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고등부 설교

* 설교자 : 강주혜 목사 안산동산고등학교 교목

* 페이지 : 312-323

*본문 :

사도행전 5장 1절-11절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중략)…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오늘 함께 알아볼 인물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말살한, 무척이나 안타까운 부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회개와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시고, 큰 기대와 사랑을 주고 계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숨을 거둬 가셨습니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형벌에 대해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이들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가지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자, 그리고 사탄의 세력에 완전히 굴복해버린 자의 결말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고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금술이 좋은 부부입니다. 신앙을 떠나생각하면 마음이 맞고, 갈등 없이 동행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은 부부에게 가장 좋은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교회에 부부가 함께 나와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얼마나 멋있고 부러운지 모릅니다. 아마, 부부 중 홀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아마 ‘함께 교회에 나오는 부부’일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부부의 그런 모습을 그리시며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습니다. 짝이 있는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던 아담을 보시며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함께하는 짝을 지어주겠노라 마음먹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함께 손을 잡고 동물들과 함께, 또 풍족하게 ‘둘’만 살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보고, 대화하고, 행동하는건 오직 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관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땅에 죄악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저 서로 행복하게만 살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죄악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도 죄악이 스며들어왔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 공동체에 속해있던 인물입니다. 이 부부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소식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베드로가 있었던 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들이 말한 복음과, 기적, 전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목격하였습니다. 4장을 보시면, 사도들이 했던 복음전파와 기적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31절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사도들이 기도하는 곳이 크게 진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경험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또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아름답고,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이제 스멀스멀 죄가 들어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전에 먼저 나눠야 할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완전히 농락당한 두 부부의 죄악 전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4장 32절에 나오는 바나바의 헌금입니다. 4장 32절에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34절을 보시면 자신의 밭과 집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헌금으로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라 하는 사람이 37절에 자신의 밭을 팔아서 그 모든 값을 사도들에게 바친 기록이 나타납니다. 혹자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도록 압박이 있었으며, 자발적이지 않았을 것이라 오해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바나바의 헌금에 대해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족 사람, 요셉이 이름인,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칭을 가진 ‘바나바’라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나바의 행위는 위대하며 놀라운 헌신이기에 성경은 이토록 세밀하고 중요하게 그를 다뤘던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 5장 4절에는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팔기 전에도 땅은 너의 것이며, 팔고 난 후에도 그 돈은 너의 것인데, 그럼에도 속인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은 것을 볼 때, 공동체의 헌금은 강압적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헌금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행위였음을 우리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다시 앞서 이야기했던 부부의 금술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매우 아름답게 하나님을 섬겼으며,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죄악이 그들 마음속에 스며들었습니다. 바나바가 그의 소유를 모두 팔아 바친 것을 본 아나니아의 속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곧, 자신이 가진 땅을 모두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갔습니다. 자발적인 헌신임에도 그가 정죄 받은 중요한 이유는 땅 판 값의 ‘전부’인 척 속이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을 연기하면서 사도들에게 바쳤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가 죄악에 굴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요?

