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사건을 히브리인들의 신화정도로 여깁니다. 하지만 수메르시대의 ‘길가메쉬 서사시’를 비롯해 바벨론, 인도, 중국 심지어는 아메리카 인디언 기록 등 세계 곳곳에서 대홍수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노아의 홍수사건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기존의 지층과 홍수 기간 중 형성된 지층 간 차이를 나타내는 흔적들을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 전 기존의 지층과 홍수 이후의 지층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화석입니다.

홍수로 인하여 갑자기 한 순간에 수많은 생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공룡화석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기후 변화와 같은 자연 재해가 갑자기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한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설명하는 것을 보면 공룡이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와 엄청난 물의 양 때문에 죽어서 흙 속에 갇힌 것이 굳어져서 화석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갑작스러운 홍수에 의한 퇴적작용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증거들이 아니더라도 노아 홍수사건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어떠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은 하나님이 바라보았던 노아의 믿음에 대한 부분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 11:7)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일을 보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노아에게 있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던 노아를 향하여 “너는 이 시대의 사람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고, 미래를 볼 줄 아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이동연 씨의 『혼돈의 세상을 구한 CEO 노아』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노아는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혼돈의 시대면서 동시에 번성의 시대였습니다. 이때에 대중의 관심은 쾌락에만 쏠려있었습니다. 그들 나름의 철학과 종교와 윤리와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번영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종교지도자도 종교를 상품화했고, 인문학자들도 인문학을 수단화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 이후, 사람들의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홍수사건 전 600세, 700세, 900세의 수명을 누리던 사람들이 홍수 사건 이후로는 100세 전후로 수명이 줄어듭니다. 창조과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경은 40일 간 비가 내릴 때 하늘의 창이 열렸다고 말씀합니다. 이 창이 홍수시대 이전에 있었던 지구를 둘러싼 두꺼운 막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막 덕분에 사람들은 장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막을 없애신 후로 사람들에게 여러 문제가 생겨서 수명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은 아프지도 않고 수백 년 장수하니 쾌락과 번영만 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 없이 사는 인생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6장에 나타나듯이 ‘한탄’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한 모습을 보고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죄악이 땅끝까지 가득 찼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기로 뜻을 정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다가올 심판은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죄악된 삶을 살아갑니다. 단 한 사람, 노아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세상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보았습니다. 그는 아담의 10대 손이었습니다. 늘그막에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특출한 일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네가 평범하냐, 비범하냐’, ‘네가 대단한 일을 했느냐 안했느냐’, ‘네가 높은 자리에 있느냐 평범한 사람이냐’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은 ‘네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과 동행했느냐 안했느냐’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족보는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족보는 좀 다릅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은 에녹 다음에 갑자기 족보를 건너뛰어서 노아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 11:7)

노아가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상속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시는 믿음의 족보에는 에녹에서 곧바로 노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9-10절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똑같은 표현이 에녹에게서도 등장합니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결국 믿음의 족보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홍수 시대에 살았던 노아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1. 노아의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평범한 노아를 사용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노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세 가지입니다. ‘의인이다’, ‘당대에 완전한 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히브리서 11장 7절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날 일들을 보여주시며 경고해주셨고,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노아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의인이라는 말은 그가 죄를 짓지 않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아들인 함이 그 사실을 다른 형제에게 알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저주를 내립니다. 노아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안 짓는 사람이 의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연약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때로는 넘어지고, 연약하여 죄를 범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겨주십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노아는 의인이라 여김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은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당시 노아를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여겨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노아가 구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유흥과 그들의 쾌락에 젖어 번영의 삶을 쫓아갔을 때에 노아만큼은 세속화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완벽하게 죄짓지 않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연약하지만 세상 속에 나가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믿음을 지키는 그 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6절에 노아를 ‘완전한 자’라고 번역한 것보다 ‘성숙한 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노아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기는 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노아는 하나님 앞에 성숙한 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보면 성경은 성숙에 대한 단계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테크니아’(τεκνια)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아기의 단계입니다. 아기의 특징은 아주 원초적이라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떼를 쓰고, 배부르면 조용하고, 부족한 게 있으면 울고, 떼를 쓰는 아주 단순한 존재입니다. 동시에 아기는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파이디아’(παιδια)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단계입니다. 어린아이 중에는 유독 철이든 아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아무리 철이 들어도 아이의 모습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어느 문제에 부딪히면 어린아이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어른스러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문제에 부딪히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청년’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열정이 있습니다. 추진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믿음 속에는 고난을 거뜬히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은혜를 받으면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방 사그라지는 모습도 함께 보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요한일서 2장에서 말씀하는 ‘아비’의 단계입니다. 아비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버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절제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깊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절제와 신뢰, 용기, 깊이 있는 사랑이 있는 믿음의 단계를 성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란 문제의 근원에 대한 고민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저 내 눈 앞에 보이는 쾌락을 위해 먹고, 즐기고, 노는 것이 전부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앞서 말한 아기의 단계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속한 세상문제에 대한 통찰력이 있습니다. 노아는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노아는 항상 하나님과 심판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6-8)

