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예배 2주차

* 설교자 :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 페이지 : 222-235

* 본문:

창세기 6장 5-8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몇 해 전 목사님들 몇 분과 함께 콜로라도 ‘애스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애스핀’은 스키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꿈의 장소이고 은사시나무, 자작나무가 온 동네를 뒤덮고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은사시나무가 영어로 ‘애스핀’입니다. 그야말로 나무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된 것이죠. 그곳의 풍경 하나를 제 핸드폰으로 찍어보았습니다. 낮에는 성경을 연구하고, 밤에는 이렇게 동네 구경을 다녔습니다. 하루 종일 열띤 성경공부와 토론을 마치고, 밤이 되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깊은 산속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우리 곁으로 소 크기의 사슴 떼가 달리기 시작하는데 일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산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갔습니다. 어디쯤 이르렀을까? 목사님 한 분이 외치듯이 말합니다. “하늘을 한번 보세요.” 그리로 올려다본 하늘은 숨을 멎게 했습니다. 밝게 빛나는 별들 때문이었습니다. ‘애스핀’은 전 세계에서 별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정말 그곳에서 올려다본 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밝고 영롱한 별들이었습니다. 콜로라도의 깊은 어둠이 그 별을 그토록 밝게 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밤이 어두울 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난다는 말을 책에서 배우지 않고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어릴 적 교회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가로등 하나 없는 우리 동네를 비추던 그 별도 그렇게 빛났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노아의 시대입니다. 사랑이 그렇게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전 지구적으로 심판을 감행하셔야 할 정도였으니 그 시대의 밤이 얼마나 칠흑같이 어두웠는지 우리는 가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의 실수나 후회로 봐서는 안 되고 안타까움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한탄’이라는 히브리어는 영어로 ‘to be sorry’로써 ‘유감스럽다’, ‘마음이 불편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근심하셨다’에서 ‘근심’은 ‘마음에 난 상처’를 말합니다. ‘Hurt, Pain’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이를 조금 더 일반적인 용어로 번역을 해보면,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드신 인간들이 행하는 악을 보시면서 마음이 불편함을 넘어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으셨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 왜 큰 마음의 상처를 입으시고 마음이 그토록 불편하셨을까요? 사람이 실수하거나 죄를 지어서인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연약하면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죄를 짓는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은 아닌데 몸이 안 따라줘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잠시 잠깐 유혹에 넘어가서 큰 죄를 범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거나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죄를 짓는 것이 연약함이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면 말은 달라집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실수로 큰 잘못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수인 줄 알았던 그것이 나중에 알고 봤더니 계획적인 것이었다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큰 상처가 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를 보고 이토록 안타까워하시고 마음에 상처가 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뿐임을 보시고” (창 6:5)

노아 시대 사람들의 문제는 항상 죄를 짓는 것뿐 아니라, 그 죄를 계획하여 지었다는 것입니다. 연약해서, 실수로 죄를 지어 죄가 세상에 가득하다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겠지만, 회개는커녕 앞으로도 계속 죄를 지을 계획을 하고 있다면 심판 외에 답이 없는 것입니다. 지은 죄도 회개하지 않았는데, 더 큰 죄를 24시간 동안 밤이나 낮이나 계획하고 있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회개하지 않는 죄는 하나님도 용서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무슨 죄를 지어도,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은 다 용서하시고 받아주시지만 회개하지 않은 채 나를 받아달라고 오는 사람은 용서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은 죄인과 죄를 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죄를 지어도 이해한다고 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이었고, 죄를 짓고도 회개는커녕 더 큰 죄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돌이키지 않는 백성이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죄가 그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심판의 가혹함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회를 충분히 주시는 분이고, 지금도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까 봐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하고는 회개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는 인간이 살면서 짓게 되는 대표적인 죄 21가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26-32)

이렇게 약 21가지의 대표성을 가진 죄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죄는 여러분을 지옥으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21가지 죄보다 가장 큰 죄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32)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그 죄를 옳다고 주장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보면 됩니다, 오늘날 시대를 왜 어둡다고 하는지 아세요?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죄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세상은 더는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다. 사람은 다 원래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게 인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고 사는 것은, 인간이 연약해서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죄를 짓고도 회개는커녕 죄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처럼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말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탄이 회개하지 않아도 되도록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하실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도록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가 그랬습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그날 밤 침상에 누워서 내일은 또 어떤 죄를 지을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죄를 계획하고, 또 죄를 실천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의도적으로 짓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생각이 다 보인 것입니

다. 그들이 오늘 지은 죄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일 지을 죄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들 마음속에 죄를 회개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까지 다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6)

인간의 이런 잔인함을 보신 하나님의 마음의 상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 시대의 죄는 좀 더 심각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못된 사람들 몇 명쯤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문제는 몇 명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11-12절에는 당시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 6:11-12)

그야말로 하나님 눈에 노아의 시대는 온 세상이 어두운 밤이었던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죄가 없는 곳이 없었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는 한 도시가 죄를 지었지만, 노아의 때는 온 세상이 지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가득했기 때문에 세상 전체를 물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는 그야말로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고, 내일의 소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밤이 깊으면 별이 더욱 밝게 빛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에 별처럼 빛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은혜는 이런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떠 있는 별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그중에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심판 아래 놓여도 살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

노아는 이런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 홀로 반짝, 반짝 빛나는 별과 같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매력적인 구절이 8절이 아닐까 합니다. 이 구절에서 은혜라는 단어만큼 매력적인 단어가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도 ‘그러나’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 심판을 받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나’는 모든 사건을 뒤집는 반전의 단어입니다.

