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3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68-289

* 본문:

누가복음 12장 22-32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중략)…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과연 우리 인생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날을 따져 본다면 얼마나 될까요? 인류 역사상 많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중 ‘사라센’(Saracens)이라는 제국(帝國)이 있습니다. ‘사라센’ 제국은 이슬람 제국으로 인도 서부에서부터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굉장히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당시에 세계 최고의 대제국이었던 ‘사라센’ 제국은 특별히 891년에 출생하여 962년에 사망한 ‘압둘라만 3세’가 통치하던 시대가 가장 전성기였습니다. 압둘라만 3세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49년 간 다스렸습니다. 제국이 얼마나 부강했던지, 1년에 세입(歲入)이 지금으로 환산하면 3,360억 원 정도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압둘라만 3세는 부인이 3,321명이었으며, 자녀는 616명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압둘라만 3세가 마지막 임종(臨終) 때 남긴 말이 전해 내려옵니다. “내가 오래도록 영광스러운 이 사라센 제국을 통치했으나 진정으로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고 행복을 느낀 날은 단 14일이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 염려와 근심 속에 평생을 살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정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염려는 찾아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염려와 근심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목회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의 전기(傳記)에는 이런 기록이 나타납니다. 스펄전 목사에게 가장 큰 염려 거리는 설교였다고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설교 부탁을 해오면, 그때부터 염려와 근심 때문에 소화가 안 되고, 잠을 못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설교를 했는데,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내 설교를 통해서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와 같은 고민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얼마나 염려가 심했던지, 강대상에 서기조차도 힘든 날이 있었다고 솔직히 고백을 합니다. 이처럼 염려는 어떤 측면에서 누구에게나 인생의 동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 국립암센터에서 사람들의 염려에 대한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는 염려의 유형이 5가지 정도로 나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는 관심사에 대한 염려입니다. 건강, 자녀, 물질, 명예 등 현재 자신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에 대한 염려 거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변화에 대한 염려입니다. 죽음, 이혼, 부도, 퇴직 등 현재 상황에서 바뀌는 부분에 대한 염려입니다. 세 번째는 비판입니다. 특별히 남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판에 대한 염려가 많습니다. 네 번째는 압박감입니다. 수험생으로서의 압박감, 가장으로서의 압박감, 책임자로서의 압박감 등으로 염려가 많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양심의 가책에 대한 염려입니다.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을 했을 때, 양심의 가책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이렇게 따지면, 세상에 하루라도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염려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는 말씀이 신·구약 성경에 걸쳐서 550회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그저 권면하는 어투가 아니라, 강력한 명령으로 말씀합니다.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근심과 염려가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보시면서 “염려하지 말라”라고 본문을 통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1.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인 누가복음 12장 22-32절 말씀을 통하여 “염려하지 말라”라는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22절에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29절에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

라”라고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단호하게 성도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염려’란 무엇일까요? ‘염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단어는 ‘매림나오’(μεριμνάω)입니다. 이 단어는 크게 보면 두 가지 뜻입니다. 첫째는 ‘마음이 나누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염려하는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1장 8절에도 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염려가 많은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이처럼 염려는 ‘성격’이나, ‘기질(器質)’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면, 기도하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견뎌냅니다. 그러므로 결국 염려, 즉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염려’의 두 번째 뜻은 ‘스스로의 목을 조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이 염려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입니다. 영적인 호흡을 막는 것이 염려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근심’은 헬라어로 ‘메테오리제스테’(μετεωρίζεσθε)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궁리(窮理) 하다’, ‘멀리 보다’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멀리 보는 것은 긍정적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멀리 보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멀리 내다보며, 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일들이 ‘근심’이라고 말합니다. 산에 오르면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나무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숲도 보이고, 저 먼 곳에 있는 풍경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옵니다.

