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인생을 살면서 가끔 스스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준으로 평가를 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꼭 어떤 경기나 대회가 아닐지라도 자신과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행동을 했어도 누구는 칭찬을 받는데 자신은 야단을 맞고, 누구는 예쁘게 봐주고 자신에게는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자신의 판단으로 ‘도대체 그 기준이 뭘까?’라고 생각하며, 억울하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불공평한 것 같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모르지만 평가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기준은 분명히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은 믿음의 선진으로서 아벨을 첫 번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입니다. 우리가 아벨의 믿음을 살펴볼 때에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형제인 가인과 아벨이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어떤 의미에서 합리적인 제사를 드렸는데,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절 말씀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 11:2)

성경 말씀에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아벨은 죽어서도 믿음으로써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벨이 이처럼 하나님께 귀한 평가를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느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벨은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드렸고, 가인은 자기의 있는 것을 대충 드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다른 분들은 아벨은 제물로 양의 첫 새끼를 드렸고, 가인은 자기의 있는 것 중에서 순서에 상관없이 드렸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가장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벨은 피의 제사, 즉 양을 잡아 그 속에 있는 피의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피가 없는 곡식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 중 어떤 것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인 히브리서 11장 2절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에서 이미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1.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는 형식의 제사였습니다

창세기 4장 3절로 5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을까? 이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갈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창세기 4장 1절로 8절 말씀 전체를 살펴봐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쫓겨난 후 첫째 아들 가인을 낳고, 둘째 아들 아벨을 낳습니다. 칼빈은 가인과 아벨이 쌍둥이였다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성경이 쓰인 히브리어에서 순서는 굉장히 중요한데, 장남은 차남보다 항상 앞에 등장합니다. 원칙대로 쓰면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다고 써야 합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쌍둥이의 경우에는 장남과 차남을 번갈아서 쓰는데, 주로 차남을 먼저 언급합니다. 이 때문에 칼빈은 가인과 아벨이 아마도 쌍둥이였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과 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모두 성경에서 차남을 먼저 언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서도 양 치는 아벨을 먼저 언급했기에 쌍둥이일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쌍둥이든 아니든 간에 가인은 형이고, 아벨은 동생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두 형제는 창세기 4장 2절에 따르면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으로, 형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를 명하셨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은 곡식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5b)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곡식으로 제사 드리고, 양을 치는 사람이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왜 하나님은 똑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만 받고 내 것은 받지 않느냐’고 억울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고 얼굴의 안색이 변한 이유는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와 질투의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벨에 대한 그런 마음도 있지만, 가인의 근본적인 분노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말씀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원망인 것입니다. 가인의 서운함도 이와 같습니다.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한 것은 ‘하나님 왜 내 제사는 안 받습니까?’라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4절 말씀의 ‘제사’를 ‘예배’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예배는 받지 않으시는지에 대한 문제도 우리가 한 번 고민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너는 선을 행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가인이 창세기 4장 8절에서 동생인 아벨을 쳐서 죽여버립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본문에서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로 나가자고 불러낸 후 거기서 동생을 쳐서 죽여 버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사건은 예배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이 첫 번째 믿음의 선진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가 성공적인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형 가인은 겉으로는 아벨과 똑같이 예배도 드리고 믿음도 좋아 보이지만, 결국은 실패한 예배자였습니다. 성공적인 예배자의 기준은 바로 믿음입니다. 따라서 제사, 곧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인 사람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 4절 말씀에서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그 다음에 나타나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 아벨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아벨과’ 다시 말하면 ‘너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믿음’을 받고, ‘너의 마음’을 받고, ‘너 자신’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삶,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아벨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에도 한 주간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 어떤 마음으로 예배에 나아왔든지 상관없이 예배 시간에 앉아있으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예배자인 나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내 자신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내 믿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예배를 시간으로, 헌금으로,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착각하며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벨 자신을 받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는 말씀은 아벨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아벨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거로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평가의 기준으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를 평가하신다고 생각합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배하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형식적인 종교인의 예배를 드렸을 뿐,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그는 악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인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사는 행위만으로 끝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가인은 예배당을 오가며 자기만족만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6일 내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 대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하나도 없는 삶을 살다가 주일 몇 시간 동안 예배당에서 시간만 보내고, 자리만 채우는 것으로 하나님께 내 할 일은 다했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향해 “네가 왜 화를 내느냐”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6)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기준대로 하나님께서 안 받으시면 우리가 따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설명을 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가 인간의 죄성을 다스리고, 믿음으로 선하게 사는 것이지 단순하게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믿음의 사람은 이렇습니다. 설령자신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에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지 못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드리지 않았다’며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유다서 1장 11절에서는 가인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까지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삶을 살아놓고 내가 제사 한번 드렸다고 하나님께 왜 내 제사를 안 받았느냐고 원망하는 것이 바로 가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형식의 예배가 아닙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 자체를 예배를 통해 받으십니다. 제물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은 감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1-12)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가 ‘피의 제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양과 소를 제물로 피의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그 제물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그들이 믿음이 없이 행위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의 제사를 요구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는 말씀은 오늘날로 말하면 너희들은 예배당에 얼굴도장만 찍고 출석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무서운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마음과 믿음이 태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자신을 드려야 할 예배의 자리에서 팔짱 끼고, 다리 꼬는 것과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태도의 뿌리에는 마음 한 구석에 ‘예배당에 출석도장만 찍으면 예배했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갔을 때 우리는 결코 거절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드리는 삶의 예배, 이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창세기 4장 3절에 있는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문구는 히브리 원문으로는 ‘와 예히 미케츠 야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직역을 하면 ‘그리고 날들의 끝으로부터 이 일이 있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해석입니다.

