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부 설교

* 설교자 :  최정훈 목사 부천동광교회(둥근교회 담당)

* 페이지 : 324-331

*본문 :

여호수아 6장 1-7절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1. 현실에서의 벽

더 빌리빙(The believing)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한 번 시작되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듣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소리들이 존재하지만, 들어야 합니다. 라합과 두 정탐꾼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들렸던 그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더 빌리빙(The believing)의 두 번째 ‘믿음의 버튼’입니다. 사실 성경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여호수아에게는 모든 상황이 순조로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에 반응했더니 요단강이 갈라지고, 그 길목에서 할례를 행했더니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죠. 우리는 흔히 이러한 일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말씀의 은혜를 받고, 기도할 때면 영적인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처럼 특별한 일을 경험하기도 하고, 길갈의 돌같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막상 세상에 나가면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삶으로 이어지던가요?

대부분이 여리고라는 높은 세상의 벽 앞에 힘을 내지 못합니다. 아니, 여리고 그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저 나의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것이 전부입니다. 세상은 그 삶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청년의 때라고 합니다. 분명 나만의 요단강 체험도 있고, 길갈에서의 할례와 같은 일들은 넘쳐나는데, 정작 여리고의 경험이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교회와 직장이 구분되어 믿음과 현실이 서로 다른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빌리빙(Believing)의 방법도 중요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면 나만의 방법을 선택하는 겁니다. 연애와 결혼, 경제적인 어려움, 진로의 선택, 내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 앞에 나만의 버튼을 누르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빌리빙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이 지점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왜 나에게는 여리고의 경험이 없는 것일까요?

2. 실패감에서 오는 패배

오늘 본문의 1절을 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수 6:1)

여리고는 굳게 닫혀있습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철옹성입니다. 이 문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리고 안에는 자원이 차고 넘칩니다. 그러니 쉽게 문이 열릴 리가 없습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 자들입니다. 계속해서 두드려야 합니다. 안되면 그 문고리라도 붙잡고 기도하며 매달려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리고 문턱에서 뭘 해보지도 못하고 멈추어버렸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실패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내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취업의 문제로 기도합니다. 태의 문이 열리지 않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누운 지가 벌써 6개월이 넘었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대로입니다. 내 삶의 변화는 조금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빌리빙(Believing)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도무지 내 삶에 개입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바이러스처럼 천천히 퍼져 나갑니다. 어느새 여리고에는 큰 관심이 없고, 예배에 나올 때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성벽은 원래 무너지지 않는 거야. 두드리고 소리 질러도 굳건히 닫혀있던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러면서 지금의 흐름을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가끔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무너질 여리고가 없습니다. 저 정말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하진 않습니다. 정말 괜찮아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여러분, 만약 주일의 시간과 내 삶의 시간이 멀찍이 떨어져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여리고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는데 내 삶에는 변화가 없고, 여전히 내 일상이 신앙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여리고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기 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여리고를 넘어서야 합니다.

3. 예배자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알려주시는데 3절, 4절입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 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수 6:3-4)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첫 번째는 다름 아닌 예배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마주하는 잔혹한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은 예배입니다. 사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제의적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즉 ‘삶에서 예배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번씩 돌고 마지막은 일곱 번 돌았습니다. 성경에서 숫자 7은 완전수이면서 동시에 일주일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사밧이 아람과 전쟁 중입니다. 이 전쟁에서 백성들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왕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 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대하 20:21a)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은 다름 아닌 예배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세상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를 찬양하고 예배하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대로 했더니, 즉 예배드렸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군대를 다 쓸어버리십니다.

그 장소가 브라가 골짜기였습니다. ‘브라가’는 ‘찬양’이란 뜻을 가지고 있죠.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막힘이 있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예배드려야 합니다. 굳건히 닫혀서 그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그때에 반드시 여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다가 길이 막혀있다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배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4. 침묵의 기도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수 6:10)

여리고 성 앞에서 두 번째 명령을 하시는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3번을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지금 전쟁 중입니다. 큰 소리로 사기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질러야 하는 상황에서 주님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큰소리치며 사람들 자극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이기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는 것을 의지합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담대함이 생기고, 말을 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사실 우리는 두려워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면 침묵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주님만 믿으며 여리고 성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 성 밖을 돌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두려울까요? 성 밖이 아니라, 오히려 성안에 있는 여리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이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

에서 교회란 큰소리치며 세상에 드러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침묵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리빙(Believing)의 두 번째는 예배와 기도입니다.

5. 빌리빙(Believing)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모든 문이 굳게 닫혀서 포기하며 살아갑니까? 예배드리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내 안에 여리고가 무너지지 않으면 평생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매일 성을 돌면 되는 건가요?”, “새벽예배드리고, 매일 큐티 하면서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내 안에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일까요?” 네 그럴 수도 있는데,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돌지 않았습니다. 바로 언약궤를 따라 걸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 도, 가나안에서 전쟁을 할 때마다 그들은 늘 언약궤를 따라나섰습니다. 바로 빌리빙(Believing)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언약궤를 따라나서면서 그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로 한국 교회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리고 성벽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예배와 기도입니다. 그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빌리빙(Believing)으로 여리고를 일곱 번 돌았습니다. 여기서 ‘7’은 ‘창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 믿음을 가지고 그들은 언약궤를 따라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을 때에만 여리고는 무너집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여리고가 무너지면 감사하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리고를 넘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현실에 압도당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고, 그 마음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면 여리고가 무너지겠습니까? 그 순간 이미 승패는 결정된 것입니다.

반드시 빌리빙(Believing)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 믿음의 고백으로 여리고의 버튼을 누르셔야 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단지 우리는 언약궤를 따라 그 길로 나서면 되는 것이죠. 여러분, 예배와 기도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발걸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여리고가 무너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빌리빙(Believing)의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정훈 목사 

상명대학교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교역학석사) 졸업
숭실대학교 성서신학과 (Th. M. 신학석사) 졸업
(現) 부천동광교회 부목사(둥근교회)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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