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0장 12-18절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중략)…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콜린 웨스트(Colin West)의 동화 가운데 『핑크대왕 퍼시』라는 재미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핑크대왕 퍼시는 오로지 핑크색만을 광적으로 좋아하고 집착했어요.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들을 다 핑크색으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매일 먹는 음식도 핑크 일색이었어요. 점점 집착이 심해진 퍼시 대왕은 백성들의 소유물들까지 다 핑크색으로 바꾸라는 강제 법규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일부 반발하는 백성들도 있었지만,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옷과 그릇, 가구 등 모든 물건들과 소유물들을 핑크색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광적인 퍼시 대왕은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못했어요.

이번에는 나무와 풀과 꽃과 동물까지도 핑크색으로 바꾸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군대까지 동원하여 산으로 다니면서 모든 사물을 다 핑크색으로 칠하거나 염색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죠. 심지어는 갓 태어난 아기 동물까지도 다 핑크색으로 염색을 했어요. 드디어 세상의 모든 것은 핑크로 변한 듯 보였어요. 그러나 아직 단 한 곳, 핑크빛으로 바꾸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늘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핑크 대왕이라도 하늘을 핑크색으로 바꾸는 것 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전전긍긍하던 퍼시 대왕은 자기 스승에게 하늘을 핑크 빛으로 물들일 방안을 찾아내도록 명령했어요. 밤낮으로 고심하던 스승은 마침내 하늘을 핑크색으로 바꿀 묘책을 찾아냅니다. 왕에게 간 스승은 “이미 하늘을 핑크색으로 바꿔 놓았으니 준비된 안경을 끼고 하늘을 보라”고 말했어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은 물론 세상이 온통 핑크 빛으로 변한 것이에요. 그 묘책은 바로 ‘핑크색 안경’이었습니다.

이 『핑크대왕 퍼시』는 프레임, 즉 생각의 틀을 말할 때 인용되곤 하는 동화인데요. 우리도 각자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핑크대왕 퍼시와 별반 다르지 않죠. 우리의 지각과 생각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과 가정 하에서 일어납니다. 맥락이 해석의 방향을 정해요. 어떤 맥락에 속해 있느냐, 이 생각의 틀을 누가 짜느냐가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지를 유도하고 결국 특정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고린도후서 강해를 진행하면서 거짓교사들의 악한 전략에 대해 알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울에 대한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바울을 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퍼시 대왕의 핑크 안경처럼, 바울을 바라보는 시각에 편견을 입혔습니다. 바로 바울에겐 사도의 자격이 없다는 프레임을 씌웠어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그 안경을 쓰고 바울을 보니, 바울의 모든 동기와 행동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이 된 것이었죠. 심지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자비량으로 텐트를 만들고 배고픔과 가난을 이기며 힘들게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역비를 받지 않는 것은 사도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바울에 대한 비난과 모함은 다 이 거짓 교사들의 프레임 안에 바울을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자인 거짓 교사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스스로에게도 프레임을 적용시켰어요. 어떤 프레임일까요? 광명한 천사 프레임이요.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들이요, 가증된 일꾼들이요,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가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1:13-14, 우리말성경)

고린도후서의 바울을 통해 우리가 이 시대를 분별하는 신랄한 근거들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어요. 여러분에게 빛으로 다가오는 것들, 눈부심 속에 가려진 진실을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당시 거짓 교사들은요. 바울뿐 아니라 자신들도 프레임에 가뒀어요. 그들을 가둔 프레임은요. 사람들을 매혹하기 충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에 능했고요. 유력한 자들의 추천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들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말하기 좋아했어요.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 삶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추천하고, 칭찬하고, 있지도 않은 은사를 자랑하면서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대단한 영적 지도자로 인식시키며 권위를 세운 것이죠.

