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고등부 설교

* 설교자 : 강주혜 목사 안산동산고등학교 교목

* 페이지 : 364-373

*본문 :

요나 2장 1절–9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서를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뭐, 이런 선지자가 다 있지?” 싶을 정도로 그가 다른 성경의 인물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확연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우리는 요나서를 보면서 ‘본받지 말아야 할’ 혹은 ‘천벌을 받은’ 또는 ‘불순종의 선지자’라는 평가를 내리고 더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요나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나서 1장을 펴보시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요나서’는 누가 쓴 글일까요? 분명 3인칭의 형태로 주인공을 ‘요나’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사건의 대부분은 요나만이 알 수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자 도망을 간 일, 고래 뱃속에서 들어가 살아남은 일 등은 요나만이 알 수 있을 정보입니다.

만약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누군가가 기록하였다고 해도, 결국 이 내용은 요나가 쓴 글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요나서’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요? 요나서는 자신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우리들에게 자신의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더불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자신을 통해 더 드러나길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자신의 업적이나 혹은 칭찬받을 점에 대해 쓰기보다는 오로지 하나님이 영광받으실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4장 마지막 절에 가보시면, 투덜거리며 불평하는 요나 앞에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질문을 던지시고 끝이 납니다. 왜 요나는 그다음의 일을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의 질문에서 끝을 낼까요? 그 질문이 요나서를 읽고 있는 우리에게 와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고, 요나가 이렇게 멋있게 행동했구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나서를 통해 지금 내게 이런 질문을 하고 계시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도록 요나는 독자들을 위해 그 지점에 마침표를 찍어놓았습니다.

이렇듯, 요나는 참으로 멋진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철없고,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지라도, 결국엔 간절함으로 자신의 이야길 사람들에게 해주었고, 진심으로 우리가 변화되고 깨닫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나 선지자를 존경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요나를 좀 더 세밀하게 파헤치고, 또 인정사정없이 쪼개어 우리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나와 같은 심성이 우리와 얼마나 크게 닮아있는지를 대입해볼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요나는 유아기적인 신앙을 가진 인간의 표본입니다. 이름부터 그 사실을 확실히 하고 있는데,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이 비둘기가 상징하는 바는 모두들 아시다시피 ‘성령님’, ‘평화’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구약에서는 약간 그 의미가 다르게 쓰입니다. 호세아서 7장 11절에는 비둘기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이와 같이 비둘기는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것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요나서’에서 보여주는 ‘요나’는 이런 부정적인 의미를 상징합니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다는 것은 곧, 유아기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뜻과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유아기적 신앙이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요나는 어떤 부분에서 유아기적 신앙을 나타내고 있는지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둡니다.

요나서 1장 2절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의 악함을 외치고, 심판이 다가왔음을 외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만으로 니느웨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탑니다.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무엇 원하시는가?’이지 않고, ‘내가 이걸 하고 싶은가?’라는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의 기로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나”를 생각합니다. ‘내가 이걸 하고 싶은가?’라는 생각을 거친 후에, 우리 주변을 생각합니다. ‘내 주변은 내가 이걸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를 한참 또 생각합니다. 이 두 질문은 순서가 바뀔 수도 있지만,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야 “하나님은 어떠세요?”라고 물어보며 거의 종용하듯 밀어붙입니다. “하나님도 괜찮으시죠? 제가 좋으면 좋으시죠?”라는 말로 자기 임의로 얼렁뚱땅 판결을 내립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유아기적 신앙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두 번째, 지식과 행동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요나서 1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반대편으로 가는 다시스 행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요동치며 다시스 행 배 선원들이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별별 짓을 해도 바다가 고요해지지 않자, 선원들은 자신들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제비뽑기를 하여 이 재앙의 원인이 누구인지를 가늠하기로 하였습니다.

요나는 그 당시 배 밑에서 자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지만, 제비뽑기는 우연을 가장할 수 없을 정도의 결과로 요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요나를 깨워 “당신이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하는 대답을 유심히 보시면 좋겠습니다. 9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이 대답이 얼마나 모순되고 어이없는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욘 2:9)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대답이 얼마나 모순되고 어이없는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을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미에 자신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특히, 이 모순의 정점은 그가 ‘바다 위’를 건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는 수단으로 배를 선택하여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선원들에게 하나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피해 바다를 건너는 꼴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이렇듯, 유아기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행동이 완전히 분리되어 따로 놉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순간조차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로 행동은 철저히 비신앙적이고 욕망이 가득하지만, 주변인들에게는 독실한 신앙인처럼 말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말을 믿으며 자신이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 번째, 나를 위한 하나님이 되길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가까스로 살아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돌아가 하나님이 전하신 심판의 말씀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대언합니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 나라의 왕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니느웨 성읍은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그러자 요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3)

