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예배 1주차

* 설교자 :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 페이지 : 208-218

* 본문:

빌립보서 2장 12-18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 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위 본문에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한 문장을 만나게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왜 당황스럽다고 제가 표현하느냐면, 이미 너무 잘 믿고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틀림없이 이미 구원을 얻었는데 바울은 왜 다시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고 하는 것일까요?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데, 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모든 기능이 전적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이 계신 세상에 이르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천국이 될 수 없고, 노력으로 만날 수 있는 신이라면 더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상 힘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아가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계시’와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총으로 먼저 찾아오셔서 택해주셨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고,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셨고,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의롭다고 칭한다’고 해서 ‘칭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다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

고 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고 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다음부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성화(거룩한 삶) 구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는 구원받는 것을 다시 태어나는 출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새 생명으로 태어날 때, 완전한 어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기가 인지 기능이나 신체발달이 미숙하다고 해도, 그 아이는 완전한 한 인격체이고, 완전한 인간이듯이, 태어난 지 1시간 된

아기와 100년을 산 노인의 가치는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 사랑이가 302g으로 태어났지만, 완전한 인간이듯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기가 태어난 그 상태로 평생 살도록 놔둬서는 안 됩니다. 자랄수록, 성숙할수록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도 태어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 일도 못하지만, 자라면 자랄수록 더 많은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바울은 이미 구원받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도 그들을 향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빌립보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는 전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미 신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루라’라는 헬라어 ‘카테르가제스데’는 현재 시제로 머물러 있지 않고 ‘지속적인 진행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구원은 구원받은 그날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구원이 진행되면서 믿음이 자라나야 진짜 믿음이고, 그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나, 변화의 노력과 몸부림 없이 앉아서 “나는 몇 월 며칠에 진짜로 예수님을 믿었다. 그것을 의심하면 안 된다. 그 믿은 날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구원파입니다. 구원파는 언제 구원받았는지만 분명히 알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더는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회개도 크게 뉘우치고, 자복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개념이 아니라,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란 것을 깨닫는, 마치 득도와 같은 개념으로 가르칩니다. 그날을 기억하는 것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지,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증거 도구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성화가 결여되어 있고 육신적인 거룩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죄까지도 믿는 날에 용서를 받았으니 말이죠. 그래서 구원파를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다고 믿었던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영지주의의 현대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교회 안에 이런 사상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그날만을 강조하는 칭의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성화를 전혀 강조하지 않는 사상 때문에 한국 기독교가 칭의에 머물러 있는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성화를 강조하지 않고, 거룩에 대한 노력이 없어지면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다든지, 심지어 믿는 사람들이 더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칭의로 구원받았다면 평생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칭의는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고, 성화는 우리가 하는 것이냐?”라고 물으면, 그것도 아닙니다. 성화의 과정도 우리 안에서 힘주시고 능력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12절 말씀 바로 뒤에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이 13절에도 중요한 접속사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가르’라고 하는 단어가 원문에 있습니다. 그 뜻은 ‘왜냐하면’입니다. 그렇다면, 12-13절은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왜냐하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즉, 그 성화의 구원도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성화에서도 ‘칭의’처럼 인간이 할 일은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절반, 하나님께서 절반을 하시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신인협동설이 되어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화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은 어떻게 구분될까요?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한 사람의 이야기로 쉽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사망의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구덩이 안으로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이 그분의 손을 잡을 힘조차 없자, 우리의 팔목을 전적으로 잡으시고 그분의 힘만으로 우리를 건져 내셨습니다. 그래서 구덩이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칭의 구

