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고등부 설교

* 설교자 : 강주혜 목사 안산동산고등학교 교목

* 페이지 : 320-330

*본문 :

신명기 34장 10절-12절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자존감, 즉 하나님이 부여하신 참된 정체성을 소유하지 못한 분들이 공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체성이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한 답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조금 쉬운 예로 “당신은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저는 여자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좀 더 포괄적으로 ‘나’라는 사람이 가진 ‘정체성’은 그 사람의 고유하고도, 일생을 관장할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하고도 분명한 정체성을 소유한 사 람은 그만큼의 건강한 자존감을 소유합니다.

정체성으로부터 자존감이 나옵니다. 자존감의 뜻을 그대로 풀어서 말씀드리면, ‘자신을 존중하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백과사전을 보면 자존감을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는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은 스스로 그 가치를 내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내리는 가치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해나갑니다. 그런 이들이 내리는 정체성을 기껏해야, ‘나는 성공할 사람, 나는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이들은,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려주신 가치를 얻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체성을 소유한 자들은 물러설 수 없는 엄청난 자신감과 단단함으로 건강한 자존감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고, 또 건강한 자존감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의 말미에는 진심으로 여러분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정체성을 소유하길 염원하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성경을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2장 1절입니다. 1절부터 보시면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라고 말합니다. 레위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 지파로써, 제사장 가문의 지파이기도 합니다. 정통 레위인의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모세입니다. 만약 모세가 나일강에 보내지지 않았다면, 모세는 정통한 레위인으로서, 분명한 가문의 보장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마저도 노예일 뿐이었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레위인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소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흘려보내졌습니다. 그를 본 바로의 딸이 모세를 입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집트의 왕자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태어난 지 석 달이 되자마자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모세는 자신의 탄생 비화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이집트인들과는 외모가 다른 이방 민족의 입양아라는 정도로만 감지했을 뿐, 자신의 탄생 깊숙이 숨겨진 진실에 대해서는 모른 채, 이집트인의 신분으로 살았을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반전을 이룹니다. 바로 출애굽기 2장 7절입니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니까” 모세의 갈대 상자를 쫓아가던 모세의 누이가 공주를 대면하여, 유모를 추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애굽의 공주는 아마 이 아이가 지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일강으로 흘려보내진 이스라엘 아이라는 것을 그 당시의 상황과 아이의 생김새를 보자마자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하며 9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세의 생모가 모세를 키울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으로 자랍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생모가 이스라엘 사람으로 키웁니다. 이스라엘의 문화,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의 신, 이스라엘의 정체성, 이스라엘의 현실 등등을 교육했을 것입니다. 아마 평소보다 훨씬 더 간절한 마음으로 모세를 가르쳤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또한, 모세는 궁중의 예법을 몰라서는 안되는 왕자의 신분입니다. 혹독한 이집트의 궁정 문화를 배워왔을 것이며, 이집트의 신들과 제사법도 이미 능통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 개의 커다란 세계관이 부딪히며 모세는 자라났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정체성을 소유하고 있었을까요?

모세는 이집트 사람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이스라엘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출애굽기 2장 11절에 등장합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 2:11)

본문을 보면 모세 시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성인이 된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되었을 나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때 ‘자기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오히려 이집트인을 ‘어떤 애굽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 형제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모세는 이집트인으로 자랐지만, 이스라엘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집트인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노예처럼 매질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자신의 노선을 분명히 정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봅시다. 이집트인인 자신이, 동족을 배신하고 이스라엘 형제들을 구한 ‘살인’을 한 다음에, 모세가 얼마나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었겠습니까? 자신이 노선을 분명히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잘한 일일까?’ 하는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너무나 황망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두려움의 시간이 지나고 다음날 다시 나가보니, 이번에는 같은 장소에 이스라엘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싸움이 격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스라엘인 한 사람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에 잘잘못이 분명히 정해져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출 2:13 下)

모세의 입장에서는 이집트인의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이스라엘인이 왜 서로를 해할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 질문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모세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파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4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출 2:14)

