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2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71-283

*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1-4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겨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흔히 겨울은 춥고, 배고프고, 힘든 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그런 계절일수록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단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화롯불, 아궁이, 구들목, 온돌, 난로, 군불, 모닥불, 목도리, 내복, 털신, 벙어리 장갑, 외투, 털모자, 솜이불, 호주머니, 양지, 등불, 가족 등 모든 내용은 한결같이 따뜻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남을 따뜻하게 하는 단어들입니다.

정채봉 시인이 쓴 <언제나 그대가 그립습니다>라는 글에 보면 겨울의 따뜻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린 대나무 잎에 눈이 쌓였습니다. 그러나 쌓인 눈이 곧 녹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나무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땅으로부터 뽑아 올린 따뜻한 사랑의 기운을 푸른 두 잎이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중략)…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면 모든 것이 녹아내립니다.”

여린 대나무 잎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듯이 따뜻한 사랑은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을 녹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저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행동할까?”라고 말을 하며 불평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어떤 일과 상황 속에서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즉 ‘Nothing’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가장 첫 번째 맺어야 할 열매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섬기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체이시며 참으로 마음이 따뜻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분을 따라가고, 그분의 사랑이 마음에 믿어진다면 그 사랑의 따뜻함이 전달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따뜻함을 자신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 따뜻한 사랑이 없다면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냥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하면 더불어 따뜻해집니다. 늘 비판하는 사람과 가까이하면 자기도 모르게 비판하는 사람이 됩니다. 늘 원망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자기도 모르게 원망하는 부류에 속해 버립니다. 하지만 한결같이 따뜻한 사람 곁에 있으면 그 따뜻한 사랑의 불이 사람의 마음에 전달이 되고, 그 사람도 따뜻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 사랑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모든 것을 남을 향해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따뜻한 사랑을 하고 있고 내가 따뜻한 사람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본문 4-7절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할 때 해야 할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속성, 사랑의 덕목 가운데 가장 첫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사랑장을 읽어 보면 마치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7가지 빛이 나듯이 사랑을 프리즘에 통과를 시키면 본문의 15가지의 빛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빛 가운데 첫 번째의 사랑의 덕목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사랑의 덕목 중에서 오래 참는 것을 첫 번째로 두었겠습니까? 답은 자명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가 오래 참는 사랑이 없는, 참지 못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표현하기도 힘들고, 정의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진짜 사랑을 한다면 정말 어렵고 힘든 것이 바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의 헬라어는 ‘헤 아가페 마크로 뒤메이’라고 합니다. 아가페는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진짜 아가페 사랑은 ‘마크로 뒤메이’, ‘참는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 보면 NIV에는 간단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Love is patient’, 사랑은 ‘인내’라는 것입니다. KJV에는 ‘Charity suffereth long’, 사랑은 ‘오랫동안 그 고통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원문에서 말하는 ‘마크로 뒤메이’의 사랑은 그 의미가 네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첫 번째가 ‘의외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인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답답하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해를 당할지라도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오래 참음입니다. 두 번째는 야고보 1장 3절에서 “이는 너희 믿

