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4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90-301

* 본문:

누가복음 5장 17-26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처음으로 2학년 아이들의 담임을 맡았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트립니다. 이 아이는 평상시에 공부도 잘하고, 교우 관계도 좋은 아이였습니다. 아이가 수업 시간이 갑자기 울자, 당황한 선생님이 아이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여자아이의 짝꿍이었던 개구쟁이 남자아이가 한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합니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공책을 찢어서 그 종이를 무릎과 바닥에 모두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남자아이를 불러낸 뒤에 혼을 내고, 벌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남자아이는 수업 시간 내내 손을 들고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업이 마치고 쉬는 시간에 울음을 터뜨린 여자아이가 선생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실은, 자기가 수업 시간에 오줌을 쌌는데 당황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옆에 짝꿍이 공책을 찢어서 무릎도 가려주고, 바닥에 흔적도 가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혼이 나면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주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참된 우정 속에는 희생하는 사랑이 담겨있다. 희생 없는 참된 우정과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인 누가복음 5장에서는 자기를 희생해서 친구를 살리고자 한 ‘4명 친구’의 우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병에 걸린 친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믿음으로 친구를 주님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한 친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벗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희생한 친구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에 있는 ‘가버나움’, 현재의 이름으로는 ‘카파르나움’(Capernaum)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가버나움은 마태복음 4장 13절에 보면 나사렛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두 번째 고향입니다. 현재도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역의 모든 도시 중에 가장 크고 번화한 곳입니다. 이 지역이 번화한 이유는 교통의 요충지(要衝地)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비아 마리스’(via maris)라는 해변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이집트에서부터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이스라엘 내륙으로 들어오는 길입니다. 그리고 세겜을 거쳐 가버나움을 지나 시리아의 수도인 다메섹까지 이어집니다. 이 길은 당시에는 국제 교역로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가버나움 또한 무역도시로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기도하시며, 회당에서 말씀도 증거하셨습니다.

바로 이 가버나움에서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본문의 사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 2장에서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이 들리니, 많은 사람이 몰려듭니다. 이미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메시아로 오신 분이라는 소문이 많이 퍼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득해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중풍’(中風)은 불치병으로 여겨졌습니다. 더욱이 병의 원인이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죄인으로 여겨 접촉도 하지 않고, 업신여기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중풍병자는 조금 더 상태가 심각한 환자입니다. 전혀 거동할 수 없어서 침상에 메인 채로 예수님께 나올 정도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이지만, 사람들이 꺼리는 중풍병자가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예수님만이 중풍병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장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문밖까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중풍병자와 신체 접촉을 금기시하는 사람들을 뚫고 지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집 바깥 계단을 통하여 지붕으로 올라간 뒤, 지붕을 뜯고 집 안으로 중풍병자의 침상에 줄을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리기로 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때, 중풍병자의 병이 치유되고, 그의 삶이 새롭게 변화하였습니다.