이스라엘 사람은 차가운 눈으로 이렇게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네가 누군데!”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집트인이 아닙니다. 같은 형제라 믿었던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인들은 모세를 배신합니다. 15절에는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라고 쓰여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결국, 이 사건의 배후와 당시의 상황을 바로에게까지 일러바쳤던 것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스라엘 사람의 편을 들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은 그를 배신했습니다. 결국 배신을 당한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바로를 피해 도망을 갔습니다. 이집트와 멀리 떨어진 황무지 미디안으로 말입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우물가에 앉아서 기진맥진해 있는 모세에게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이 마침 다가왔습니다. 목자들과 실랑이를 하는 딸들을 도와, 모세는 양 떼들에게 물을 먹이게 하였습니다. 딸들은 감사의 의미로 모세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왜 이렇게 일찍 왔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하는 딸들의 진술이 나옵니다. 참 중요합니다. 19절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떼에게 먹였나이다” (출 2: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이 언급은 당시의 모세의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유모로 고용되었던 사람은 사실 생모였으며, 생모가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늘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미디안 사람은 모세를 “한 애굽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외형은 ‘애굽’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애굽 사람이 하고 있는 머리 스타일과, 화장, 그리고 옷을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입니까?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모세의 자아 정체감의 모순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인데 애굽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디안 사람하고 결혼하여 미디안 사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21절에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가 자신의 딸 십보라를 주어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세는 미디안에서 자신의 살아온 시간의 똑같은 연수인 40년을 미디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40년, 미디안에서 40년입니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22절에 보면, 태어난 첫째 아들을 ‘게르솜’이라고 짓습니다. 그 뜻은 하반절에 나옵니다.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나그네’라는 단어가 주는 쓸쓸함이 느껴지십니까? 유명한 설교자인 무디 목사님은 이 시절의 모세를 ‘Nobody’ 즉,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당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도, 이스라엘 사람도, 미디안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도무지 누구인지 모르는 그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입니다. 하나님은 정체성의 혼돈 속에 사는 이런 ‘Nobody’를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신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 3:4)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나란 사람 앞에, ‘아무것도 아닌 나란 사람’ 앞에 하나님이 오셔서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충분치 않다고 모세는 느꼈던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3장 11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던 모세가 하나님께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 질문은 바로 이집트를 떠나기 전 이스라엘 사람이 모세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네가 누구 관대!”했던 그 질문을 모세가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 미디안에서 40년을 사는 동안, 아직도 모세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그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직접 물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출 3:12 上)

대답이 조금 이상합니다. “그래, 모세! 너는 누구다!”이렇게 말씀하셔야 되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저 너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을 해주십니다. 이것이 모세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Nobody’인 모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 이것이 바로 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야 똑똑한 모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1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3)

이 질문이 얼마나 놀라운 질문인지를 집중 조명해서 봐야 합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아무리 되뇌어봤자, 결국 돌아오는 대답은 ‘Nobody’,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정체성을 되뇌어보고, 또 물어보고, 답을 찾아봐도 결국에는 모세와 같은 대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거의 80년이 지나서야, 이를 눈치 챈 모세는 이제 제대로 된 질문을 합니다.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묻습니다. 그제야 하나님은 바르게 대답해 주십니다. 똑바로,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대답하십니다. 14절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체성, ‘스스로 있는 자’ 곧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정체성이 모세의 심장을 내리꽂았습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신뢰가 있을 때, 더불어 나의 정체성 또한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라는 너무나도 명확한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자’와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을수록 나의 정체성 또한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확신과 나의 담대함은 ‘내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불안하고, 나는 나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온전하시며, 단단하십니다. 그런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기에 더불어 나는 온전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에게 희망이 생깁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고 싶으십니까? 건강한 자존감을 소유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모세처럼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라볼 때,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내가 불안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두려울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모세는 끊임없이 이 질문을 했던 사람입니다. 바로를 상대로, 이스라엘을 노예에서 해방하라 요구했던 사람이자, 열 재앙을 견디며 수없이 변덕을 부렸던 상황을 끝까지 밀고 나갔고, 더불어 이집트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았고, 이스라엘인들을 광야 여정으로 인도했으며, 그 광야에서 수많은 죄악과 고통을 겪어낸 사람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이 아닌, 하나님의 정체성에 기대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모세가 뭔가 큰 인물이었기에 그 험난한 여정을 성공적으로 견뎌낸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모세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기댔기에 그것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스스로를 온전히 의지했던 인물입니다. 우리가 왜 흔들리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나약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정체성에 기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묻지 않고,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늘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의 정체성에 자신을 기댄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능력과 은혜를 받았는지 나옵니다. 신명기 34장 10-12절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신 34:10-12)

여러분, 이 세상은 모두들 ‘자기 확신’을 가지라고, ‘자기 능력’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면서 성공하고 싶다면 성공할 수 있음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스스로’로부터 가치를 얻고, 믿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그것이 정체성이자 자존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한껏 올려서 자신감 있게 이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반짝이고 싶고, 찌질하 지 않게, 스스로 자신감이 넘쳐서 멋져 보이고 싶고, 때로는 있어 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나의 정체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나의 확신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옵니다. 내가 스스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가치를 발견할 때, 비로소 나 또한 가치 있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나다”라는 확실한 답을 듣고, 그 정체성에 기대어 이 ‘아무것도 아닌 자’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아무것도 아닌 자’인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강주혜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졸업
숭실대학교 기독대학원 상담학과(Th. M.)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종교교육학과(M. Ed.) 졸업
(現) 안산동산고등학교 교목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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