제가 그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대하면서 사람 분별하는 저만의 기준이 있는데요. 일단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자꾸 증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은요. 보통 위험합니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꾸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여러 수식과 여러 이력들로 설명하려는 사람들 말이에요. 이 의도는 대개 위험하고, 건강하지 못하더라고요. 자신이 누구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판단은요. 그들의 몫이예요. 고린도교회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성도들의 인식을 조장하기 위해 지나친 선전을 하고 있어요. 자신들에 대한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두 그 프레임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에 대한 비난과 공격에 동조하고, 심지어 거짓 교사들을 리더로 추켜세우고 박수치고 환호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정말 주의해서 깨어 있어야 돼요. 우리의 대적자들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전략으로 프레임을 만듭니다. 우리 영혼에 어떤 인식의 틀을 미리 짜두려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진리를 가지고 와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이 시대 청년들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역사하려 합니다. 다른 진리를 말해요. 다른 예수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장해요. 인생의 수많은 거짓 교사들에 관해서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고요. 여러분의 진실한 아비와 스승에 대해서는 무자격자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죠. 세상은 먼저 교회에 대해서 그 프레임을 씌우고 싶어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그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그 프레임 안에 가두려 해요. 우리는 그 프레임 안에 교회가 갇혀있는 걸 발견하곤 마음 아파하죠. 그 프레임 안에서 십자가는 조롱당해요. 그 프레임 안에서 복음은 무력합니다. 그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얼굴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자기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서 자기 프레임을 씌우기도 합니다. 빛의 천사와 같이 빛나는 모습을 하고 여러분이 그들을 동경하고 숭배하기 만드는 것이죠. 여러분을 장악하고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요. 세상은 자신을 믿게 만들고 열광하게 만들고 추종하게 만들어요. 여러분, 그중에 가장 유능한 것이 돈이에요.

며칠 전에 유튜브를 열었더니 어느 썸네일에 ‘10만 원으로 주식해서 100억 벌었다’라는 영상이 뜨더라고요. 제가 목사지만 얼마나 궁금하던지… 주변에 주식 이야기가 하도 많아서 지인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데 요새 그런 말이 있다면서요. 부모들한테 그런데요. “아이들에게 사교육 시키지 말고 주식 사주세요.” 한동안 한국 사회가 사교육에 투자하느라 부모들이 허리띠를 졸라맸다면 이제는 교육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해주지 말라는 거예요. 이제 세상이 변했습니다. 돈으로 미래를 열어주라는 거죠. 돈의 가치로 미래 가치를 열어주라는 거예요. 그래서 ‘영끌’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영혼까지 끌어 모은다는 거예요.

여러분, 청년들의 재테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산관리, 전략적인 자산경영 정말 필요해요. 돈을 모으거나 키우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다만 돈을 사탄이 씌우는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죠. 사명은 없어도 사는데 돈이 없으면 못살 것처럼, 영혼까지 끌어 모아 돈 앞에 굴복하게 만드는 것이 크리스천 청년들마저 완전히 종속된 돈의 프레임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스천 청년들이 정말 자산관리를 잘하려면 먼저 영적 가치 정립부터 제대로 해야 합니다. 누가 짠 프레임 안에서 가치가 매겨진 것인지 생각해보셔야 해요. 광명한 천사 같은 그들에게 아무런 분별없이 열광하며 사는 것 말고요. 예수님과 겨루어 경쟁한 할 만한 존재, 예수님도 인정한 경쟁자가 맘몬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분별하세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에게 눈이 가리워져서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분별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거짓 교사들의 자랑거리들에 현혹된 성도들을 너무 안타깝게 여긴 바울이 10장부터 11장까지 그들의 ‘자랑’에 대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는데요.

“우리는 자화자찬하는 사람들의 아류가 되거나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재고 자기들끼리 비교하니 지혜롭지 못합니다.” (고후 10:12, 우리말성경)

바울의 반격은 ‘그들의 자랑은 잘못된 기준에 의한 것이었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좋은 일, 잘한 일, 탁월한 일이라는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거짓 교사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요. ‘자기들끼리 재고 자기들끼리 비교하니’ 그들은 자기 자신이 기준이라는 거예요. 한글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을 보면요. ‘자기’라는 ‘헤이투스’의 활용형이 6번이나 등장합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자기가 만들어놓은 기준으로 그들 스스로를 판단하고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에요. 자기가 정한 기준에 따라 자기를 평가하고, 바울도 평가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를 자랑할 수밖에 없었고, 바울은 비난할 수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 팽배하게 나타납니다. 모든 절대적인 기준이 ‘나’에요. 내가 좋다면 그만인 거예요. 내가 기분 나쁘면 나쁜 거예요. 내가 보기에 좋은 것들,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들, 내가 느끼기에 행복한 것이 인생의 기준이 되어 버렸어요. 교회에도 예수님은 없고 ‘나’는 많아요. 말씀은 없고 ‘내 생각은~’이 많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대신에 ‘내 느낌’이 충만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어떤 느낌적인 것으로 전락해 버렸어요. 예배드리다 좀 센티해지면 그런 것이 기름 부으심인가요?

