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예배 3주차

* 설교자 :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 페이지 : 236-247

* 본문

창세기 12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우리가 받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가 ‘구원받은 은혜’입니다. 죄 중에 태어나 하나님 없이 살다가 죽어서 하나님 없는 영원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기의 아들까지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려주신 은혜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바벨탑을 쌓자, 하나님께서는 그 탑을 무너뜨리시고 사람들을 온 세상 지면으로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은 민족으로 나뉘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태어나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 님을 모르는 집안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 데라는 우상 신상을 만들어 팔던 우상 비즈니스맨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살았을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런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불러내실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페르시아만에 위치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무명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러고는 그의 후손에서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입니다. 왜 부르셨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를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도 왜 구원하셨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선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이유가 있으면 공로이고, 이유가 없으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자기의 정든 고향을 떠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일까요?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무시무시한 단어가 나옵니다. ‘보여줄 땅’입니다.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단어는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입니다. 어디로 방향을 잡고 가야할지도 모르기에 준비도 할 수 없고, 그냥 하루하루 보여주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제일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다른 표현을 썼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 11:8)

보여줄 땅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야 하는 인생이 얼마나 두렵고 처량한 인생입니까? 보여줄 땅으로 가는 길에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 없고, 어느 나라의 땅을 지나가야 할지도 모른 채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은 길을 나선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보내시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그 머나먼 길을 나서시면서 최고의 무기를 안겨주십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확실한 보호장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먼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을 안전하게 보여줄 땅에 도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일까요? 바로 3절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3)

보통 우리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할 때 쉽게 우리 머릿속으로 그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사람들에 나눠주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누군가에게 복을 나눠주면 그 사람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그 사람이 저주를 받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를 축복하거나 저주를 하지 않고 그냥 갈 길을 갑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사람이 저주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창 12:3)

아브라함은 가만히 있고,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먼 길 떠나가는 아브라함에게 이것보다 멋진 보호장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앞으로 네가 어느 마을로 들어가도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네가 노상에서 어떤 무서운 사람들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마라. 앞으로 누가 너를 만나도 그 사람들이 너에게 복을 빌고 너에게 잘 대해주면 내가 그 사람에게 복을 줄 것이다. 앞으로 누구라도 너를 저주하고 너를 핍박하면 내가 그 저주를 그 사람들의 머리로 되돌아가게 하겠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보여줄 땅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복과 저주의 약속이 이루어진 사례들이 있습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하나님이 바로의 꿈에 나타나셔서 바로를 죽이려고 합니 다. 아브라함을 향한 저주가 바로의 집안에 저주로 임한 것입니다. 깜짝 놀라 회개한 바로가 다음날 아침에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아내를 돌려주고, 많은 육축을 보상금으로 주며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을 축복하자, 어젯밤에 임했던 저주가 사라지고 바로의 집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정확하게 아브라함을 저주했을 때 바로에게 저주가 임했고, 아브라함을 후대했을 때 바로의 집이 회복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을 만났을 때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가 그 사람에게로 돌아갔고, 축복하면 그 빈복이 그 사람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만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살던 우리를 찾아오셨고, 죄에서 불러내어 구원하사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여정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도 받고, 상처도 받지만 믿음을 지켜나가면서 우리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야 합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아브라함이나 천국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이 똑같습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가 이 믿음의 여정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을 축복하면 그 복을 여러분도 받고, 축복한 사람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여러분을 저주하면 그 저주는 여러분에게 임하지 말고, 여러분을 저주한 사람에게 임하여 다시는 여러분을 괴롭히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당연히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그 저주가 여러분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임하지 않는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지시할 땅으로 가야 하는 불안한 아브라함에게 “걱정하지 마라,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너는 걱정하지 말고 갈 길을 가라.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 약속을 내가 반드시 지키겠다”라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의 여정에서 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이 길을 갈 때에, 저 멀리서 두, 세 사람이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저 집사님한테 욕하지 마라. 그 욕을 우리가 다 먹는다. 저 권사님 저주하지 마라, 그 저주가 우리 집으로 고스란히 온다. 저 집사님은 그냥 축복만 해줘라. 그러면 그 복이 우리 집에 그대로 임한다.” 이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원리를 잘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은혜 베푸시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내가 축복하면 그 복을 나도 받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내게 임한다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절대로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 임금을 대적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손해를 입으면서도 기름 부은 자 사울을 계속 축복하고 그를 저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울을 향해 빌어주었던 모든 복이 결국은 다윗의 머리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에게만 적용한 것이 아니라 장소에도 적용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늘 축복했습니다. 그 이유가 시편 122편 6절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시 122:6)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눈에 보이는 곳에 살면 성전이 보일 때마다 복을 빌었고,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살 때는 마음속에 성전을 그리면서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잘 알았던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이역만리로 끌려와 바벨론의 포로가 된 다니엘이 바벨론에 잡혀 와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까? 날마다 성전을 향해서 문을 열어놓고 하루에 세 번씩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축복하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다니엘이 서 있는 그곳에 형통의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라보면서 축복했던 그 성전이 대단한 성전이라서 그리워하고 축복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런 성전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성전을 향해 복을 빌고 기도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성전이 아니라 다니엘에게 약속하신 형통의 길로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 아멘.’

