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예배 2주차

* 설교자 : 김종원 목사 경산중앙교회

* 페이지 : 178-189

*본문 :

레위기 19장 9-10절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자연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마치 화가와 같은 시인이 있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라는 미국 시인입니다.

<안 거둬들인(Unharvested)>

담장 너머로 풍겨오는 잘 익은 향기
다니던 길 벗어나
무엇인가 가보았더니
과연 사과나무 한 그루
여름의 짐을 편안히 내려놓고
잎사귀 몇 개만 남겨 놓은 채
이제 여인의 부채처럼 가볍게 숨 쉬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도 충분할 만큼
가을 사과는 풍작이었기에
땅에도 빨간 원을 이루었다
안 거두어들인 무엇이 늘 있어 주었으면!
우리의 계획 밖에 있는 게 더 많아졌으면
사과든 무엇이든 잊어버린 채 남겨두어
그 향기를 맡는 게 죄가 안 되도록

마지막 4행이 와닿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다 거두어들인 인생만이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 거두어들인 뭔가가 있는 인생, 조금씩 남겨둔 인생, 이웃을 위해 조금씩 흘리며 산 인생, 그래서 이웃이 그 남겨진 사과를 취하고 향기를 맡는 것이 죄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인생, 그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세요? 걸레처럼 쥐어짜며 살거나 아니면 여백을 살리며 조금씩 남겨두는 인생으로 살고 싶으신가요? 우리네 조상들은 실제로 ‘안 거둬들인’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감나무의 ‘까치밥’이라는 것을 아시죠? 감나무의 감들이 노을처럼 빨갛게 익어가면, 사람들은 감을 땁니다. 하지만 나무 꼭대기에 달린 몇 개는 추위와 배고픔을 겪을 까치들이 먹으라고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잎이 진 감나무 가지에 남은 까치밥은 시골 마을 최고의 풍광이지 않습니까? 새빨간 홍시 하나가 까치 부리에 터지면 마을은 노을빛 잔치가 열려, 사람 사는 향기를 냅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했지만, 이렇게 콩 한 쪽이라도 나눠먹는 정신으로 그 매서운 추운 겨울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마음 씀씀이는 하찮은 미물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봄이 되면 우리 조상들은 짚신을 반 정도만 조여 느슨하게 해서 신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봄에 벌레들이 알을 까고 나오는데, 짚신을 반 정도만 조여 느슨하게 만들 어서 혹여 벌레를 밟아도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달랐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흘림’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정신이 미국 시인의 시와 우리 민족의 풍습 속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9-10)

거듭, 거듭 강조하는 것이 보이십니까? “다 거두지 말고, 줍지 말며, 다따지 말고, 버려두라.” 이 모든 것을 저는 이렇게 한 단어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흘림!’ 악착같이 다 챙기지 않고,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흘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흘림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왜 ‘흘림의 축복’이라고 했을까요? 엄연히 ‘흘림’은 손해 보는 것이고,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놓쳐버리는 것인데 어떻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흘림이 살린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흘림’으로 다 거두지 않고, 줍지도 않고, 다 따지도 않고, 심지어는 그렇게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라고 말씀합니다.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레 19:10)

성경에서 말한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은 주로 어떤 사람들일까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슥 7:10)

보호가 필수적인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호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거류민은 쉽게 말하면 외국인인데 우리 땅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이 다 불쌍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 시대에는 달랐습니다. 전쟁에서 패해 노예로 끌려가지 않는 이상 아주 특별한 이유 없이 남의 나라에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가장 불쌍한 세 종류의 사람을 꼽으라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입니다.

‘흘림’이 이런 사람들을 살린 정확한 예가 룻기에 나옵니다. 가난한 것도 힘들고, 거류민으로 나그네인 것도 힘든데, 이 두 가지가 만난 경우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죠! 가난하면서도 거류민인 모압 사람 룻,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정말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예루살렘에 오긴 했지만, 영락없이 굶어 죽거나 스스로 몸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흘림’을 실천하는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는 보리 추수가 한창이었는데, 보아스는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도적으로 뽑아서 버려두었습니다.

“…보아스가 자기 소년(일꾼)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룻)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룻 2:15-16)

이 ‘흘림’이 룻을 살립니다. 그리고 그녀가 봉양하던 시어머니까지도 살립니다. 더 나아가서 단순하게 입만 풀칠하도록 하도록 돕는 정도가 아니라 보아스는 이미 룻의 고결한 행동을 듣고 알아 서로를 향한 마음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흘림의 밭’에서 성경 최고의 로맨스가 싹트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떻게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마 1:5-6)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방 여인임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그의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할렐루야!

‘흘림’은 모두를 살립니다. ‘흘림’으로 가난한 자, 거류민, 딱한 사람들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자신도 살립니다. ‘대지약우(大智若愚)’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대지(大智)는 ‘큰 지혜’, 약우(若愚)는 ‘일견 어리석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중국 송나라 8대 문호 중 한 사람이었던 소식이라는 분이 쓴 구절입니다. 이 말은 ‘큰 지혜가 있는 사람은 다람쥐처럼 바보스럽게 흘리며 산다’라는 뜻입니다.

