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1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60-271

*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선데이 스쿨 타임스』라고 하는 주일학교 잡지가 있습니다. 그 책에 소개된 ‘미스 톰슨’이라고 하는 여자 선생님의 일화입니다. ‘미스 톰슨’은 중학교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에서도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첫날부터 결석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테디 스텔러드’라고 하는 아이였는데 첫날뿐 아니라 계속해서 결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가 지나고, 한 달이 되어도 학교에 오지 않고 계속 무단결석을 해서, 학교에서는 이 아이를 퇴학시키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미스 톰슨’은 그 아이가 걱정되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선생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톰슨! 네가 찾아가 봐. 분명 그 아이에게 사연이 있을 거야.’ 분명 성령이 톰슨의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생활 기록부에 있는 아이의 집 주소를 찾아갔지만 이미 이사를 한 뒤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소문을 하여 이사를 간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 가정은 엉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정을 포기하여 가출하였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 대면한 아이의 모습도 어딘가 아픈지 방 한쪽 구석에서 쪼그려 자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깨웠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이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테디야! 선생님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단다. 선생님은 네가 그 소원을 꼭 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테디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소원이 뭐예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테디 네가 학교에 다시 출석하는 것이 소원이야.”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에 “선생님 나 여기 왔어요”라고 이야기를 하면선생님은 참 행복할 것 같구나!”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테디는 창백한 얼굴로 학교에 등교했습니다. 톰슨 선생님은 기쁜 마음으로 출석을 불렀습니다. 테디 차례가 되어서 “테디 스텔러드”라고 불렀습니다. 테디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선생님의 나 여기 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톰슨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톰슨은 그렇게 테디를 사랑스럽게 보살피고, 아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또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테디는 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톰슨 선생님이 또 아이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집에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밖에 없었습니다. 테디의 안부를 묻자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아이에게는 중병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의 병명은 뇌암이었습니다. 그것도 말기였고,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매일 같이 아이에게 찾아갔습니다. 정말 사랑으로 안아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시 학교에 올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테디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도 제 병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아요. 아마 저는 다시 학교에 갈 수 없을 거예요.” 상실감과 실망에 가득 찬 아이의 대답에 선생님은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아이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 다시 학교에 올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러나 너는 천국에 갈 수 있어!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야. 천국 가면 예수님께서 너의 이름을 부른단다. 선생님의 소원은 예수님께서 너의 이름을 부르실 때, “예수님 나 여기 왔어요”라고 대답하면 참 좋겠어.”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께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저는 예수님을 몰라요.” 그때부터 톰슨 선생님은 퇴근 후 매일 아이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펼쳐 놓고, 인간의 죄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의 비밀들을 설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모든 죄 사함 받는다는 것과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구체적인 천국 복음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아이는 선생님의 정성 어린 가르침에 진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톰슨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테디 스텔러드’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급하게 병원으로 뛰어갔고, 이미 아이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허공을 향하여 손을 휘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아이의 얼굴이 천사같이 환해지더니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나 여기 왔어요.” 그 한마디를 내던지고 아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선데이 스쿨 타임스』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주어진 ‘인생의 모든 삶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레미 킹슬리(Jeremy Kingsley)는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낮은 마음』이라는 책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는 단순히 따뜻하고, 현 기증 나고, 설레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에 대한 반응에 기초된 행동이다’라고 말합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란 그냥 막연하게 가슴이 설레고, 누구를 보고 싶은 남녀 간에 그런 야릇한 감정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 아래 아무런 조건 없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아가페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받은 사랑에 대해서 반응적으로 나오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셨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셨던 그 사랑을 내가 받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 용서함을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참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참아 주고, 예수님께서 실패할 여지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주신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큰 속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덕목이요, 가장 중요한 실천과제 중 하나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냐? 그리스도인이 아니냐?’에 대한 구별에 대해서 칼빈(John Calvin)은 ‘기쁨과 감사’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사랑하며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로 불신자와 그리스도인을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 삶에서 사랑이 없고, 갈등과 반목, 시기, 질투, 원망, 이런 것들만 가득 사로잡혔다면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소용이 없고, 사랑은 위대한 것인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사랑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Nothing’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도 ‘Nothing’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가장 먼저 왜 사도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하고 그렇게도 사랑을 강조했을까 하는 배경을 보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선교로 개척한 교회입니다. 당시에 코린티우스는 어마어마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와 그리스, 아시아를 연결하는 세계무역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도시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는데, 문제는 바울이 떠나가고 2대 담임목사인 아볼로가 들어오고 난 후부터 교인들이 나눠지기 시작합니다.