여러분 저는 말씀 사역자 이전에 예배 인도자로의 정체성이 훨씬 강한데요. 저는 이 시대 영성의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인본주의적 예배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예배 인도를 하기 위해서 이 시대의 새 노래들을 들어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아요. 찬양의 가사에 하나님에 대한 고백보다 내가 너무 많아요. 내 감정이 어떻고 내 상황이 어떤지 너무 장황한 반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너무 빈약해요. 나로부터 시작된 시선이 하나님의 얼굴까지 가지 않아요. 나에 대한 묵상이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확장되지 않아요. 내 감정을 더듬어가다 자신 때문에 아파서 우는 것은 유행가 가사에 흐르는 눈물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요, 나로부터 시작했어도 하나님으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죠. 내 감정의 흥이 아니라요.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거룩한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뿐 아니라, 말씀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 일상과 삶의 모든 문제에서도 역시 적용되요.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기준이 중요한 것이죠.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요. 거짓 교사들은 그 기준을 모두 개인에게 돌려줬습니다. 자기 주관을 그 기준으로 만들었어요. 그러자 그 기준은 모두 사람들의 감각적인 판단이 되어버렸어요. 눈에 보이는 것들, 수사학의 웅변술과 같이 설득적인 것들, 사람의 마음을 감각적으로 끌어당기는 것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기준으로 보면 바울이 어땠겠어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따지면 참 매력 없는 인물이었어요. 진짜 사도 자격이 없어 보이죠. 바울은 힘 있는 사람의 추천서도 없었어요. 말하자면 영향력 있는 인맥도 없어요. 글은 잘 쓰는데 말은 잘 못했어요. 사람들을 그 앞에서 설득시키는 현란한 언변이 없었던 것이죠. 죄송한 말이지만 외모도 아니었어요. 바울이 대머리에 매부리코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키도 작았다죠? 거의 뭐 이 두 세 가지에 외모는 KO되는 느낌. 너무 안타까워요. 사도 바울은 외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능력이 전혀 없었어요.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은 바로 이것으로 인해 그의 사도의 자격을 박탈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을 평가 절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 이 시대에 우리의 대적자들도 이러한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속입니다. 가치는 내가 정해요. 판단은 내가 합니다. 그래서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그 기준은 우리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들의 자랑의 근거와 기준이 된 이 표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서 자화자찬 하는 것은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이 없는데서 오는 몸부림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멋진 관점이죠.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인정이 충분히 채워지지 못하니까요. 자기 기준, 자기 판단, 자기 인정으로 끌어와서 자화자찬하는 것이에요. 그 자기 존재의 열등함을 메우고 가리고 포장하기 위해서요. 우리는 자꾸 자기 삶을 설명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 유혹은 끊임없이 자신을 인정에 목마르게 만듭니다. 오늘 말씀처럼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냥 평생의 원리예요.

우리 삶은 하나님이 세우셔야 섭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셔야 인정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인정을 바라고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해서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삶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청년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자기 존재 가치를 자꾸 상대 평가지로 채점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 점수를 화려한 말로 뽐내고, 과시하려고 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묵묵히 작은 일에 충성된 일꾼을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큰일을 맡기시고 무대 위에 세우시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께 칭찬 받는 존귀한 사람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이 잘못된 그들의 기준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바울의 자랑의 근거는 무엇에 있는가? 그에게는 변하지 않는 정확한 기준이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도 이상으로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분량의 범위 안에서 자랑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곧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정도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가지 못할 사람들로서 스스로 과신해 나아갔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여러분에게까지 갔던 것입니다.” (고후 10:13-14, 우리말성경)

여기서 ‘분량의 범위’라는 단어는요, 캐논이란 단어의 소유격으로 파피루스 문서에 보면 ‘길이를 재는 막대기’ 즉 ‘자’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선 많은 경우 미터법을 쓰지만 허리둘레는 인치로 재죠. 인치는 원래 엄지손가락의 너비에서 나온 것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마다 신체 사이즈가 다르니 너와 나의 한 뼘은 달라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점점 도량형을 통일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어요. 암행어사도 마패와 함께 ‘유척’이라는 ‘자’를 갖고 다니면서 도량형을 정확히 지키는지를 감찰하는 일을 했었죠.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물리적 단위를 설정하자는 의견이 나왔고요. 그래서 6년간의 노력 끝에 적도-파리-북극을 잇는 자오선의 1,000만분의 1을 정확히 측정해서 드디어 오늘 우리가 쓰는 미터(m)가 탄생하게 됩니다.