교회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이니 완전할 수야 없겠지만, 교회는 날마다 몸부림치면서 주님 앞에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몸담고 다니는 교회임에도 입에는 ‘이놈의 교회’라는 말을 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말이겠지만, 교회를 향한 저주가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성도가 교회를 향해 가져야 할 자세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을 축복해서 그 사람이 잘되면, 그 복이 여러분에게 흘러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저주해서 그가 저주를 받았다면 그 고통을 옆에 있는 여러분이 함께 짊어지지 않습니까?

나라를 저주해서 나라가 못살게 되면, 가난은 백성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해서 그가 복을 받으면 그 복은 나에게로 자연스럽게 흘러옵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복을 빌어주고 잘되기를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게 내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 한국이 이렇게 세계 최빈국에서 최단시간에 제일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원수가 져서 헤어져도, 헤어질 때 인사가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입니다. 싸우면서도 축복하는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결국에는 이 짧은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축복이 이루어지니 그 사람의 복이 결국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흘러가게 되어 더불어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심하게 욕을 해도 “빌어먹을 놈”입니다. “굶어 죽을 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상대방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빌어먹어서라도 살라고 축복합니다. 이게 우리 한국 사람들이 지금 복 받고 사는 민족성이고 심성입니다. 정말 원수가 집을 찾아와도 쫓아내면서도 소금을 뿌리는 민족입니다. 옛날에는 소금이 돈이었습니다. 돌을 던지지 않고 비싼 소금을 던져주는 민족. 그거 모아서라도 국밥 한 그릇이라도 사 먹으라는 정이 자기도 모르는 정서에 깊이 베인 민족입니다.

여러분, 늘 축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다니면 교회를 축복하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학교를 축복하고, 부모들은 자녀를 축복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빌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돌아갑니다.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에게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3가지 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둘째, 네게 복을 주겠다.

셋째,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겠다.

이 세 가지 복을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하십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한다고요? 은혜입니다. 이 세 가지 약속에서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내가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 그런데 이 구절에 보면 딱 한 번 주어가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인 것이 있습니다. 2절 후반절에 나오는 “너는 복이 될지라”입니다. 이것을 원어로 풀어서 쓰자면 “너는 복이 되어라”입니다. 영어 성경은 “You will be a blessing”이라고 해서,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고 썼는데, 원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어는 명령형으로 “You! Be a blessing. 너는 복이 되어라”입니다.

풀어쓰자면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아! 이제 너는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저주를 받게 할 수도 있고 복을 받게도 할 수 있다. 너를 저주하면 그들이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면 그들이 복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그들이 다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이 되어야 한다. 한 사람도 너를 저주하여 그 저주를 받지 않도록 너는 복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너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너를 택하고 부른 이유이니라.” 3절에 이 하나님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너는 복이 되어라”라는 말을 쉽게 풀어쓰면, “누구든지 너를 보면 좋아서 복을 빌어주고 싶은 삶을 살아라”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이 살아내야 할 사명입니다. 칭찬받는 성도,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십만 명 헌혈운동에 우리 교회가 1번으로 참여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과 언론사로부터 주목을 받고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지금처럼 욕을 많이 먹는 시대에, 나머지 교회들은 힘을 다해 선행하여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칭찬하는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역에 세워진 한 교회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혀를 차고 욕을 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혀를 차고 욕을 하는 그 사람들에게 그 화가 돌아가기 때문에 교회가 지역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지역사회에 칭찬을 받아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교회를 칭찬하면 그 칭찬은 교회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는 그 사람들에게 복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교회 하나가 칭찬받는 교회가 되면 그 주변의 모든 주민이 함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학교에든지, 회사에든지, 어디를 가든지 간에 그곳에서 욕먹는 사람이 아니라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게 사명입니다. 그래야 칭찬하는 모든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너는 어디를 가든지 복이 되어라. 그래야, 내가 모든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다”라고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명령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결혼을 하고 미국을 가서 신혼생활을 하는데, 부부가 되어 사는데 그때는 아이도 없고, 기르는 강아지도 없다 보니 같은 유학생 중 한 명이 기린 인형을 하나 줘서 집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기린이니 꽤 큰 인형이었습니다. 같이 있다 보니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름 하나를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보통 부부의 이름을 섞어서 이름을 짓던 것이 유행일 때라서, 둘의 이름을 합해서 지어보니, ‘복락’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기린 인형을 복락이라고 불렀고, 금요일마다 밥 먹고 성경 공부하러 오던 유학생들은 오면 모두 그 기린 인형에게 허그를 하면서 “복락아 안녕” 하고 인사해서 유명한 인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런 사모함이 생겼습니다. ‘그래, 우리 부부 어디를 가서 목회하던지, 성도들에게 복락이 되자.’

여러분! 어디를 가시든 복락이 되십시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나 복을 나누어주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든지 칭찬과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 빌어준 복을 여러분 평생에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그곳에서 복이 되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을 보면 저주가 나오지 않고 칭찬이 나오게 하여 자연스럽게 복을 빌어주고 싶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로 인해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마다, 그들이 빌어준 복을 그들이 받게 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복의 통로가 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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