하나가 되고 아름답게 교회 안에서 사랑으로 충만했던 초대교회 모습이 사라지면서 교회에 분파가 생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원로목사파, 담임목사파가 나눠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갈려졌던 이유는 큰 도시 코린티우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뜨겁지만 그러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부 자기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렇듯 고린도 안에서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파라고 주장하는 네 개의 분파가 매일 싸웁니다. 저마다 자기주장만 하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비판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 중에 자신이 받은 은사만이 최고라고 주장하기에 교회가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엄청난 자원이 있으면서도 본질인 복음전파와 사랑하며 사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매일 믿음 생활하면서도 싸우고 갈등하고 반목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교인들은 각자 귀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방언도 받고, 예언도 하고, 영분별도 하고, 게다가 가르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믿음의 은사, 말씀의 은사 등 모든 은사를 다 받았는데도 서로 다툼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그들 속에 사랑의 은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1.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구절은 본문에서 3번이나 나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우리에게도 얻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1)

이 말씀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기둥이 높이 세워진 건물들은 신전이었습니다. 당시의 이방 신전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하면, 신이 사람을 다스리고 신이 사람을 일깨워야 하는데 신전 안에 들어가면 우리의 꽹과리처럼 생긴 구리와 같은 징 비슷한 것으로 이방 사제가 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잠자는 귀신들을 깨웁니다. 또 그런 신을 불러오는 의식을 할 때 “따또 무부!” 하며 무의미한 소리를 내는 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방언과”라며 시작되는 이 내용은 사실은 자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이 얘기하기를 내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심지어는 삼층천을 봤고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방 사제가 귀신들을 깨운다고 내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2)

바울은 지금 엄청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입니다. 영적 파워입니다.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안다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그것도 그냥 믿음이 아니라 모든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신약성경 복음서에 나오는 표현을 말합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을 때 이 산이 들려서 저리로 옮겨질 것이라는 믿음인데, 어마어마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에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정생활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구제라는 것은 꼭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에는 남을 위해 하는 희생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여 구제라고 했습니다. 내가 남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하고 심지어 내가 순교의 제물이 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99가 되더라도 1인 사랑이 없으면 99라 해도 0입니다. 내가 다른 것이 다 있다 하더라도 그중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영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본문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한글에서의 사랑의 말의 뜻은 한 가지입니다만 헬라어의 사랑은 4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보통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원래의 의미는 상대방과 하나 되기 위한 인간의 감각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꼭 성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 여자가 좋아하면 같이 있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손을 붙잡고 싶고, 감각적으로 함께하고 싶은 사랑이 에로스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스토르게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혈육 간의 사랑입니다. 주로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사랑하는 극진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스토르게의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필리아의 사랑입니다. 친구 사이의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본문에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없으면 너희들의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니라’라고 할 때 말하는 사랑은

네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그 대상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차별 없는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이 차별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두 번째 아가페 사랑은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이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해 어떤 책을 보니까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변치 않는 사랑인데 권태를 모르는 사랑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올해나 내년이나 사람은 쉽게 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과 같은 사랑도 보통 사람은 다 식거나 변하게 됩니다. 그런 사랑을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결혼생활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날마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십 명의 결혼 주례를 하고 인사를 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젊은 청년 남녀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정말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다면 결혼한 지금보다 5년 후가 더 행복해야 하고, 10년 뒤보다 20년 뒤가 더 행복해야 한다”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하다면 모두가 회개해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담이 없이 펼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의 한계를 넘어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기준을 세워 놓고 사랑합니다. 너는 이렇게 해 줘야 하고 나는 이 정도만큼은 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처럼 한계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한계를 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3. 사랑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다음에 “아무 유익이 없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반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 3절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도 유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라는 말씀의 반대는 “내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익을 전제로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도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땅에 사랑하며 살 때 내가 깨닫지도 못하고 내가 기대하지도 못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의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서 살 때 내가 마음껏 사랑하며 살 때 어떤 유익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유익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의 고차원적인 이기주의’라는 말을 써 봅니다. 이기주의라는 말은 좋지 않지만 ‘고차원적인 이기주의’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음껏 아가페 사랑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상급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 고차원적인 이기주의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기독교인의 모든 행동의 원리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과 봉사가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이야기 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남은 인생, 한 번뿐인 인생을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 교회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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