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장 8-11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세상에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미국을 떠나올 때 파송예배를 드리면서 아내와 제가 특송을 했었습니다. 그 특송을 준비하면서 아내와 제가 몇 번을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특송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 뵈올 때 착한 일꾼이라 칭찬받기 나 원하네” 주님께 칭찬받는 삶, 어쩌면 이것이 저희 부부의 인생 목적, 목회의 목적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아닌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서머나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 칭찬받은 두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놀라운 경쟁력을 뚫고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교회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복된 교회입니까. 예수님은 왜 서머나교회를 칭찬하셨을까요? 책망도 하나 없이 오롯이 칭찬만 하셨을까요?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모습을 보시면 칭찬을 하시는지, 예수님께서 어떤 교회를 응원하시고, 밀어주시고, 마음이 홀딱 빼앗겨 버리시는지,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워야 합니다.

8-11절에 나오는 서머나교회의 칭찬의 내용은 굵은 줄기에서는 딱 한가지입니다. 찬송가로 표현하자면 정확히 이렇습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입니다.

서머나교회에 세찬 시련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사단의 앞잡이, 마귀의 파송을 받은 자들이 성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나 아닌 자들로 인해 교회가 복음 사역에 극심한 훼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서머나교회를 밟아 죽이려고 작심한 듯 집중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단의 눈에 서머나교회가 살면 자기들의 나라에 큰 손해가 올 줄 미리 알고 조기 박멸하려는 듯 이 서머나교회 죽이기에 총동원되어 집중포화를 쏘아대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는 에베소교회의 북쪽으로 약 56킬로 지점에 있는 교회로써 에베소에 버금갈 정도로 발달된 지역입니다. B.C. 1000년에 헬라의 식민지로 건설이 된 곳으로 역사와 전통이 있으며 황제숭배가 강한 도시였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교회가 에베소교회에서 개척되어진 교회로 봅니다. 교회가 개척되고 건실하게 성장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지역에 유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토(Titus)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붕괴되고 멸망하게 됩니다. 헐번 사건이라고 흔히 불리는 사건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있던 유대인들이 온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고, 유대인들이 대거 서머나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서머나에 도착을 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회당을 만들어 구심점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보다 먼저 그곳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예전 예루살렘에서부터 눈에 가시처럼 보였던 교회(에클레시아)가 그곳에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극심히 싫어하는 로마와 손을 잡고 기독교를 이단과 사이비로 몰아서 핍박을 강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없는 기독교인들만 하는 성찬식을 로마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저들은 사람을 잡아서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들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저들은 모일 때마다 “이것은 사람의 피다…마셔라, 이것은 사람의 몸이다 먹어”라고 한다며 혐오 작전을 사용하고, 아무런 긍휼 없이 짐승처럼 잡아 죽여도 되는 사람으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기독교를 죽이는 방식으로 혐오 작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의 입장에서도 눈에 가시 같은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일 명분이 필요했는데 유대인들이 그런 명분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식인종을 죽이는데 무슨 긍휼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 유대인들과 로마가 손을 잡고 교회를 완전히 잔멸하기 위해 서머나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장면에 대한 설명이 9절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계 2:9)

서머나교회 안에 자칭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회당을 만들어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사단의 모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에 나오는 유대인은 사단의 모임이라고 부르고, 10절에 나오는 마귀는 로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유대인과 로마가 손을 잡은 것을 사단과 마귀가 손을 잡고 서머나교회를 집중 공격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머나교회의 고통과 시련은 설상가상의 고통입니다. 9절에 사단이 유대인을 통해서 서머나교회를 핍박한 과거와 현재진행형의 내용이라면, 10절은 마귀가 로마를 통해서 앞으로 핍박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련이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받고 있는 시련 위에 앞으로 더 큰 시련이 더해질 것이라는 설상가상의 절망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계 2:10b)

여기서 십일은 딱 열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특히 열, 백, 천 단위는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 숫자로써 로마에 의한 충분한 시간 동안 가해지는 핍박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야말로 서머나교회는 안으로는 동족의 핍박으로 극심한 고통이 현재 진행형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밖으로는 더 극심한 로마의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암울한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따라서 서머나교회에게 보낸 예수님의 편지는 핍박과 핍박의 중간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지금까지 잘 참아온 것을 칭찬하고 다가올 핍박을 잘 이겨내라고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칭찬은 완료형 칭찬이 아니라, 중간 점수로 보아야 합니다. 사단의 회당으로부터 받는 동족의 핍박에는 잘 이겨내었지만, 이제 로마로부터 오는 핍박도 너희들이 잘 이겨내야 한다는 당부가 들어있는 편지이며, 중간평가 점수는 A 플러스를 받았습니다.

