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예배 3주차

* 설교자 :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 페이지 : 232-242

* 본문:

빌립보서 2장 25-30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름은 부모님이 붙여주시지만, 이름 앞의 형용사는 자기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이름이 있고 그 사람 앞에 따라다니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이름 두 자는 자기 부모님이 붙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그 앞에 붙는 형용사는 평생 자신의 삶으로 붙게 하는 것입니다.

‘의심 많은-도마’, ‘배신자-가룟 유다’, ‘수제자-베드로’, ‘사랑의 사도-요한’, 이처럼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느냐?’는 앞에 붙는 형용사에 다 드러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참 긴장합니다. ‘내가 얼마나 멋진 이름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어떤 멋진 형용사를 가지는가가 내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구나!’

교회 안에서 집사님이 되고, 권사님, 장로님, 목자가 되고, 교사가 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은 주어지는 것이어서 무슨 직분을 받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직분 앞에 붙은 형용사입니다. 왜냐하면 이 형용사는 여러분의 섬김으로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직분자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사님과 권사님 이름 앞에 모든 직분을 멋지게 살아내어 “그분 참 정직했는데, 사랑이 많았는데, 믿음이 신실했는데…” 하는 형용사가 붙어야 합니다. 직분은 교회에서 주지만, 형용사는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후세들은 여러분의 이름 앞에 여러분이 좋아하든, 아니든 형용사를 붙여서 여러분을 평가할 것입니다. 축원하기는 여러분 이름 앞에 붙은 형용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용사로 만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온 세상 성도들이 다 닮아야 할 멋진 한 명의 일꾼이 나옵니다. 그분의 이름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런데 이 에바브로디도 앞에 본문을 주해하면서 형용사를 붙여보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 앞에 붙이면 가장 어울리는 형용사 그것은 바로 ‘존경받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러면 이 에바브로디도가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빌립보교회는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에바브로디도를 평신도 사역자로 파송하여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게 했습니다. 바울의 형편을 잘 살펴 돌봐주라는 명령을 받고 온 파송 선교사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에바브로디도에게 주어진 이 사명은 자기 인생을 다 걸만한 대단한 사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인생이 자기의 생명을 걸고 감당하기에는 너무 작은 사명이라고 해도 될 수준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 많고 많습니다. 이 정도를 훨씬 능가하는 엄청 큰 사명을 받은 사람도 세상에 넘쳐 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에바브로디도를 놓치지 않고 이토록 한 사람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그의 섬김을 이토록 자세히 기록하며 칭찬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무슨 사명을 받았느냐?’ 보다 ‘그 사명을 어떤 자세로 감당했느냐?’가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성경에서 이토록 칭찬을 받은 것은 그의 사명의 종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명의 자세를 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명을 받을 때도 있고, 내 격에 맞는 사명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떨어지는 사명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사명을 어떤 자세와 가짐으로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칭찬이 따라오더라는 것입니다. “사명은 종류가 아니라 태도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감옥에 있는 바울의 쓸 것을 도우라’라는 간단한 듯 보여도 간단하지 않은 명령을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자세로 감당을 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의 영적 허리띠를 매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사명에 대한 자세는 25절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빌 2:25)

25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자세로 사명을 감당했는지에 대해서 네 가지 역할로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나의 형제요”라고 이야기합니다. 둘째, “그는 나와 함께 수고한 자요” 셋째, “그는 나와 함께 군사 된 자요” 넷째,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형제로 동역했다고 했습니다.