우리말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셔서 홍수로 심판하시려 하는데, 노아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된 성경구절인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 뜻은 조금 다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노아는 여호와의 눈 안에서 은혜를 찾았다’이고, 두 번째는 ‘노아의 눈이 여호와의 은혜를 향해 있었다’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의 해석 중 후자가 좀 더 정확한 해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습니다. 그의 눈은 여호와를 향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모두 세상을 향해 있을 때, 노아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나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염두에 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을 동행하며 사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가져야할 핵심이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노아의 믿음은 시대와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명하신대로의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창 6:13-14)

그리고 15절과 16절, 21절에 이르기까지 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해주십니다. 그러나 방주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본적도 없고 만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믿음 하나만 붙들고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연장이 오늘날처럼 좋은 것도 아닙니다. 도와줄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배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15절을 보면 방주의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방주의 크기를 규빗이라는 단위로 설명합니다. ‘규빗’은 어른의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인 약 45cm에서 50cm를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법으로 따지면 방주의 길이는 135m, 폭은 22.5m, 높이는 13.5m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주의 규모가 9만 7,700㎡ 이니 축구장보다 조금 더 큰 면적이며, 들어가는 양으로 따지면 기차 522량 정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방주에 동물을 태우라고 명하셨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포유류는 3,500종, 조류가 8,600종, 양서류가 5,500종 등 모두 합치면 3만 6,200여 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주의 양은 12만 5,280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졌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완성 때에 대한 기약도 없이 방주를 120년 동안 만들었습니다. 어떤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고 ‘예’라고 대답하고 순종하며 시작하는 것 자체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 6장 22절에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는 말씀처럼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모든 것을 행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앙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의 순종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반응하여 순수하게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이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논리를 검증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반응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수하게 따르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현재 이스라엘 유대인들처럼 성경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오신 예수님은 믿지 않으면서 구약의 율법들만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명령은 등한시 한 채로 엉뚱한 것들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내 이성과 철학으로 계산하지 말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노아가 가진 믿음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에 대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손가락질 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홀로 외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방주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노아에게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120년의 시간이었습니다. 방주가 완성되었다고 노아의 기다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 7:11-12)

창세기 8장 3절에서 비가 그친 후에도 물이 줄어드는데 150일이 걸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긴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고 약속의 무지개를 보여주실 때까지 노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 7장과 8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는 ‘기다리다’는 것입니다. 비가 그치고 물이 줄어들어도 노아는 또 7일을 기다려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노아가 그의 믿음의 여정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의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날이 오기 전까지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며,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림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 시간낭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주실 때 우리 믿음이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1)

조용히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에 있어 속도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림을 주셨을 때, 내가 가는 삶의 방향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나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전환할 수 있다면 그 기다림은 가치가 있으며,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간 노아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악하고 패역한 마지막 세대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남은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갈 때에 노아와 같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노아의 인생은 남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고, 어떤 의미에서는 손해 보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 명령대로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복과 은혜를 기대하며 기다릴 줄 아는 그 믿음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장창수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 Div.)
계명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M. A.)
미국 Azusa Pacific University 졸업(M. A. R.)
미국 Liberty University 졸업(D. Min.)
총신대학교 기독교 교육학 박사과정(Ph. D.) 수료
미국 Torrance 소재 남가주 크리스천 한인교회 담임 역임
월드비전 목회자 홍보대사
대구 매일신문 칼럼니스트 역임
GMS 세계선교회 부이사장 역임
대신대학교 11.12대 재단이사장 역임
(現) 대구 CBS 운영이사장
(現) 총신대학교 재단이사
(現) 대구 대명교회 담임목사

■저서
『길라잡이』, 『성령의 열매 맺기』, 『하나님의 명령에 싸인하라』, 『성숙한 그리스도인 1, 2』, 『말씀을 따라 산 믿음의 거장들』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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