여러분, 변하지 않는 기준을 갖는 것, 우리 삶을 측량하는 척도가 되는 정확한 표준을 갖는 것은 우리의 실생활에서나 영적인 삶 안에서나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한 뼘이 다른데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는 그런 기준으로 여러분의 삶이 평가되고, 타인의 삶을 평가한다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죠. 우리 삶에는 변하지 않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제시한 자기 삶의 기준은 무엇이었어요? 인생의 변하지 않는 표준이요.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분량의 범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가능 범위예요. 바울이 지금 분량의 범위라고 표현한 것은 경기 시합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고린도는 2년마다 ‘아스트미안’ 경기가 열리는 것으로 유명했어요.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익숙했던 운동 경기를 상기하면서 육상경기에서 선수 각자에게 레인이 할당되어 있는 것을 연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자연히 어떤 생각을 할까요? 자기 레인을 벗어난 선수, 경기의 정해진 기준을 위반하는 사람은 실격이라 점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있으면 무조건 실격입니다. 성공이 복음 밖에 있어요? 실격입니다. 행복이 복음 밖에 있다고요? 위반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요. 복음 밖에 있으면요. 여러분의 스코어는 0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삶의 경주에서 이기려면 계속해서 우리의 레인을 확인하며 뛰어야 해요. 내 열심이, 내 속도가, 이 레인 위에서 달리지 않으면 위반이
고 실격이니까요. 항상 복음 안에서 달려야 하는 것이죠.

<아테네 올림픽>때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었죠. 남자 사격 50m 소총 3자세 결선에서 매튜 에먼스(Matthew D. Emmons) 선수가 선두를 지키며 마지막 한발을 남기고 있었죠. 50m 소총 복사 금메달에 이어 2관왕이 유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뒤 보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탕~!’ 마지막 발을 옆 선수의 표적에 정확하게 명중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0’점. 결과는 꼴지였습니다.

남의 과녁에 10점 명중을 해도 그것은 자기 점수가 될 수 없어요. 복음에 겨냥되지 않으면 여러분 인생에 점수는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세요.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성실과 열정이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청년들의 오늘이 실격되지 않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에 대해 말해주는데요. 여러분 자랑이란 어떤 것이죠?
자랑은 자기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예요. 그 마음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요. 아마도 자랑이라는 것은 그 행위 자체의 문제보다도 자랑의 내용이 문제가 될 때 진정 더 문제가 됩니다. 자신의 외적 과시, 세속적 가치의 과시, 자신 행위의 의로움에 대한 과시가 자랑으로 드러나면 더 큰 문제죠. 그러나 바울의 자랑은 달랐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것을 자랑합니다.

여러분, 사실상 바울로 따지자면 그가 자랑할 만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순수 유대인으로 태어난 정통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다소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자였어요. 그는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던 베냐민 지파였고요. 헬라의 사상과 철학에 물들지 않고 히브리 언어와 히브리 전통과 생활습관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순수한 정통파 유대인들이 있는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불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어요.

거짓 교사들이 자신을 과시하며 자랑하던 것들이 사실 바울의 자격 앞에서는 초라한 것이었어요. 바울의 출신과 학식과 배경이 너무나 출중했던 것이죠. 그러나 바울은 자신은 이것들을 나열할 가치도 없었다고 말해요. 굳이 자기 삶의 이런 조건들을 나열하는 이유도 그것이 오직 한 가지 안에 배설물, 쓰레기 같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자랑은 오직 한가지였어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여러분, 바울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이 시대 청년들이 이 바울의 고백을 그냥 상투적으로 듣지 않기를 바래요. 그리고 상투적으로 고백하지도 않길 바랍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이 여러분 가슴에 어떤 말을 하는지 좀 들어보세요. 가만히 그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바울은 빌립보 서신에서 그렇게 고백해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내 과거와 출신이 얼마나 화려한지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은 다 배설물이 되었습니다. 무가치해졌다는 거예요. 왜냐하면요. 그것들이 나를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어떤 가문의 출신이건, 내 학식과 학력이 어떠하건, 어떤 빛 가운데 서니 모든 것은 무력해졌습니다. 나를 어둠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건 오직 십자가만 설명했습니다. 내가 긍휼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내 학벌도, 내 연봉도, 내 배우자도, 내 외모도 아니었어요.