이미 가인과 아벨은 오랫동안 양을 치고, 농사를 짓고 살아온 것입니다. ‘날들의 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평가의 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 아니냐?’하시며, 그들의 삶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이 이르기 전에는 가인과 아벨의 삶은 평탄하고 순조롭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똑같은 것 같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날들의 끝으로부터 ‘이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의 제도를 정하시고 가인과 아벨에게 제사를 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평가, 심판하는 끝 날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각자 맡은 바 삶의 현장에서 힘써 수고하고 생활했던 날들이 끝이 났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믿음으로 살았는지 검증받을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끝 날은 찾아올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드렸고 가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3. 아벨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해 집중하는 삶이었습니다

당시에 양을 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9장 3절부터 시작되는 노아 홍수 사건 전에는 사람들은 짐승의 고기를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홍수 이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양을 친다는 일은 별 볼일 없는 헛된 일이었습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은 ‘헛고생, 헛수고’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름이 그 사람의 삶을 나타내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을 치는 일은 남들이 보기에는 헛고생하는 것, 별 볼일 없는 헛수고한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때, ‘날들의 끝’에서는 아버지 아담의 것을 물려받아 장남으로서 농사를 지으며 믿음 없이 살던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이 땅에서 크고 위대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삶을 살아간 자의 제사를 주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이라는 것은 내 방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고, 열심을 다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드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 서 원하시는 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나 내 경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양을 키우는 사람이나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 방법은 양의 피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는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구속의 제물이 되신 것을 상징하는 예표입니다. 그것을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이 살았던 당시에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인이 마음대로 드린 제사의 핑계가 되지는 못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해서 따르는 것이 아닌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생활도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경험이나 내가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입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4. 믿음은 자기 방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믿음은 그의 제물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당시에 가장 가치가 있었던 기름, 그것도 양의 첫 새끼의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결국 아벨은 제사를 통해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시간보다도 예배의 시간이 중요하고,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아벨은 분명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믿음의 예배자는 누구입니까? 자기 방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참된 예배는 거룩한 기대로 시작해서 순종으로 끝을 맺는다.’ 믿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기대, 믿음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이러한 아벨의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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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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