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3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84-295

*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1-4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이 온유하다고 할 때 ‘온유하다’라는 말은 ‘크레스토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글에서 어느 한 단어로 콕 집어서 설명을 하기가 참 어려운 단어가 온유라고 하는 ‘크레스토스’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할 때 이 온유를 ‘Love is kind’라고 합니다. ‘사랑은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로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한글 단어 하나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여러 가지 책들에서 공통된 ‘크레스토스’의 뜻을 살펴봐야 합니다.

첫째로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하는데 그 사랑이 대단히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신학자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이 온유를 ‘쓸모 있게 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라는 단어와 다른 뜻입니다. 내가 유용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에게 쓸모 있는 인물이 된다’라는 것이 온유의 뜻입니다. 내가 남편에게 쓸모 있는 아내가 되고 내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고 내가 학생들에게 좋은 쓸모 있는 선생님이 되고 내가 이웃에게 정말 좋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이 온유입니다.

세 번째는 ‘남에게 상대방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친절과 선을 베푸는 것’이 온유입니다. 온유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내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수준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갚아, 내가 상대방에게 유익을 끼치고 선과 친절을 베푸는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서로 네 가지의 파당을 지어서 나름대로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매일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타적이고, 텃새를 부리고, 남을 우롱하고 복수하는 그런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그냥 그렇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나 자기에게 맞지 않고 자기의 분파가 아니라도 친절을 베풀고 선을 베푸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선이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을 보고 지적하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비난하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감싸 줄 수 있는 여유와 상대방의 아픔에 동참하고, 내가 어떻게 저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온유한 모습입니다.

첫째로, 온유한 사랑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참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 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까지 사랑하셨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 오늘 이렇게 극심한 고통인 처절한 십자가에 못 박는 저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라는 것으로 온유한 사랑의 극치를 말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니지만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과 똑같이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 때에, 돌에 맞아 순교하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의 자리에서 자기를 돌로 치는 살인자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님 저들의 하는 일을 모릅니다.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세요.”

하나님의 온유하심에 예수님이라는 가장 큰 혜택을 누린 것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정말 십자가의 사랑을 내가 느끼고 그분의 온유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이고 확신하며 여러분 속에 온유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꺾을 힘이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꺾지 않으십니다. 불어 끄실 수 있지만 끄지 않으시는 분, 조용히 기다리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기다리고, 참고, 또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모욕과 경멸을 받으실 때도 분노하고 미워하거나 화내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만 보면 ‘나사렛 촌놈’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우리가 부르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말이 ‘어디 출신 누구’라는 말이 아닙니다. ‘굉장히 비하하는 뜻’입니다. 심지어 ‘촌놈’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온유가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부드럽고 따뜻하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반대로 할 때가 많습니다. 불의와 죄악, 잘못된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목을 내어놓고라도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정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이나 다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장사하여 이득을 취하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물건을 팔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리자 그때에 주님께서 채찍을 드시고 그들을 쫓아내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불의 앞에 정의를 행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다 잘못된 불의와 편법으로 갈 때 손해를 볼지라도 정도와 정의 쪽에 서야 합니다. 진리 편에 서야 합니다.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서 이해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온유한 사랑의 표본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 온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가 어렵지만 내 뜻대로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따랐습니다. 주님은 항상 참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두 번째로 온유한 사랑을 우리는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다섯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 목사님의 『산상설교 연구』라는 조금 어려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온유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온유란 본성의 타고난 선물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입니다. 온유한 성품이나 사랑이 타고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과거의 믿기 전의 막말이나 거친 기질, 잘못된 습성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진짜 성령을 받은 것인가 의심해야 한다고 쓰여있습니다. 다시 말해 온유는 타고날 때부터 따뜻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령이 내 속에 찾아올 때 바뀌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산물로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확실히 바뀌어야 합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기질은 타고나더라도,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났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기질, 삶의 태도도 바뀌게 됩니다.

책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온유는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사람으로서 권력이 있든지 없든지 늘 유순하여 남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춰내지 않는 화평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온유는 돌풍이 심하다가 잠잠해진 상태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가 훈련과 연단으로 잘 길들여진 것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길들여서 바꾸고 또 바꾸는 것입니다. 옛날의 혈기가 그대로 있고, 말하는 것이 그대로여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음지에 있다가 은혜받아서 목회자, 장로가 된 분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모습이든 간에 예수 믿으면 바뀌어야 합니다. 저도 만약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갈 때 까지 더 바뀌어야 합니다.