원’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걸어가게 됩니다. ‘성화의 과정’이죠. 그런데 구덩이에서 건짐 받게 된 인간은 하나님과 손을 잡고, 어깨동무하고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손잡고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등에 업혀서 걷는 것입니다. 구덩이에 빠져 모든 힘을 상실한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시고, 그 연약한 영혼을 하나님이 업고 영화로운 구원의 그 지점까지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 몫, ‘성화’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 둘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구원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실 것입니다. 단지, 이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등에 업혀서 갈 때 인간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등에 업혀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순종하면서 가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길과 다른 방향인 것 같아도, 등을 때리면서 이 길이 아니라고 발길질을 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등을 꼬집어도 안 됩니다. 업고 가시는 그 길이 강을 건널 때도 있고, 높은 다리를 건널 때도 있고, 험산 준령을 지날 때가 있어도, 하나님의 등에 업혀 묵묵히 그분의 걸음을 신뢰하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무서운 강을 만나면 내려달라고 발버둥 치거나, “나를 왜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오셨나?”라며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등에 바짝 붙어있어야 합니다. 무서울수록,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하나님의 등판에 더욱 밀착하고 절대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살길이자, 우리가 유일하게 해야 할 일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계곡을 지나든지, 깊은 강을 지나가든지, 벼랑과 벼랑 사이에 놓인 밧줄 위를 지나가든지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거나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신뢰하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등에 업혀서 신앙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사항이 있는데, 바로 “원망과 시비가 없이 걸어가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 2:14)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잘잘못을 따지는 시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여전히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원망’과 ‘시비’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했던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을 ‘칭의 구원’에 비유할 수 있고, 40년 광야 생활을 ‘성화 구원’에 비유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영화 구원’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0년 성화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원망과 시비’였습니다. ‘원망과 시비’ 때문에 한 달 만에도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길을 40년이나 돌아간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왜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나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후에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떠나고, 자기들이 광야를 헤쳐서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원망과 시비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입니다. 또한, 설령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해도, 그들을 고생시키려고 데리고 나왔다고 생각했지, 더 좋은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 광야를 모두 지나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했다면 원망과 시비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나중에 모세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지난 40년을 회고하면서 고백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 1:31)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 광야의 이야기를 상기시키면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이여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에 이유를 모르는 일들이 여러분에게 닥치고, 원하지 않는 길로 가는 것 같고, 생각보다 뜻하는 바가 더디 이루어지고, 너무 힘에 겨워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와서 믿음에서 떠나고 싶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순간이라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지금 그 사람이 당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섣불리 원망하거나 이 길이 맞다, 틀렸다고 시비를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성화의 그 길을 믿음 하나로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믿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그 손에 온전히 맡긴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이유는 모릅니다. 왜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고통의 마라톤이 시작되었는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금같이 만드시려고 그러니 참으라고 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왜 나를 빚어 만드시는지, 도대체 나같은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쓰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통 가운데 몰 아넣어 연단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지요. 나는 정금이 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그냥 평범하게 남들만큼만 살아도 좋겠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순금같이 만들려고 원하지도 않은 풀무 연단을 시키는지 알 수 없지요. 그러나 내 그런 감정하고는 상관없이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아시는, 기뻐하시는 그 뜻을 가지고 내 마음 안 에서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결과가 무엇인지, 그 큰 뜻이 무엇인지 다 몰라도 마음속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그 걸음을 걸으라고 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작정하시고 부르시고, 업고 그 길을 걸어가시는 이유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빛나는 인생을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 2:15)

우리가 힘겹고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등에 업혀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그 모습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공해서야 드디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중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등에 바짝 업혀서 어두운 밤 계곡을 지나가는 그 모습이, 비치는 빛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이 20대 중반에 사고로 먼저 죽게 되었을 때, 그 고통과 원망의 순간에도, 아무 흔들림 없이 교회를 묵묵히 나오시던 권사님은 화려한 성공의 빛을 비추는 분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꺼질 듯한 아슬아슬한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걸어가는 그 초라한 빛 하나 때문에, 자식 때문에 속상해하던 많은 부모도 마음이 상해서 주를 떠나는 일이 없고, 그 권사님처럼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더군요. 화려하지 않고 초라한 인생이라도 묵묵히 주님께 업혀 걸어만 가도 빛이 비치는 인생이 있습니다.

저의 친한 친구 목사님이 큰 집회에서 설교했습니다. 제목이 ‘누더기가 된 인생에 은혜를 담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친구 목사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우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살기 위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집보다 교회가 좋아 교회에서 살다가 믿음이 좋아졌고, 신학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에 개척교회를 시작했으나 교회는 부흥 성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버티다가 부임한 교회의 지하 사택에 비가 오면 홍수가 나서 밤새 물을 퍼 날라야 했습니다. 화장실이 없어 요강에 소변을 받아서 버려야 하는 삶에, 하나님께서는 야속하리만치 성공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는 고백을 담담히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 목사님의 설교 마지막 부분이 깊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렇게 고생했더니 성공했더라’라는 설교만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그렇게 단 한 번도 반전이나 성공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셔도, 그 하나님이 좋아서 그 길을 떠나지 않는 모습도 가장 영광스럽게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등에 업혀 반짝반짝 빛나는 성공의 상징인 맨해튼 한가운데를 걷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주님의 등에 업혀 험한 산 준령을 건너가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빛이 아니라 우리를 업고 걸어가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빛이기에, 그 누구라도 주님과 함께 걷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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