형제로 동역했다고 하는데 에바브로디도가 로마 감옥에 파송 받아 바울의 사역을 도울 때 남이 아니라 친형제처럼 도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의 형제여”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라는 일차적인 뜻이 있지만,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여”라고 한 것은 그가 친형제처럼 진실되게 자기 일처럼 잘 감당해 주었기 때문에 그는 나의 진짜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다 보면 남의 일을 남처럼 돕는 사람이 있고,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 일을 내 일처럼 해주는 사람은 매력 만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작은 사역이지만 자기 일처럼, 자기 친형제의 일처럼 바울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도우라’라는 사명을 받고 왔기 때문에 허드렛일을 했을 것입니다. 밥을 가져다주는 일, 빨래를 해주는 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일, 바울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의사를 부르는 일, 추울 때는 두꺼운 옷을 챙겨주는 일처럼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일들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하찮은 일을 하찮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에게 하는 것처럼 진실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강 건너 남의 일처럼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바브로디도처럼 남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것처럼 돌봤기 때문에 바울이 나의 형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내 교회에 다니는 것처럼 다니는 성도가 있고, 남의 교회 다니듯 다니는 성도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남의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처럼 드리는 성도가 있고 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같이 드리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 교회가 여러분의 교회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교회입니까? 내 교회는 ‘이 교회’, ‘이 목사님’이 아니라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 교회와 여러분은 형제, 자매가 됩니다. 이게 에바브로디도의 모습이었습니다.

두 번째, 에바브로디도를 향한 바울의 평가는 “나와 함께 수고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평가할 때 “그는 나의 형제요”라고 멈춘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수고한 자요”라고 말합니다. 수고한 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마땅히 성도는 수고하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수고한다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수고란 주의 일을 하면서 함께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땀을 흘려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우나 가서 흘리는 땀 냄새나 축구 하면서 부딪혀서 나는 땀 냄새 말고, 사역하다가 흘리는 땀 냄새를 맡아본 사이는 진정한 복음으로 함께 수고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향기로운 땀 냄새는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 냄새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면서 흘리는 땀 냄새로 프랑스제 향수보다 더 향기롭습니다. 다른 성도와 함께 같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니, 얼마나 동역자 의식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에바브로디도와 바울은 서로, 복음으로 수고하여 땀을 흘리는 동역자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할 수 없이 파송 받아 흉내만 내는 일꾼이 아니라, 바울을 위해 땀을 흘리면서 수고한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주의 일은 구경할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함께 참여할 때 일어납니다. 교회를 위해 여러분의 땀을 아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현장에서 서로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세 번째, 그는 나와 함께 군사 된 자라고 말합니다.

땀을 흘리는 단계를 넘어서, 군사 된 자는 목숨을 내어놓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군사 된 자의 뜻이 무엇입니까? 전쟁에 나가서 함께 싸우는, 서로의 목숨을 담보하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의 목숨을 나눈 사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 읽어드린 시처럼, 꺼져가는 배에서 구명조끼 서로 양보하며 “당신만은 제발 살아다오” 하는 그런 관계가 된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러한 사람을 가졌냐고 물으면, 가졌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2인 1조가 되어 한 명이 엄호하고 그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또 다른 사람이 엄호하면서 서로의 목숨을 맡기듯이, 둘은 그러한 관계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역자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나요?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은, 함께 군사 된 자로 섬긴 것입니다. 마땅히 성도는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자세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동역자를 위해서 자신의 구명조끼를 내어줄 수 있는 관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욕심을 부려보자면 여러분이 저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 관계가 되길 기대하고 물론 저 또한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그러한 마음으로 목회해야 합니다. 본문의 30절은 바울 곁에 있는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몸 바쳐 사역했는지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 2:30)

에바브로디도는 할 수 없이 주어진 직분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와서 최소한 또는 최선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바치는, 최선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사역을 감당하더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라고 말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사역은 함께 군사 된 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형제를 넘어, 수고한 자의 자리를 넘어, 함께 군사 된 자리를 넘어, 바울의 필요를 정확히 알고 그 쓸 것을 돕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동역자는 상대방의 필요를 정확히 알고, 그 필요를 그때그때 채워줄 수 있는 센스를 가진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런 동역자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역을 해보니, 성도님들 중에도, “목사님,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하는 성도님이 있습니다. 반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리 알고 말하기도 전에 채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영적 센스가 있는 분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이것저것 필요를 말하기 전에 영적 센스를 가지고 바울의 필요를 살펴, 그것을 도울 수 있는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바울 곁의 에바브로디도는 참으로 귀한 동역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에바브로디도가 작은 일에 얼마나 사역을 열심히 했던지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감기 정도가 아니라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넘어선 사역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죽을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제일 먼저 불렀 을 노래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오”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어떻게 된 사람인지 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바울 선생님 절대로 제가 병이 걸렸다는 소식을 우리 교회에 전하지 말아주십시오. 성도들 걱정하는 것이 제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제발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자기를 걱정해도 될 시간조차도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자기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는 성도가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빌 2:26)