다람쥐는 가을에 도토리를 입에 물고는 하늘을 한 번씩 쳐다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겨우내 먹으려고 땅에 묻습니다. 왜 하늘을 볼까요?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그걸 지도 삼아 어디다 묻었는지 확인하려는 참 어리석은 친구입니다. 결국 다람쥐는 도토리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흘려놓은 도토리를 누가 먹을까요? 도저히 도토리를 딸 재주가 없는 다른 동물들이 먹고 겨울을 난다고 합니다. 다람쥐의 ‘흘림’이 좀 바보스러워 보여도 많은 미물(微物)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다람쥐는 다른 미물에게만 좋은 일 해주는 호구는 아닙니다. 다람쥐가 흘린 도토리는 다른 동물들도 살리지만, 땅에 묻어둔 도토리 덕분에 열심히 식목 사업을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싹이 터서 숲이 더 푸르러지게 되더라는 겁니다. 결국 ‘흘림’이 자신을 더 유익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확하게 약속까지 해 놓은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

‘흘림’이 결국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나도 살리는 것입니다. 잠언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고 시편에는 재앙에서 건지신다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 41:1)

여러분! ‘적자생존’을 아십니까? 적자생존이란 ‘흑자’말고 ‘적자’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손해 볼 줄 아는 사람, 희생할 줄 아는 사람, 좀 어리석게 흘리며 다는 사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최후 승리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흘림’이 살립니다. 남도 살리고 결국은 나도 살립니다.

2. 흘림이 거룩이다

오늘 ‘흘림’을 이야기하는 본문인 레위기 19장은 성결법전이라 불리는 레위기 17-26장 안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그중에서도 레위기 19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1-2)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거룩할 방법들을 소개합니다. 그 다음절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합니다. 또 “우상숭배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겨둠, 흘림’까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10)

분명히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하시고는 그다음에 제시해 주시는 방법이 ‘흘림’인데 뭘 흘려두는가가 중요합니다. 분명히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라고 했습니다. 또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너희의 땅’이라고 했지 ‘내 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네 포도원’이라고 했지 ‘나의 포도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분명히 ‘내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땀 흘리고 수고해서 거둔 내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흘려두라고 합니다. 내 포도원에서 내가 수고해서 거둔 내 열매인데, 그걸 흘려두라고 합니다.

뭘 의미할까요? 내가 땀 흘리고 수고한 것 속에 다른 누구의 것도 있다는 것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눔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걸 깨달아 아는 것은 ‘거룩’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신앙이 된다는 것, 내 소유 안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여 볼 줄 안다는 것은 ‘거룩’입니다. 내 소유 안에서 이웃을 위한 분깃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도 ‘거룩’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본문은 계속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다”라고 하고 “너희 하나님이 여호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도 되지만 ‘당신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장 거룩한 기도로, 가장 표준이 되는 기도로 여기는 주기도문만 봐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날 ‘나’에게 가 아닙니다. ‘우리’에게입니다. 우리 민족은 공유하는 집인 세어 하우스도 아니면서 집을 ‘우리 집’이라고 하고, 마누라도 ‘우리 마누라’라고 합니다. 일단 영어로도 봐도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그리고 원어를 봐도 분명히 ‘우리’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1인칭 복수형 인칭 대명사가 두 번이나 나오는 것은 기독교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즉, 기독교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타인을 희생시키는 종교가 아니라 이웃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이타적인 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 남이 어떻게 되더라도 나만 살면 되는 것은 거룩도 아니고, 아예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면,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신학교 앞에는 언제나 복사 및 제본 책들을 파는 분들이 즐비했습니다. 신학생들은 돈이 없으니까 책을 좀 사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주석이라든지 자료집들은 적게는 몇십만 원, 많게는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자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돈이 없어 유혹되는 것은, 그것이 다 불법 복사된 책들이라 엄청 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양심에 걸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할 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졸업할 때쯤 되니까 이번에는 그런 방식으로 책을 파는 분들은 거의 사라지고, 대신에 불법 CD를 파는데 방대한 자료를 CD 1장에 담아 팔고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가 수십 년을 연구하고, 출판사가 사활을 걸고 출판한 자료를 클릭 몇 번으로 도둑질하는 겁니다. 자료를 출판하려면 출판사가 사활을 걸어야 하고, 어렵게 출판해도 보는 사람은 목회자들, 신학자들뿐이어서 출판사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걸 클릭 몇 번으로 도둑질해 버리니까 출판사들은 바로 망합니다. 남은 어떻게 되더라도, 기독교의 위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것은 흘림의 축복도 아니고, 거룩도 아니고, 아예 기독교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좀 어리석어 보여도, 사실 그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잖아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성도의 삶이고,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흘림’ 자체가 하나님 앞에 한 걸음 나아가는 거룩이 되는 줄 믿습니다.

김종원 목사 

경북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생물학과 졸업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졸업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목사 안수
미국 Talbot신학교 성경해석학 전공(Th. H.)
미국 Fuller신학교 목회학 박사과정 중(D. Min.)
HOPE 선교회 이사
칼넷 이사
월드 휴먼 브리지 공동대표
■저서
『새 노래』, 『겁나지만 겁내지 않는다』, 『결혼을 앞둔 그대에게』, 『행복을 만드는 교회』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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