서머나교회는 과연 앞으로 다가올 핍박도 잘 이겨낼 수 있을까요? 역사는 서머나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세기 초 활동했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에 의하면 서머나교회는 서머나교회 감독이었던 폴리캅 이후 감독교회로 건실하게 성장을 했다고 합니다. 역사적 증언을 토대로 보자면, 서머나교회는 로마의 핍박에도 이겨 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서머나교회는 이 고통과 연단과 시련과 환란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서머나교회가 칭찬받도록 잘한 일을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서머나교회는 환란과 핍박을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마귀는 서머나교회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기 위해서 가장 비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핍박을 예상 안 하고 믿은 사람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면 출세를 포기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 명예 포기하고, 가족도 친척도 포기하고 죽는 줄 알면서도 그 모든 것을 예수님과 맞바꾼 사람들입니다. 핍박이 올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쟁이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모르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핍박과 고난으로는 절대로 예수님과 멀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 고난과 핍박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더 주님께 가까이 가게 만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마귀는 다른 방법은 다 써도, 이 방법만큼은 절대로 피했을 것입니다.

C. S. 루이스(C. S. Luis)가 쓴 에 보면, 마귀 삼촌 스크루 테이프가 마귀 조카 웜우드에게 어떻게 크리스천에게서 믿음을 빼앗는지를 가르쳐 주는 31가지 방법이 담긴 책입니다. 거기에서 스쿠르 테이프와 웜우드에게 이런 조언을 합니다.

“네가 저 원수(그리스도인들)들을 원수의 앞잡이(그리스도)에게서 빼앗아오기 위해서 절대로 고난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마라. 그들은 고난이 올수록 그 원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용할 수 있다면 형통이라는 방법을 사용해라. 그 방법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마귀는 지금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방법을 그만 서머나교회에 사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고난과 환란이 올수록 더욱 믿음이 좋아진 것입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간 것입니다. 떨어지라고 한 일들이 오히려 그분과 더 가깝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고난으로 욥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려고 했던 마귀는 오히려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맙니다. 고난 전의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듣는 수준에 불과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보는 수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의 5절에서 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난을 지나온 자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가장 무서운 것은 고난이 아니라 형통입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을 통과하고 믿음이 더 좋아졌는데, 솔로몬은 형통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신비를 자칭 유대인들도, 로마도, 귀신도 마귀도 모르고 휘둘렀던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도, 거짓 유대인들도, 세상의 사람들도, 마귀도 귀신도 채찍으로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때릴 때, 그들이 예수를 버리고 배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채찍을 맞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리농사를 지어보셨습니까? 저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논에 나가서 보리농사를 지어보았습니다. 보리농사는 겨울에, 논농사는 여름에 한 논에 이모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겨울에 자라는 보리는 보리를 땅에 심고 소가 끄는 평평한 합판 위에 올라타고 가면 파놓은 고랑이 평평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곳에 파란 보리가 올라옵니다. 추운 겨울에 보리가 땅 위로 올라오니 얼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잔인하게도 그때 하는 것이 보리밟기입니다.

온 가족이 나가서 그 추운 땅을 뚫고 올라오는 기특한 보리는 오히려 지근지근 밟는 보리밟기를 합니다. 왜 보리밟기를 할까요? 민속 백과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보리밭이 얼어서 부풀어 오르거나 너무 따뜻하여 보리가 웃자라는 것을 막음으로써 보리의 성장을 돕는 일을 한다. 보리밟기는 보리의 성장 강화를 위해 하는 것이다. 보리밟기는 보리의 줄기잎에 상처를 주어 이때 생기는 상처로 수분의 증산이 많아지기 때문에 세포액 농도가 높아지고 생리적으로 내한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보리를 밟게 되면, 그 잎사귀가 상처를 받아서 수분이 나와서 그 수분이 보리의 생산량을 늘리고 병에도 안 걸리고 보리의 품질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보리밟기의 결과가 바로 황금보리밭입니다.

