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예배 2주차

* 설교자 :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 페이지 : 268-278

* 본문:

창세기 18장 9-15절, 21장 5-7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이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전 세계 사진작가 중 가장 작품의 값어치를 높이 평가받은 사람은 브라질 출신의 예술가인 ‘빅 뮤니츠’(Vik Muniz)라는 분입니다. 그는 브라질에서 가장 척박하고 가난한 동네인 ‘자딤 그라마초’(Jardim gramacho)에서 태어나고,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고향 ‘자딤 그라마초’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쓰레기 매립장입니다. 하루에 쓰레기가 200톤 정도가 매립되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 살아가는 3천 명 정도의 주민들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재활용품을 모으거나, 버려진 음식을 먹으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거리에서 벌어진 싸움을 보고 말리던 도중, 다리에 총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총을 쏜 사람이 브라질의 부자여서, 그 보상금으로 식구들 모두가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후 20대 후반부터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되고,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자기가 자라났던 지옥 같았던 고향 ‘자딤 그라마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섯 명을 설득해서 사진을 찍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18세의 ‘술렘’이라는 소녀입니다. 이 아이는 벌써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7세 때부터 매립지에서 일해온 아이였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이시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알코올과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줌비’라고 하는 사람은 매립지에서 보이는 책이란 책은 모두 읽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네 번째 ‘이마르’라고 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버린 음식물들을 모아서 큰솥에 끓여서 그 요리를 사람들에게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번째 ‘티아오’라는 사람은 매립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조합(組合)을 만든 사람입니다.

‘빅 뮤니츠’는 다섯 사람을 모아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찍은 사진을 농구장 크기만큼 확대합니다. 그리고 확대한 사진을 바닥에 놓고, 사람들의 얼굴을 쓰레기로 꾸밉니다. 병뚜껑으로 눈썹을 만들고, 종이 상자로 턱을 그리고, 고무타이어가 그림자 부분이 되면서 차츰 쓰레기 속에서 사람의 얼굴이 만들어집니다. 작업을 마친 후 9미터 상공(上空)에 올라가서 바닥에 쓰레기로 만든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찍은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브라질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구경한 사진 전시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진 작품을 판매해서 얻은 수익은 모두 자신의 고향 마을에 기부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빅 뮤니츠’에게 “왜 이런 작품 활동을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그는 “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쓰레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세 가지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비록 당신의 인생이 쓰레기 같은 인생일지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둘째, 당신들에게 사라진 웃음을 되찾아주고 싶습니다. 마지막 셋째, 당신들의 모습을 쓰레기로 장식했지만, 그 작품은 대단히 가치 있게 평가되었습니다. 이처럼 당신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마치 쓰레기와 같이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삶에 기쁨이 없고, 웃을 이유가 없다고 절망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선물, 은혜』라는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목사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런 구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잠시 가만히 앉아 있어 보렴. 너의 쓰레기 더미로 내가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을 잘 지켜보렴. 대신 네가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무조건 믿으렴. 찰거머리처럼 내가 너에게 준 모든 약속과 소망을 단단히 붙잡고 놓치지 말아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약속을 붙잡는 자를 절망의 자리에서 웃게 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약속해 주셨지만, 그 약속을 처음에는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비웃음을 진짜 웃음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창세기 21장 6절에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본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이삭을 25년 만에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주시며, 그들을 절망 가운데에서 웃게 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결코 우리의 판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비웃음이나 포기함으로 반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 나그네들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18장 1절은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나그네들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使者)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극진하게 대접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은 뒤에 나그네가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장막을 세워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막 여러 개를 붙여서 일정한 거주지를 구성합니다. 우선, 집안의 가장(家長)이 거주하는 장막이 가장 크고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그 장막에 이어서 부인의 장막을 바로 곁에 세웁니다. 그다음으로 둘째 부인이나, 아이들이 거주하는 장막을 세워서 연결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장막에서 대화하는 소리를 바로 옆 장막에서 사라가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 사라의 나이는 89세입니다. 이미 사라 자신은 여성의 기능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장막 문 뒤에서 듣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나그네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사라의 반응은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헛웃음을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24년 전에 약속하시기는 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幾微)가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남편 아브라함은 늙어 버렸습니다. 자신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라는 스스로 나그네의 말을 판단하여 비웃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나그네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창 18:1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헛웃음일 때가 많습니다. 완전한 절망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희망의 약속을 주셔도,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내 주인이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알면서도, 절망과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면 자포자기(自暴自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나 주위 성도들이 ‘지금은 힘드셔도 견디시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격려해도 헛웃음을 짓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셔도 깨닫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사라도 그랬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임신이 불가능한 처지입니다. 이미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24년 동안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상황은 점점 나빠집니다. 기도하면 조금 나아지고, 믿음으로 살면 조금씩 회복되는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가운데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비웃으며, 낙심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비웃으며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14절에 나타납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바꿀 수 있다면, 생각의 채널도 바꿀 수 있다’는 문구(文句)가 있습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의 채널은 마음껏 바꿉니다. 재미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슬픈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 방송을 통해 온종일 찬양과 말씀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 채널이 늘 우울하거나 낙심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면 그 생각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빨리 생각의 채널을 전환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라는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은 사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브리서에는 이 사건 이후 사라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히 11:11)