첫 번째, 그는 공동체 속에서의 명성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과거에 그는 바나바가 모든 소유를 판 헌금으로 얼마나 칭송받았는지를 곁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바나바를 높게 칭하였고, 본받고자 하였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아나니아 또한 이러한 헌금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영적인 사람’이라는 존경과 칭송을 받고 싶어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그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교회 공동체를 오해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기 위해선 무리를 해서라도 모든 것을 나누고, 억지로 사유재산을 거둬서 평등하게 나눠야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오해 속에서 그는 좋든, 싫든 땅을 모두 팔아서 바쳐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교회에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런 오해를 하는 사람들은 현재에도 참 많습니다. 극단적인 종교생활과 금욕주의가 공동체에 귀감이 되고 의무가 되어,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래야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종교생활을 하고, 기도하는 흉내를 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코스프레를 합니다. 또 반대로 그런 모습을 가지지 않으면 교회에서 도태되어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움을 갖기도 합니다. 모두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된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사도들이 기적을 행하고,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했던 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선과 거짓의 모습을 고수하여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사탄의 거짓말에 놀아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속이는 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은 사탄의 속성에 대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이렇듯 아나니아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혀서 스스로를 속이고, 사도들을 속이고, 하나님까지 속이려 했습니다. 보통 거짓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을 속입니다. 자신이 하는 악한 일에 정당성을 붙이고, 합리화를 하여 그 거짓 속에 자신을 맡기는 일을 합니다. 그 작업이 끝나면, 자신과 관련된 주변의 인물들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모르는 사람부터 동료, 그리고 가족까지 함께 거짓 속에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 모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행위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나니아를 보십시오. 자신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여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거룩한 타이틀을 받아, 으쓱할 것을 상상했다는 것은, 하나님 역시 그 거짓에 속아 아나니아의 악행을 그저 지켜만 보실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아나니아를 속여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마치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거라고 속인 것처럼, 아나니아에게 헛된 기대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아나니아의 잘못을 얼마든지 되돌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이런 행동을 곁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는데 바로 오늘 본문 1절에 등장한 삽비라입니다. 2절에 보시면, 아나니아는 위와 같은 이유로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악한 행위의 첫 시작은 남편인 아나니아로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 삽비라는 아나니아의 속셈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삽비라가 그 사실을 미리 알았음에도 정작 아나니아에겐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계획대로 값의 얼마만 떼어서 사도들 앞에 돈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내가 알게 되고, 그 후 사도들에게 돈을 가져가기까지 ‘생략된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그들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는 삽비라 역시 아나니아의 행동에 함께 공모했다는 뜻입니다. 아나니아의 설득에 넘어갔고, 꺼림직해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삽비라 역시 아나니아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삽비라가 정확히 어떤 마음을 품고 아나니아의 행동에 동조하게 된 것인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아나니아가 등장하고 3시간쯤 후에 삽비라가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삽비라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고, 그 결심을 굳힌 후에 아나니아와 같은 선택을 했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삽비라는 아나니아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으며, 오랜 시간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부의 중요한 역할이 나옵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부부는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면 되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거나 고민하고, 싸우고, 갈등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두 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죄악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이나 고민들, 계획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반대되는 마음이자, 사탄에게 지배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부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 식상한 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등불’이라는 단어는 아주 심오합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방에 등불을 켜놓은 경우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보통 등불은 어느 때에 켤까요? 너무나 캄캄하여 아무것도 켜놓을 것이 없을 때 궁여지책으로 켜놓는 것이 바로 등불입니다. 조금이나마 주변이라도 볼 수 있도록, 바로 앞을 밝혀주는 것이 등불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등불이 된다는 것은, 지금 어둡고 컴컴한 공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가야 할 길조차 보이지 않을 때, 그때가 바로 등불을 켜야 할 시점입니다.

같은 의미로, 서로의 등불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배우자가 현재 아주 어두운 곳에 있을 때 앞으로 나가야 할 길에 빛을 비춰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멘토가 되고, 감시자가 되고,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아나니아의 악한 생각을 유 일하게 알고 있는 딱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삽비라입니다. 부부이기때문에 아나니아가 은밀하게 숨겨둔 진실까지도 삽비라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부는 서로가 은밀하게 숨겨두는 비밀을 가장 밀접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비밀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고 판단될 때, 배우자는 그 사실을 지적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촉구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부 중 배우자가 감당해야 할 아주 중요한 역할입니다.

둘째, 부부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다독이며 함께 경주하는 동역자입니다.