저는 이 보리밟기와 같은 것이 서머나교회에 행해진 핍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귀는 로마라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픈 채찍으로 서머나교회를 내리쳤지만, 오히려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그 로마가 때리고 밟으면 밟을수록 찬 겨울을 이겨내는 내성을 가지고, 그 채찍 때문에 수분이 흘러나왔습니다. 로마의 채찍이 만들어낸 수분은, 세 가지입니다. 땀, 눈물, 피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서머나교회는 이곳저곳으로 도망가며 땀을 흘렸고, 형제가 붙잡혀 가면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자기가 잡히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이 수분이 서머나교회를 키우는 수분이 된 것입니다. 그 땀과 눈물과 피가 서머나교회에 뿌려져 황금보리 같은 황금면류관 쓴 성도들로 가득한 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모르고 로마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가장 잔인한 채찍으로 때렸지만, 서머나교회는 그럴수록 주님을 더 강하게 붙잡고, 교회는 더 견고해졌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교회가 바로 서머나 교회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서머나 교회가 잘한 일은 환란 중에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예수님이 서머나교회에 편지를 보내실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앞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일곱 교회에 보내실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는 내용이 다 다릅니다. 그 교회의 형편에 맞게끔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본문 8절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서머나교회에게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계 2:8)

예수님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도가 들어있는 것입니까? 처음과 나중이라고 소개하신 이유는, 나 예수가 너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소개하신 이유는, 서머나 성도들아 너희가 죽을 만큼 환란을 당해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나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죽을 것 같은 모진 시련이 너희를 뒤덮을 때, 십자가에희를 죽이지 못할 것이요, 혹시 죽여도 죽은 것이 아니요. 너희 교회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핍박에 약해지지 말라.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희에게 주리라.’ 이 뜻으로 8절에 예수님이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라고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너희들이 앞으로 힘들 때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 예수를 보고 힘을 내라’는 뜻입니다. 나처럼 십자가를 진다면, 나처럼 부활도 할 것이다. 나의 부활이 너희의 부활이 될 것이다. 괴롭고 힘들 때 고개를 들어 나를 보라고 예수님이 서머나교회에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이 예수님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로마의 채찍을 바라보지 않고 눈을 들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 고난을 이겨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을 서머나 성도들도 믿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영광을 누리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핍박은 영광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괴롭고 힘들 때 무엇을 바라보느냐는 이토록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갈 때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을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어떻게 그 아픈 돌이 날아오는데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는 그 순간 날아오는 돌을 보지 않았고, 눈을 들어 보좌에 서계신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돌을 보았다면 돌이 무서웠겠지만, 돌 너머, 보좌에 계신 예수님께 시선을 맞추었더니 돌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난 중에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그 십자가 뒤에 따라올 영광을 바라볼 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면 십자가가 너무 무겁고, 힘들고, 버리고 싶지만, 이 십자가와 나중에 면류관을 바꿀 것을 알고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크기와 면류관의 크기가 비례한다는 이 비밀을 알았던 성경 속의 믿음의 조상들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부터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형 틀입니다. 언제든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을 각오로 따르라는 말입니다.

그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죽을만한 일을 만나거나 죽어도 좋을 일을 만나고 순교할 시간이 왔거든, 아무 미련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십자가를 땅에 박고 달려 죽으라는 뜻입니다. 연약한 초대교회를 그 막강한 로마도 감당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기독교인들은 등에 자기가 달려죽을 사형 틀을 짊어지고 예수를 따르는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이 믿음의 조상들은 이렇게 무겁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지고 갔던 것일까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잠시 후 생명의 면류관과 바꾸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서울대가 멀다고 불평하는 사람을 못 봤고, 다이아몬드가 무겁다고 불평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서울대는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고, 다이아반지는 아무리 무거워도 낄 수 있습니다. 성도가 십자가가 아무리 무거워도 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그 십자가가 나중에 바꿀 생명의 면류관과 맞바꾸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가 크면 면류관도 크기 때문에, 십자가가 무겁고 크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면류관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응원이 무엇입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b)

오늘 여러분 중에 사명을 감당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내려놓으려고 하는 분들 계십니까? 예수만 안 믿었더라면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과 환란과 시련을 당한 분들 계십니까? 눈을 들어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 길은 영광의 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여러분이 힘들게 지고 가는 그 십자가가 반드시 여러분을 살려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면 류관을 너에게 주리라. 그 십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과 맞바꾸어질 것이다.”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은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기쁘게 지고, 서머나교회 성도들처럼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다가 영광의 면류관을 다 받아 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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