처음 나그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약속을 믿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사라의 믿음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이가 많아 단산(斷産) 한 사라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바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미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피스톤’(πιστὸν)인데, ‘신실하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사라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잉태할 힘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라는 생각의 채널을 절망과 낙심에서 믿음과 신뢰로 바꾸었습니다. 성경학자인 ‘모리스’(Lo Morris)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부부 관계를 할 수 있었다. 희망이 힘이 되기 시작하는 것은 모든 것이 절망일 때뿐이다. 우리에게 절망이 있으므로, 비로소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소망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결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2010년 8월 6일, 칠레 산호세 광산이 붕괴해서 31명의 광부와 운전수 1명, 조수 1명 등 총 33명이 갱도(坑道)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하 700m 아래에 갇힌 지 보름이 지나자, 세상 사람들은 광부들이 모두 사망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17일째가 되던 날, 구조대가 갱도 아래 내려보낸 줄에 종이가 매달려서 올라옵니다. 그 종이에는 ‘33명이 대피소에서 아직 살아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구출 작전이 시작됩니다.

칠레 정부는 33명의 광부를 구출하기 위해 약 250억 원을 투입했습니다. 드디어 2010년 10월 24일, 69일 만에 모두 구출됩니다. 구조된 후 사람들이 “당신들이 69일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절망이 찾아오면 희망의 끈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붙잡는 희망의 끈은 참된 희망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권력, 건강, 자식을 희망의 끈으로 붙잡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참된 희망의 끈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21장 1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6절에도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의 가까이에서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의 가까이에서 행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분이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들, 또 내 인생에 문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사라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아브라함 가까이에 계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 바티칸(Vatican City)에는 ‘시스테인 성당’(Sistine Chapel)이 있습니다. 이 성당의 천장에는 세계적인 예술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Buonarroti)의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묘사한 부분을 보시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아담은 여유롭고 편안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향해 힘을 다해 다가오시려는 모습입니다. 온 힘을 다해 아담을 찾아오시고, 도와주려고 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절망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먼저 찾아와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깨달은 성도들은 더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려움과 형편을 모두 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곁에 지금도 가까이 계심을 믿습니다. 이것을 경험하면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도,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하나님의 타이밍(Timing)에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창세기 21장 3절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 ‘이삭’을 볼 때마다 비웃음을 웃음으로 바꿔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엄청난 기쁨 속에 마음껏 웃을 수 있게 됩니다. 헛웃음과 비웃음을 기쁨과 감격의 웃음으로 바꿔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6절에는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하면서 사라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느낄 수 있습니다. 사라의 표정은 감격과 환희가 가득한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체험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매우 기뻐합니다. 8절에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남은 인생, 매일 이삭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통해 주위 사람들까지 웃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타이밍’,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때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원하는 타이밍을 정해놓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에 맞춰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 계획대로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으면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포기해버립니다.

오스 힐먼(Os Hillman)의 『하나님의 타이밍』이라는 책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 가지 영적 단계가 있다’고 소개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편의’입니다. 내가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찾아가는 편의점처럼,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위기’입니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즉, 급할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확신’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는 단계입니다. 계속해서 이 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내가 가진 잔고(殘高)가 ‘0’이 될 때 시작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할 때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웃게 해주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얼굴에서 절망과 헛웃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웃음이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는 능하지 못한 일이 없으십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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