구약의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고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더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굉장한 평가입니다. 원래 모세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기준에 안 맞으면 그냥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광야에서 연단을 받고 진짜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평가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다’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는 온유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를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온유한 사랑은 절대 조급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7장 9절을 보면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기다릴 줄 압니다. 온유는 인내와 기다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갚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그 지글러(Zig Ziglar)가 쓴 『희망을 쏘다』라는 책을 보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남 아프리카에는 바벰바라는 부족이 있는데 그 마을에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동네 사람들이 중간에 세우고 모욕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었던 사람부터 나와서 진심 어린 마음으로 울면서 그 사람을 안아주며 격려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안아주고 나면 죄를 지어 피해를 주었던 사람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벰바족은 거의 사건, 사고가 없는 동네라고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미개한 바벰바족보다 못합니다. 다 해야 하고, 갚아줘야 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성격이 나옵니다. 조급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절대 조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온유한 사람은 삶에서 절대로 악의를 품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악의는 마귀의 모습입니다. 악의는 마음속으로의 살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을 보시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이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악의를 품는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살인하는 것과 똑같다고 하십니다. 겉으로는 복수를 안 하지만 마음속에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하여 “저놈 좀 안 됐으면 좋겠어.”, “저놈 죽어 버리면 좋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살인죄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죄는 살인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악의를 품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듣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악의를 품으면서 하나님 앞에 수요일, 금요일, 주일, 시간 시간마다 나와서 매일매일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악의를 품은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세 번째로 온유한 사랑은 절대로 복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대합니다. 로마서 12장 19-20절을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에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다음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속으로 그런 분이 있을 겁니다. “목사님 그것만은 안돼요. 다른 놈은 다 되어도 저놈만은 용서 못해요!” 그래도 성경은 보통 전제를 하나 답니다. 원수라는 단어입니다. “너에게 피해를 입히고, 너에게 상처를 주고, 너를 힘들게 하는 그 원수가 배고프거든 먹여라. 목이 마르다고 하면 마시게 하라. 원수 갚는 것은 너의 일이 아니야. 내가 한다.” 너는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원수에게 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 보자 하는 마음도 문제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 온유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 말씀에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네 번째로 온유한 사랑은 자신의 고집을 꺾는 것입니다.

라준석 목사의 『행복한 누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보면 ‘온유’를 ‘고집 꺾기’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고, 믿음 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고집하면서 지키고 수호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이것이 ‘죽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고집을 꺾을 수 있어야 합니다. ‘a냐 b냐’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고, 상대방이 맞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주장이 더 맞을 수 있고, 덜 맞을 수는 있지만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닙니다.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a냐 b냐의 사소한 문제로 목숨 걸고 자기 뜻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기주장을 꺾고, 포기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회의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모임에는 반드시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모든 것에 전문가입니다. 자기주장이 무조건 옳다고 소리치며 따라오라고 합니다.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속상해하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설사 그 주장이 분명히 옳다고 하여도, 그런 논쟁에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자기를 꺾는 것이 필요합니다.

『행복한 누림』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자기를 꺾는 사람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은 행복할 것 같지만 참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꺾는 자가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며 누가 말해도 듣지 않고 매사에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심각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누림』이라는 책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분노해서 끝까지 자기주장으로 남을 이기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독한 마음을 품고, 말도 하지 않고,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이 더 나쁘다.’

대부분 사람이 그렇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뭔가 불만 있다는 것을 표출하고 싶어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아내와 남편들은 불만이 있더라도 대화로 풀어 가시기를 원합니다. 분노할 것이 있더라도 참으시길 원합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우리는 고집 꺾기를 항상 연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대단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땅을 다 좋아합니다. 땅을 차지하기를 원합니다.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언뜻 보아서는 맞지 않는 말 같습니다. 저돌적이고 비전이 있 어,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꺾는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자기를 꺾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온유하여 자신을 꺾는 일은 결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기는 길입니다. 스스로를 꺾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뛰어나게 하시며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결코 악한 말을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말이 문제입니다. 『쉐마 주제별 사전』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온유한 성도의 입에서는 시내가 흐르듯 시원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말과 사랑의 말이 많이 흘러나와야 한다. 녹이 든 악담은 마귀가 기뻐한다.’ 나쁜 말을 많이 하고 듣는 것은 마귀가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마귀가 춤을 출 것입니다. 성경은 악한 말을 하는 자에게 엄청난 심판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딛 3:2)

우리는 모든 일에 온유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중에 가장 빨리 드러나는 것이 말입니다. 말 한마디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위로나 힘을 얻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사소한 전화 예절도 철저히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항상 주고받는 전화이지만 그것도 예수 믿는 사람답게 상냥하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 받아야 합니다. “저는 원래 무뚝뚝해서 상냥할 수 없습니다”라고 툭툭 치는 말투는 별거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따뜻하고 상냥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묻어 나와야 합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내게 손해를 끼치고 상처 입히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모습입니다. 그 첫 단계는 말로 부터 시작을 합니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사랑한다고 먼저 말하는 것은 유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길까요? 한 번뿐인 인생을 사랑하며 살고, 사랑한다 말하고 살아도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내 체면, 내 이기심, 내 상처만을 따지다가 천국 가시겠습니까? 우리가 바뀌면 우리 가정이 바뀝니다. 우리가 바뀌면 우리 교회가 바뀝니다. 우리가 바뀌면 우리 이웃이 바뀝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은 속된 세상의 길들이 아닌, 하나님 기뻐하시는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정말 말로도, 행동으로도 온유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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