내가 이 세상 심판자 앞에서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도 함께 못 박혔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자신을 자랑하듯이 나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는 나의 연약함을 자랑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어떤 궁핍에 처하고 어떤 조건에 갇히게 되었는지. 차라리 그것이 나의 자랑이라면 자랑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매질을 당했고 돌에 맞았고 적들과도 싸웠고 벗들과 도 싸웠습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사막에서도 바다에서도 위험을 겪었습니다. 단조롭고 고된 일과 중노동을 겪고 길고 외로운 밤을 지새워 상하고 헐벗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뼛속 깊은 절망과 아픔을 견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위한 이 비참함이 내게는 진정한 자랑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오늘날 우리 세대에게 당당히 고백합니다. 내 자랑거리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한 나의 굴욕과 연약함이 나의 자랑입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서 그런 글을 읽었어요. 제목이 이더라고요. 우리는 저항할 수 없이 거대한 좌절을 맛보기도 하지만요. 우리를 진정 더 무력하게 하는 것은 “참 계획대로 안 되네”, “시원하게 풀리는 게 하나도 없네’라고 말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원인을 명확하게 짚어낼 수 없는 사소한 좌절에 더 큰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이에요. 바로 이런 생존 시대를 라고 이름 붙였어요. 여러분, 바울의 고백이 바로 이 미세 좌절의 시대에 사는 청년들에게도 가능할까요? 우리는 알 수도 없는 일에 좌절을 느끼고, 존중받지 못하는 일에는 자부심을 느끼고 삽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곱씹고 묵상하면서요 인생의 자랑거리를 만들고자 수없이 다양한 미세 좌절을 겪고 있는 청년들에게 ‘어떻게 십자가가 유일한 자랑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예수님으로 인해 굴욕과 비참함을 맛보기 거부하는 이 세대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진정한 자랑이 되기까지,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입니다”라는 멋진 고백을 하기 전에 계속해서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와 가까우세요? 십자가 앞에 자주 달려가십니까?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큰 의미가 아닌데 어떻게 여러분 삶의 다른 성과와 성취보다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하겠어요. 여러분, 삶에 한복판에서 언제고, 어느 때고, 어떤 성취에 도취되고, 어떤 절망에 휩싸일 때 갈보리 언덕으로 달려가십니까?

어린 아이들은 겁이 나거나 부끄럽거나 할 때 잘하는 행동이 있어요. 보통 우리 어린 시절에는 엄마 치마폭에 잘 숨었습니다. 엄마 치마폭을 넓게 펼쳐서 자기 몸을 칭칭 감고 눈만 살짝 치켜뜨는 거예요. 부끄러워도 숨고, 겁이 나도 숨었어요. 그 치마폭에 숨으면 부끄러운 것도 다 가려지고요. 무서운 것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쪼르르 쪼르르 무슨 일만 생기면 그 치마폭 사이에 숨었던 것이죠. 그 치마폭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치마폭 속에서 다음 행동을 결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달려가서 숨을 곳이 있으면 참 좋겠죠. 우리 청년들도 그렇게 엄마 다리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버팀목이 있으면 좋겠죠. 여러분, 십자가가 다 해줍니다.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진정한 자랑이 되기 위해서 자꾸 십자가 앞에 서세요. 십자가 앞에서 수치가 가려지고, 절망이 가려집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의지하세요.

그렇게 십자가가 여러분 삶에 우뚝 서면 매일 매일 조금씩 더 그 십자가로 여러분 삶에 힘이 생깁니다. 그때 십자가가 여러분의 직업보다, 연봉보다, 여러분 삶의 어떤 소유와 능력보다 더 좋아지는 거예요. 그때 자랑이 될 수 있어요. 그때 전부가 될 수 있어요. 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은혜,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자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유경 목사

서울여자대학교 학사
횃불 트리니티 (M. Div.)
(現) 온누리 교회 SNS 청년부 담당
(現) 온누리교회 대학 청년부 예배 기획 담당
(現) 홀리 임팩트 예배 인도자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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