인생은 등산과는 다릅니다. 우리 인생에는 정상이란 것은 없습니다. 정상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앞에는 더 큰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한 치 앞의 인생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우리가 하는 근심과 염려 중 대부분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내일의 수많은 걱정거리가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오늘을 감사하며 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 걱정이 사라집니다. 삶에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삶에 엄청난 문제와 염려 거리가 있어도 하나님께 맡긴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하게 먹는 것, 입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문학적인 표현으로써 의식주(衣食住)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즉,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것들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은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는 것은 마치 이방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적인 문제에 대해서 전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25절에서 재미있는 예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키 작은 사람이 자신의 키 때문에 아무리 염려를 한다고 해도, 1cm도 자라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인간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기에 염려와 걱정거리를 머리에 이고

살아가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 28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믿지 못하고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세 가지 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까마귀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까마귀는 헬라어로는 ‘코라카스’(κόρακας)라고 불리는 까마귀과(科)의 새입니다. 현재는 중동 지역에서 잘 볼 수 없지만, 과거에는 중동 지역의 골짜기 인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새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죄인들이 사형을 당하면, 매장하거나 굴에 장사(葬事) 하지 않습니다. 시신(屍身)은 골짜기에 버립니다. 그러면 까마귀들이 시체를 쪼아먹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는 부정한 새 중에 하나로, 까마귀 종류의 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까마귀는 부정적인 의미의 새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전체에서 ‘까마귀’라는 언급은 본문에서 단 한 번 나타납니다. 같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는 까마귀를 ‘공중의 새’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와 달리, 본문에서 까마귀를 특정(特定) 해서 말씀한 까닭은 ‘너희들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기는 까마귀와 같은 새 조차도 하나님이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겠느냐?’는 뜻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백합화’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백합화는 정확히 말하면 ‘아네모네’(Anemone)라는 꽃입니다. 한글로 ‘백합화’로 번역이 되어서 그저 하얀 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빨간색과 보라색 등 아주 화려한 색깔의 꽃입니다. 또한 왕을 상징하는 색이 보라색과 붉은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가장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입은 옷과 영광보다도 ‘아네모네’ 꽃 한 송이의 색이 더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꽃을 바로 하나님께서 입히셨다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는 ‘들풀’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자라나는 들풀은 땅이 척박하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곧 시들어 죽고 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땔감으로 귀한 나무보다는 시들어 죽은 들풀들을 모아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들풀은 가장 하찮은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신다는 것은 너희들이 가장 하찮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까마귀와 백합화와 들풀을 예로 드시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물며’라는 단어는 헬라어 ‘포소 말론’(πόσῳμᾶλλον)을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로 ‘포소’(πόσῳ)는 ‘얼마나’라는 뜻이고, ‘말론’(μᾶλλον)은 ‘더’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물며’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의 뜻은 ‘얼마나 더’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부정하게 생각하는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백합화와 하찮게 보이는 들풀도 입히시는데,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얼마나 더 귀하게 여기시며, 책임지시겠느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들을 책임 지실 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염려는 내 몫이 아닙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30절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고난도, 아픔도, 상처도, 문제도, 염려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책임 지심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염려 거리들을 하나님께 맡기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3. 예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그의 나라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염려와 근심,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만두고, 오직 하나님의 일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살아간다면, 더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에 집착하고 자녀에게 우선순위를 두면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염려 거리가 생겼을 때, 지금 염려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인지를 한 번 고민해 봐야 합니다. 헛된 염려에 빠져들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용기 내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 있는 일에 우리를 드리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시편 37편 3절은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4절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절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의 염려에 매몰(埋沒)돼 절망하지 말고, 믿음의 발걸음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며 나아가라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라는 말씀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툴리안 차비지(Tullian Tchvidijian)의 『은혜의 순간』이라는 책에서는 ‘염려 속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4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이 없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린다. 내 생각에는 불가능한 염려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모두 뒤집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넷째,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하다.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전(前) 국가대표 축구 선수인 이영표 선수가 쓴 『생각이 내가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축구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37세의 나이로 인생의 전반전을 마친 그에게도 여러 가지 염려 거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이영표 선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일까?’를 깊이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사명은 누군가의 아들로서, 세 딸의 아빠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누군가의 친구와 이웃으로서, 축구 선수 이영표로서, 그리스도인 이영표로서, 오늘 허락된 이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지금 염려 거리가 있어도, 과거와 미래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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