하나님이 말을 번복하셔서 짜증과 화가 나서 못 견디겠으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평은 뒷부분에 또 나옵니다. 하나님이 뒤늦게 심판을 내리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요나는 성읍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니느웨가 멸망하길 기다리면서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주는 박넝쿨 밑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박넝쿨이 벌레에 의해 없어지게 되고, 뜨거운 태양이 그대로 요나를 내리쬐자, 요나가 다시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욘 4:8)

요나는 “이럴 바엔 죽여달라”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습니다. 심지어 그늘이 없어져 더울 때도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상당한 불평불만의 소유자입니다.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자 자신이 심판할 것을 예언했다는 자존심에 금이 갔다며 하나님께 성을 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요나는 철저히 자신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자신에게 좋으면 좋으신 하나님이

며, 자신에게 나쁘면 나쁘신 하나님입니다. 아이들이 엄마가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이럴 거면 왜 낳았어!”라고 따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모님의 존재 이유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고, 비싼 옷을 사주지 않으면 잘못된 부모라는 의미가 포함되 어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께 너무나 쉽게 불평을 내뱉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달라졌다고 해서, 또한 공짜로 얻는 기회가 날아갔다고 해서 “하나님 대체 제게 왜 이러세요? 저 미워하세요? 이럴 바엔 그냥 죽여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유아기적인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네 번째, 자신과 관련이 있는 대상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유아기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을 ‘자신’으로 둡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관심이나 긍휼함을 갖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물이라도 자신에게 상관이 있다면, 집착하며 소유하고자 합니다.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요나는 하나님께 성을 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1-2)

요나가 왜 다시스로 도망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미 요나는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지 않을 줄을, 고국에서부터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봐야 결국 하나님은 용서해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며 ‘그럴 바엔 가지 않겠다’라고 결정 내렸던 것입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은 무의미해 보였으며,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심판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게 못마땅해 보였습니다. ‘다 쓸어 죽어야 마땅한 인간들이, 왜 은혜를 입는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길 하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같은 사건 앞에 완전히 상반된 반응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 2:13)

하나님의 뜻을 대언했던 요엘 선지자는 진심으로 긍휼함을 느끼며 눈물로 심판을 예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자신과 관계없는 12만 명의 니느웨 사람들이 죽기를 바랄 정도로 무자비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에게 관계된 사물에 대해서는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볼까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사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욘 4:9)

요나는 자신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박넝쿨이 사라지자, 성을 내었으며,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는 하나님께 다시 “하나님이 저를 죽이신다고 해도 옳습니다!!”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만큼, 요나는 철저히 ‘자신과 무엇이 관계되어 있는가?’에 대한 여하에 따라서 판단하고, 감정을 쏟고,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유아기적 신앙인 것입니다.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상관없습니다. 슬프고, 아파해도 오히려 꼬숩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관계있는 대상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본다면 자신의 주인인 하나님께도 성을 정도로 막무가내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유아기적 신앙을 소유한 요나를 어떻게 가르치고 계실까요? 첫 번째, 하나님은 비유를 통해 요나를 가르치십니다. 요나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사랑하시며, 그 성읍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직접 요나가 체험하고,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요나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물고기 뱃속에서 건져 구원하신 사건을 통해 요나는 자애하게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께 순종하겠노라 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은 정말 많은 비유와 상징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그저 우연의 산물로 여러 사건을 겪은 걸로 알지만, 우리 삶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친구를 대하면서, 반려견을 키우면서,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학교생활을 하면서, 하늘을 보고, 자연을 보며 우리는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느끼며 회개하기도 또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다 유아기적인 신앙을 가진 우리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치는 두 번째 방법은, 물어보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여러 질문을 하십니다. 4장 4절을 보면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요나에게 그저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또 4장 9절에도, 하나님은 박넝쿨이 사라졌다며 성내는 요나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으냐?” 마지막 11절에도 물어보십니다. “니가 수고도 않고, 재배도 않은 박넝쿨을 이토록 아꼈는데, 내가 지었으며, 사랑한 사람과 가축들을 아끼지 않겠느냐?”

주님께서는 답을 바로 제시해주시기도 하지만, 질문을 하시기도 합니다. 특히, 요나와 같이 유아기적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는 질문 방식이 제격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질문을 받음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의 질문을 듣고 고민해보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이 필수적입니다.

요나가 이러쿵, 저러쿵 해도 늘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혹시 여기 계신 여러분 중에서 요나와 같이 유아기적 신앙을 가진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정말 아이처럼 생각하고, 바라보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비유와 체험으로 가르치시고, 질문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뜨거운 회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요나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다시 새롭게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언제나 인내하시고, 또 포기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강주혜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졸업
숭실대학교 기독대학원 상담학과(Th. M.)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종교교육학과(M. Ed.) 졸업
(現) 안산동산고등학교 교목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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