이처럼 본문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옛날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1차적으로는 역사적인 사실로 봐야 하고, 2차적으로는 그 사건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1. 모든 은혜의 시작은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느냐’가 모든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제자와 무리가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이 기적의 출발점이고, 은혜의 시작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함께 있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무리는 ‘바리새인’들이고, 또 다른 무리는 ‘율법 교사’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바벨론 포로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분파(分派)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유대인들이 모여서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Φαρισαιος)의 뜻 자체가 ‘분리한다’입니다. ‘나는 너희와 다르게 신앙의 정조(貞操)를 지킨 구별된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바리새인’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원래는 신앙의 지조(志操)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이 변질(變質) 되기 시작했습니다. 선조들이 가졌던 신앙의 모습보다는 특권의식에 젖어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법권까지 갖고 있었던 최고의 실력자들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굉장히 혹독합니다. 마태복음 23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또한 27절에는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바리새인들 속에는 더러운 죄악들과 믿음 없는 종교인들의 모습이 가득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 교사’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어떤 뜻인지 해석하며, 삶에 적용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도 역시 지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4천년 동안이나 성경을 연구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그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즉,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앉아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권력이 있었고 지도층이었기에 집 안에서 예수님 바로 앞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큰 은혜를 누리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영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순수한 마음으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의 꼬투리를 잡고자 앉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고 “아멘”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의 눈으로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치유하실 때에도 그들은 꼬투리를 잡습니다. 21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즉시 꼬투리를 잡을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기적을 보여주셔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음에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문 안팎에서 몰려든 사람들과 친구인 중풍병자를 침상에 매어온 친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임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 연륜이나, 직분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그저 몸만 교회에 왔다 갔다 한 사람은 종교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오늘 예수님을 영접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하며, 믿음대로 산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바리새인처럼 신앙이 뼈대가 있지 않습니다. 율법 교사들처럼 성경에 대해 박식(博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탁월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실 수 있는 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고 불치병을 고칠 능력 있는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무모한 믿음의 삶은 나의 경험과 논리를 내려놓는 삶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 현실이 되는 삶입니다. 하지만 ‘무책임’과 ‘무모함’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될 대로 돼라’는 것은 무책임한 삶입니다. 그러나 무모함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모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믿음이 있기에 용기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결국 무모한 믿음이란, 내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용기가 있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으므로 가능한 무모함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장애물을 뛰어넘고, 환경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믿음의 발걸음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있습니다. 인생은 마치 장애물 달리기 경주와 같습니다. 장애물 달리기는 선수가 마음껏 뛸 수가 없습니다. 속도를 내려고 하면, 갑자기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장애물을 넘어서면,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중풍병자와 친구들 역시 수많은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친구는 중풍에 걸려 거동하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습니다. 친구를 침상에 매단 채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집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반드시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동 지역은 굉장히 덥습니다. 그래서 낮보다는 밤에 지붕 위에 올라가서 활동을 많이 합니다. 당시 지붕은 지금으로 말하면 거실의 개념입니다. 밤이 되면, 시원한 지붕 위에서 대화도 나누고, 음식도 먹으며, 기도도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7절에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라는 말씀은 지붕 위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지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지붕의 구조도 우리와는 다릅니다. 19절에 “지붕에 올라가면 기와를 벗기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와’로 번역된 ‘케라몬’(κεράμων)은 ‘흙벽돌’이라는 의미가 더 적합합니다. 당시 지붕은 진흙 벽돌을 덮고, 그 위에 나뭇가지와 짚을 한 번 더 덮은 것입니다. 친구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나뭇가지와 짚을 들어내고, 흙벽돌을 침상을 달아 내릴 넓이만큼 벗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집 안으로 흙과 먼지가 잔뜩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무모할 정도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모든 장애물을 헤쳐 나가며, 상황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찾아가면 친구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 그 한 가지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장애물을 극복하는것입니다. 본문 20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서도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 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테크논’(Τέκνον)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정말 친근한 사람을 따뜻하게 부를 때 쓰는 호칭입니다. 즉, 이 중풍병자는 질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영혼 구원까지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믿음의 발걸음을 걷고자 할 때, 많은 장애물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장애물들이 많다면,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과 환경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장애물 하나를 넘어도,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에 계속되는 장애물을 주실 때는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과정인 줄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가버나움의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3. 우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4명의 친구는 중풍병에 걸려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친구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살리려 했습니다. 그들은 친구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친구를 위해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VIP』라는 책에 보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즉, 사랑하는 이웃, 친구가 구원받기를 진실로 소망한다면 자신이 희생하여 값을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말로만 사랑하고, 실제로는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들을 우리가 막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주변에 힘들고 어려운 분들과 함께 하는 눈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줄루족’이라는 부족이 있습니다. 독특하게도 그들의 인사말은 ‘당신

을 보고 있습니다’입니다. 서로 만날 때마다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이웃인 당신이 힘들어하는 점이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 지, 내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는지, 계속해서 관심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이웃과 친구가 되는 방법은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해결책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본문의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희생해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온다면, 말씀 한마디로 병이 치유 받고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백문일답’(百問一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한 가지’라는 뜻입니다. 수도원에서 수십 년간 묵상하며, 진리를 깨우친 수도사가 세상에 나오자 많은 사람이 질문을 던집니다. 처음으로 수도사에게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역시 수도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염려에서 해방되는 비결’, ‘사업에서 성공하는 비결’, ‘문제와 장애물을 뛰어넘는 비결’ 등 여러 질문을 했지만, 수도사의 대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해답으로 믿는 사람은 이제 삶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저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고, 믿음으로 장애물을 넘어서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변에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의 주인공으로, 좋은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장창수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 Div.)
계명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M. A.)
미국 Azusa Pacific University 졸업(M. A. R.)
미국 Liberty University 졸업(D. Min.)
총신대학교 기독교 교육학 박사과정(Ph. D.) 수료
미국 Torrance 소재 남가주 크리스천 한인교회 담임 역임
월드비전 목회자 홍보대사
대구 매일신문 칼럼니스트 역임
GMS 세계선교회 부이사장 역임
대신대학교 11.12대 재단이사장 역임
(現) 대구 CBS 운영이사장
(現) 총신대학교 재단이사
(現) 대구 대명교회 담임목사
■저서
『길라잡이』, 『성령의 열매 맺기』, 『하나님의 명령에 싸인하라』, 『성숙한 그리스도인 1, 2』, 『말씀을 따라 산 믿음의 거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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