한 명이 쳐지면 끌어주고, 또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밀어주는 그런 관계속에서 함께 신앙의 경주를 달리는 사이입니다. 이런 관계는 서로를 더 많이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축복받는 행복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등불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배우자의 캄캄한 세상에 등불이 되고자 불을 밝혔음에도, 배우자가 그 등불을 무시하고 폭주 기관차처럼 악행에 빠져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엄청난 고민에 빠집니다. 아주 흔한 예로, 부부 중 한 사람이 주일에 빠지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나 주일성수 안 지키고, 그날 캠핑 갈 거야. 당신도 같이 가자.” 상대편 배우자가 아무리 말리고, 안 된다고 설득을 하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3절부터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의 거짓과 위선에 분노하여 그의 목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삽비라의 목숨까지 함께 거둬가시진 않았습니다. 삽비라의 시간은 따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앞서 아나니아에게 했던 똑같은 질문을 8절에 다시 삽비라에게 합니다.

부부는 하나님 안에 함께 있을 때만 하나입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하나님을 벗어나면, 상대편 배우자는 끊임없이 설득하여 다시 하나님 안으로 다시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배우자가 수긍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따로따로 질문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마찬가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쌍으로 묶어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음에도 그들이 죄악을 저지른 후에는 아담에게 따로, 그리고 하와에게 따로 나타나 각기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악을 저지르기 전에는 늘 두 사람에게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창 1:28)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함께 명령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악을 저지르자, 하나님은 3장 9절에 나타나셔서 아담을 홀로 부르십니다. 8절에 그들이 함께 숨었다고 했음에도, 9절에서 하나님은 따로 아담에게 물으시고, 13절에는 다시 하와에게 따로 물으셨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렇게 따로따로 형벌을 내리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들어온 후에는, 부부 역시 죄 앞에서는 각자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결혼을 해 배우자에게 빛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자 노력했음에도 그 노력이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각자 하나님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부부로써 우리를 함께 보시는 게 아니라, 각자에게 따로따로 질문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그리고 삽비라에게 따로 질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선택대로 자신의 행동에 합당한 벌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속인 죄, 삽비라 역시도 하나님을 속인 죄입니다.

아름다운 결혼을 꿈꾸는 청소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부부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할 때,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선지자가 되기도, 예언자가 되기도, 조언자가 되기도, 협력자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이서 서로를 지켜볼 수 있기 때문에 부부의 이러한 역할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하나님을 벗어난다면, 그때는 단호하게 그 사람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부부관계는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랑을 거두고, 아예 이혼을 하란 말입니까?”라고도 물어보실 수 있겠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독립하라는 말씀은 꼭 이혼을 하라거나 혹은 사랑을 거두고 남남처럼 차갑게 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따로따로 물어보실 질문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질문은, 배우자와는 상관없는, 오직 나를 위한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반에 했던 예와 같이, 배우자가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고, 캠핑을 간다고 해서 배우자와 인연을 끊고, 아니면 그때부터 밥도 함께 먹지 않고 틱틱거리며 화를 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배우자와 부부의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필요한 일을 하되, 하나님께서 “나의 날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질문에 여러분은 각자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떻게 주일 성수를 지키지 않는다는 배우자와 이혼하지 않느냐? 배우자와 왜 싸우지 않았느냐?”라고 물어보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배우자의 신앙생활 때문에 굳이 부부생활에 타격을 받고, 억지로 연을 끊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배우자가 자신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나의 신앙까지도 침범하여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과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투가 많은 분이라는 걸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정신적인 독립이란, 배우자의 선택과 미래에 자신 또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부부는 하나로서 아름다울 뿐이지, 하나님을 벗어난 상태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은 단순히 생각을 넘어서, 직접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만 해도 두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께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신이 길을 잃을 때 배우자가 자신에게 가야 할 길을 인도할 수 있는 등불이 되어줄 수 있기를, 그리고 배우자가 길을 잃었을 때 자신이 하나님 앞으로 그 사람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어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에는 하나님 앞에 주체적으로 서서, 그분의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로, 여러분의 부부생활을 미리 준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강주혜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졸업
숭실대학교 기독대학원 상담학과(Th. M.)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종교교육학과(M. Ed.) 졸업
(現) 안산동산고등학교 교목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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