내 삶에 아무 소망이 없을지라도 ‘그러나 주께서 은혜를 주시더라.’ 내 눈앞에 아무것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러나 주께서 갈 길을 인도하시더라.’ 내 팔에 아무런 힘이 없을지라도 ‘그러나 주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시더라.’ 내 지식이 너무 짧아 아무것도 알 수 없을지라도 ‘그러나 주께서 내게 지혜를 부어주시더라.’

이것이 ‘그러나’의 은혜입니다. 노아는 지금 온 세상이 심판 아래 놓여있는 순간에 ‘그러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노아는 ‘그러나’의 복과 은혜의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노아에게 임한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가 점점 하나님 없는 어두움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학교들은 벌써 오래전에 어둠에 잠식되었습니다. 기도도 못 합니다. 성경도 못 가지고 갑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도 못 하게 합니다. 심지어 어느 초등학교 때 부활절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라는 요청에 아이 한 명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그렸다가 학교 교장 선생님에 의해서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정신감정을 받게 되는 일도 일어나 해프닝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학교에서 십자가도 사라지고, 성경도, 기도도, 찬송도 모두 사라져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한국이 점점 그 길로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매일 그런 어둠이 짙게 깔린 교실로 보냄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 받아야 할 은혜가 ‘그러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이더라.”

여러분이 시집을 왔는데 시집 전체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집안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 집안의 노아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 집안에 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어둠이었으나,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 한 사람이 그 집에 있으므로 인해 그 집안이 살아나게 될 줄 믿습니다.

노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아의 아내와 세 아들 셈, 함, 야벳과 세 며느리 집안 식구가 다 구원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의 집안이 예수 잘 믿는 여러분으로 인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여러분을 통해서 살아나기를 축원합니다. 어디를 가나, 그곳에 어둠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노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8절에 짧게 기록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구절은 정말 엄청난 구절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인간의 죄가 너무나 크고 전 세계를 덮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멈출 수가 없다 해도, 그 와중에도 은혜를 입고 살아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바지를 붙잡으면 사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가요? 내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마음 그것이 제일 큰 은혜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마음이 화인 맞은 마음이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그 마음이 가장 큰 은혜를 받은 마음입니다. 노아에게는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살 수 있다는 그 마음 하나뿐이었는데, 하늘에서 별처럼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늘 필요하다는 마음이 쏟아지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난 살 수 없다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너무 좋아하십니다. 집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고, 은혜를 베푸실 준비를 해놓고 계시고, 진노하시면서도 용서 준비를 다 끝내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78편 38절에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시 78:38)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노아의 시대를 보시면서, “어 세상이 어두워졌네 에이 심판하자…” 하시고 감정적으로 바로 심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심판이 있기까지 또 얼마나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진심은 심판이 아닙니다. 용서입니다.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시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의 기록을 보십시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20)

노아가 방주를 짧게는 80년, 길게는 120년 동안 지었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 걸렸는지 아세요? 방주가 커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이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주의 제조 기간은 하나님의 기다리심의 시간입니다.

깊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면서 성경에서 최장수를 했습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은 ‘창을 가지고 마을을 지키는 자’라는 뜻으로, 다른 의미로는 ‘그가 죽으면 마을에 종말이 온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약 1천 년 동안 ‘므두셀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가 죽는 날 종말이 온다’라는 것을 입으로 말하면서도 그게 현실이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므두셀라가 죽던 그의 나이 969세 때 노아의 나이 600세입니다. 노아가 600세가 되는 날 홍수심판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1천 년 동안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므두셀라를 보면서 그가 죽으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므두셀라를 969세 즉, 천 년 동안 살려주신 이유는, 1천 년 동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이었습니다. 홍수심판이 잔인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잘못은 하나님이 아닌, 회개하지 않는 인간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죽어서 지옥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을 해주셨는데, 그 사랑을 믿지 않고 뿌리친 인간이 스스로 걸어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얼마나 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고, 증명해 보이시고, 확증해 주셔야 합니까? 아들까지 주셔서 갈기갈기 찢으면서까지 우리를 대신해서 죽게 하시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증명해주셨으면 내 죄가 그렇게 컸나보다 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지요. 그 사랑까지도 뿌리치면서 살았던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옥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자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일방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아들 되신 예수님도 똑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 가운데 대신 죽어 주시면서도 마지막에 팔을 벌리시고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하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고, 그 사랑이 오늘도 여러분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데, 그 사랑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지금도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지옥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그곳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분은 여러분에게 주실 사랑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1천 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심판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그 하나님의 손을 잡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람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9절의 증언입니다.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모두가 하나님을 떠날 때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함께 걷겠습니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노아가 의인이요, 완전한 자여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읽혀지지만, 반대로 읽어도 됩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고, 완전한 자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어 주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His righteousness and integrity were manifested in his walking with God” (by Keil and Delitzsch Biblic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해석을 해보자면, ‘그의 의로움과 완전함이 동행함을 통해서 보여졌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행’입니다. 노아가 받은 은혜는 동행에서 온 은혜였습니다. 그의 의로움도, 완전함도, 자기의 노력에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동행했을 때 주어지는 선물이었고 은혜였습니다.

은혜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고 싶으실 때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멀리 있는 누구를 생각해서 그 은혜를 아껴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가장 좋은 것을 주실 때, 바로 옆에 동행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노아는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평생에 주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을 잘 믿으시고, 믿음의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새롭게 쏟아지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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