근심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의 병 때문에 맡은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할까 봐, 오히려 힘을 더 내서 더 열심히 합니다.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믿고 보내준 빌립보교회가 마음 아파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병을 숨기면서까지, 더욱더 충성 봉사를 합니다. 미국의 책 제목 중에 『Too Busy, Not to Pray』라는 책이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책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파서 봉사를 못하는데, 에바브로디도는 아프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합니다. ‘내 생명이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데 아프니까 내가 힘을 다해 봉사하겠습니다’라는 기록이 30절에 나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 2:30)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죽이시겠습니까? 우리는 사명을 받아도 일이 생기면 ‘여기서 멈춰야 할 때인가 보다, 여기까지인가 보다’하고 사명을 내려놓을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하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안 보시겠습니까?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이미 생명의 시계를 맞춰놓으셨더라도 에바브로디도의 생명시계를 되돌려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 시계를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27절입니다.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으니라” (빌 2:27)

저는 이 중에,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일꾼으로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분이 있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줄 믿습니다.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에게는 주께서 긍휼을 베풀어 치료해 주십니다. 이런 일이, 지금 이곳의 병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병에 걸렸으나 사명 감당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시간이 얼마 없으니 그동안 최선을 다해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의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이 되어, 치료를 받고 살아났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이렇게 살아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냅니다. 바울은 혹시나 빌립보교회에 충성스러운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가 병에 걸려 사명을 다 마치지 못하고 되돌아온 줄로 착각하고, 그를 불성실한 일꾼으로 오해를 할까봐 빌립보서를 들려 보냅니다.

서신을 통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완치되었다고 말해주며, 그가 언제나 나의 형제가 되었고, 땀을 흘렸고,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하다 중병까지 걸렸고, 그것을 숨기면서까지 사명을 감당했노라고 말하면서 이런 성도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에 갈 때 저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하게 대해주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28-29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빌 2:28-29)

성실한 일꾼은 하나님께서 곤란 중에도 건져내 주시고, 환란 중에서 지켜주시고, 병중에서 고치시고, 성도들 가운데서 존귀하게 높여 주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존귀한 자리에 서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수고한 일꾼의 수고를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천국에서 갚으시든지, 이 땅에서 갚으시든지 그 수고는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사람은 챙겨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챙겨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일꾼은 하나님께서 직접 챙겨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울 같은 지도자에게도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성도들 모두에게도 박수받고 존경받는 일꾼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하나님께서는 에바브도디도의 이 헌신적인 수고를 다 보고 계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을 돌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돌보신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니, 그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니,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의 일을 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 충성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그 수고를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내 일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1년 동안 주님과 우리 교회를 위해 힘에 지나도록 수고한 그 수고를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칭찬하시고,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푸사 병에서 건지시고, 근심을 덜어주시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박수와 존귀함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주를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은 절대로 땅에 떨어져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에바브로디도처럼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귀히 여김 받는 일꾼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이름 앞에는 어떠한 형용사가 아름답게 빚어져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이름은 하루 만에 지어져도 형용사는 인생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하루 여러분이 갖고 싶은 형용사를 마음에 품고 평생 그 형용사를 놓치지 말고 멋지게 만들어가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이름 석 자를 내밀기보다는, 형용사를 하나님 앞에 드려 큰 칭찬 받을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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