분의 장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낫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가 감사한 자고 감사의 배경에는 겸손한 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교만은 더 소중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무례히 행한다는 단어는 ‘무례하다, 거칠다, 상스럽다’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절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무례히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랑을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는 연속성으로 보여줍니다. 자랑하는 사람이 교만하고 무례히 행합니다. 헬라어로 ‘아스케모네이’이라고 합니다. ‘아’라고 하는 것은 부정의 의미입니다. ‘스케모네이’이라는 말은 ‘행실’, ‘모양’이라는 단어입니다. ‘아스케모네이’은 ‘행실이 아니다, 모양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원하시는 모양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원하시는 행동,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닌 것이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잘못된 방식으로 대하는 것, ‘그로세이드’라고 하는 분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이 무례히 행하는 것이다. 은혜롭지 못한 행동은 다 무례히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성도의 가치를 몰라주는 것,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사에 대한 사람들이 무례히 행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분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2장 23절에 보면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여기서 젊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철없는 아이들이 지나가며 대머리여 올라가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문을 보면 ‘파이디온’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젊은 청년입니다. 장성한 청년이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고 외모가 이상하다고 엘리사를 향하여 놀리면서 “대머리여 올라가라. 올라가라. 네가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무시하고 빈정거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던 수넴 여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왕하 4:9)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무례히 행치 않는 행동은 중요합니다. 『풍부의 법칙』이라는 책에 나오는 무례히 행치 않는 방법 4가지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상대방을 향하여 따뜻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구본영 씨의 『사람에게서 구하라』는 책도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냉소와 무시가 담긴 눈빛을 성도들은 조심하라. 너는 아니야 이 바보 같은 놈아, 말은 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그렇게 나쁜 감정을 눈빛으로 전하지 말라. 눈 빛 속에 정성을 담으며 생각보다 훨씬 좋은 감정을 전해 줄 수 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눈빛을 좀 가꾸어야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못되게 생겼다 하더라도 따스한 눈빛으로 남을 대해야 합니다. 남편을 바라봐도 무시하고 섭섭한 눈으로 바라보고 성도를 바라봐도 무시하는 눈빛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에게 지금까지 말로 축복했는데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십시오. 참 부부끼리는 어렵습니다. 연습이 필요합니다. 가장 사랑스럽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봅시다. 피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따뜻한 미소는 그리스도인의 얼굴이다.

어떤 분은 평생 웃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냉랭합니다. “나는 원래 기질이 그렇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기질도, 성품도, 말도 바뀌어야 합니다. 분명히 표정도 바뀌어야 합니다.

세 번째, 따뜻한 언어로 사람을 대하라.

언어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반말을 하면 안 됩니다. 상스러운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욕하면 안 됩니다. 거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무례히 말하면 안 됩니다. 가장 깍듯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대형교회의 어떤 목사님을 봤는데 교회 장로님을 보면서 반말을 하는데 목회자로서 기본이 안 된 것입니다.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의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들은 사랑이 없는 것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네 번째, 정중한 예의로 상대방을 대해야 합니다.

관계가 가까워지면 무례히 행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조금 멀 때는 예의를 지키다가도 가까워지면 무례히 행하게 됩니다. 부부간에는 더욱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지혜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예의를 지킵니다.

사무엘 마일즈(Samuel Miles)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은 고매한 인격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의 수단이 된다.’ ‘내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존중합니다. 내 인격은 예수님을 닮기를 원합니다’라는 결심이 여러분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 주님의 섬김을 생각하며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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