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라고 말씀한 것처럼 자기의 감정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을 스스로 억제하는 그런 ‘인내’를 뜻합니다. 세 번째는 디모데후서 4장 2절의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었는데 내가 보복하고 복수할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복수하지 않고 자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래 참음은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될 때까지 기다려주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사랑할 때까지 사랑하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오래 참는 사랑은 우리 하나님의 대표적인 사랑의 속성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제일 큰 특징은 인내, 오래 참음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앉아 있을 수도 없습니다. 죄라는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우리에게 형벌의 칼날로 심판하신다면 어느 누구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셨기 때 문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사랑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 탕자의 비유를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아버지의 피 땀 흘린 재산을 둘째 아들이 받아서 흥청망청 다 탕진합니다. 나중에는 돼지를 치는 남의 집 품꾼으로 전락합니다. 돼지의 쥐엄 열매를 먹는 비참한 상황이 됩니다. 끝내 못 참고 돌아온 자식을 보며 아버지는 아무리 자식이지만 보기가 싫을 것입니다. 물론 자식이니까 부모가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섭섭하고, 속상하고, 안타깝고, 미운 마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배신하고 온갖 타락의 길로 갔던 그 아들을 한결같이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의 거리가 멀지만 더 감동적인 것은 아버지는 아들이 언제 오나 가만히 목 빠지게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 같고 더 기다리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그다음의 관점이 다릅니다. “측은히 여겨”라는 말은 안타깝고 측은히 여긴다는 말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원문의 의미는 첫째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한다’라는 뜻입니다. 많이 사랑하다 보니 상대방이 참 불쌍해 보이고 측은히 여기는 것입니다. 동양철학에서의 ‘측은지심’의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측은지심은 자기가 조금 높은 위치에서 안 돼 보이고, 돕고 싶고,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아버지가 기다리면서 측은히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합니다. “목을 안고”가 원문에는 “입을 맞추고, 또 맞추고” 입니다. 고운 옷을 입히고,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는 증표로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푸는 것은 한국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국의 문화는 탕자를 멸시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합니다. 체면, 부 끄러움도 없이 사랑합니다. 기다리고 사랑하는 것 이외는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남들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돌아온 것이 정말 기쁜 것입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합니다. 나쁜 짓을 한 아들의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그저 돌아왔다는 것에 잔치를 베풀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참고, 참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인내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880년에 죽은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철학자이자 웅변가였는데 사람들만 모이면 하나님을 욕합니다. 하나님은 없고 자신의 위안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하나님, 신이 없다고 강연을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한번은 탁상시계를 강단에 놓았는데 거기서 벨을 눌렀습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부터 5분 동안 하나님을 욕하겠습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할 것인데 오늘 내기합시다. 진짜 하나님이 이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있으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를 저주하고 죽여 버리면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후에 버튼을 누르고 5분 동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습니다. 모욕된 말을 합니다. 하지만 5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더욱 의기양양, 교만해집니다. 그때 데오드로 파크라는 신실한 분이 “참 당신은 가장 불쌍한 분입니다. 당신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오래오래 참으심을 자기가 정해놓은 5분으로 다 소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 정도로 화내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합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이 심판하고 징계한다면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참으시는 것이지,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공감했다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 전에도 하나님은 120년이나 사람들이 조롱하는데도 기다리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중에도 6번이나 참아달라고 기도할 때도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심판을 결정해 놓고도 참으셨습니다. 죄로 관영한 아모리 족속을 벌하시기까지 430년이 걸렸습니다. 니느웨 성은 하나님이 멸망시키려고 결정하고도 하나님의 종을 보내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우리가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심판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해서 구원 얻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래 참는다는 것은 오래 고통을 견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악행과 손해가 있을지라도 끝까지 그 고통을 참아라.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가슴 야릇한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은 정말 저희들이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내해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끝까지 고통을 오래 참는 것에 대해서 4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해롭게 하고, 자기에게 악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복수심을 가지지 않고 그 악과 손해를 참으라고 합니다. 말과 마음의 복수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받았던 손해를 지속적으로, 그것도 사랑으로 참아내야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그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4가지 분파로 나뉘어 싸웠다는 것을 여 러분도 아시고 계십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라 하면서 교회가 구제를 하는 일에 있어서, 누가 구제를 많이 했다고 하면 이쪽에서 불평을 하면서 난리를 하고 다음 번에는 자기들이 받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고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계파를 위해서 온갖 싸움과 보복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참아내라고 말씀합니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으십시오. “복수심이 있지만 참아라”가 아니라 “사랑으로 참아라”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마음의 평정과 생각의 정돈된 질서를 흩트리지 않고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감정이 올랐다 내렸다 하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참는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변명할 기회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이익과 감정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참으라고 합니다. 변명할 기회를 얻어서 어떻게든 이 사태를 증명하기보다는 내 이익, 내 감정을 희생해 가면서 참는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해야 합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7)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당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며 사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랑의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입니다. 환경에 대해서도 오래 견뎌야 합니다. 오래오래 고통을 견디는 것, 그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0절에서는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말씀합니다. 오래 참음은 성숙한 사람의 표지입니다.

라퐁텐(Jean de La Fontaine)이란 분은 그의 글에서 ‘오래 참는 것은 인생의 모든 문을 연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잠잠히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확신 속에 고통스럽지만 참으시기 바랍니다. 고통을 오래오래 견디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쉽게 결론을 내리려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억울한 것 같고, 변명하고 싶고, 속상하고 답답하여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어느 책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런 순간에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공사 중이십니다.’ 공사는 끝나기 전에는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어렵고 힘드시더라도 견뎌야 합니다. 그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오래 참는 사람은 변덕스러운 사랑의 모습을 버리라고 하는 뜻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2-3)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현재의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은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기준과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면 사랑하다가도 순식간에 돌아서 버립니다.

가정 상담사 딘 마틴(Dean Martin)이라고 하는 분이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설문의 질문은 ‘당신은 현재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한 년 수에 따라 각각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결과는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결혼 1년 차는 98%가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고 응답했습니다. 2년 차는 갑자기 크게 줄었습니다. 56%가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는 응답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또 10년 차는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퍼센트가 6%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는 결혼 20년 차에서 나타났습니다. 20년 차 이상에게 좋은 배우자를 만났냐는 질문에 96%가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부부가 상대를 서로 이해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적어도 20년 이상이 걸린다’라는 것이었습니다. 20년쯤 되어야 부부 생활에 감사가 있고, 철이 든다는 것입니다. 20년이 되어야 소중한 줄 알고 서로 맞추어 간다는 것입니다. 20년을 참아 보고 30년을 참아 봐야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과 그런 사랑을 해야 할까요? 일단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남편, 가족, 성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못 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도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가능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을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절대로 오래 참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에게 변덕은 죄입니다. 사랑이 변하고 처음과 다르다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변덕스러웠던 적이 없습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 박민규 씨가 인디언들에 대해 소개를 합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꼭 내려서 자기가 달려온 쪽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타고 간다고 합니다. ‘길을 잘못 왔나?’ 하고 다시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는 질문에 인디언들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다시 바라봅니다.” 이것이 또 무슨 말인지 물었습니다. “육신과 영혼이 별개로 구별되어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육신은 우리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우리를 통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는 인생의 방향이 맞느냐 틀리냐는 내 영혼의 방향이 맞느냐 틀리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항상 함께 살아가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한 번쯤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껍데기의 신앙인지 아니면 진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실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지를 말입니다. 내 인생을 한번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이 따뜻한 사랑이 우리를 녹였듯이 우리도 오래 참는 사랑으로 내 가정을 녹이고, 이웃을 녹이고, 교회를 녹이고, 세상을 녹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렵지만 오래 참는 사랑으로, 남은 인생 그렇게 살고, 그렇게 사랑하며 달려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