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장 24절 – 29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중략)…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옛날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에는 동상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저녁이 되면 동상들이 벌떡 일어나 ‘학교를 거닌다. 슬피 운다. 서로 대 화를 한다.’ 등의 괴담이 난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귀여운 괴담의 동상 들 중에서 늘 턱을 괴고 앉아있던 동상이 하나 있었는데, 구부정하게 턱을 괴고 멍을 때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이 동상이 로댕의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이 동상을 향해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행위하는 인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사유하고 있다.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었고,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가 뇌가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렇듯 은 늘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의 명언과 연결지어 이야기되곤 합니다.

데카르트는 1600년대에 활동한 철학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입니다. 동상과 마찬가지 로, 의심하고 끊임없이 의심할 때, 많은 것들이 소거되고 마지막엔 의심하는 주체, 곧 ‘나’만 남게 됨으로써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게 가짜면? 이게 가짜면?”하고 꼬리를 물어물어 가다가 마지막까지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 “의심하고 있는 내가 여기 살아있다”라는 명제만이 남게 됩니다. 데카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의심’이란 인간 본연의 본능이자, 어쩌면 필수적인 조건임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여기, 의심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의 이야기는 오늘 읽은 본문에 가장 자세히 등장합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는 도마의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는 것에 반해, 요한복음에만 이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 본문으로 인해 도마를 쉽게 평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의심했다가 예수님께 혼이 난 인물’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도마 에 대해 알아볼 때, 좀 더 입체적으로 도마를 알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천에게 ‘의심’이란, ‘불신’의 의미와 같은 맥락으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의문을 품거나 반대 생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암묵적인 생각 때문에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 덮어놓고 믿으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한국은 유교적인 문화와 어우러져 어른에게 자기 의견을 쉽게 피력할 수 없는 문화인데다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사상과 맞물려 절대로 물음표를 쓸 수 없는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쓰이는 본문도 역시 도마의 에피소드입니다. 도마가 의심을 하고 예수님께 다가가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뭐라 하셨니?”라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그런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도마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도마는 생각 외로 상당히 진취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회의적이고, 의심하느라 수동적이었다 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을 보시면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는 유대에 사는 사람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였습니다. 그는 병을 앓다가 결 국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위해 유대 땅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7절에 나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8절에서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하고 묻습니다. 바로 전 장인 10장 31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의 죽을 뻔 했던 순간에, 예수님은 그 손에서 벗어나 겨우 다른 장소로 옮겨갔는데, 다시 나사로가 있는 유대로 가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만류했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실랑이 끝에 11장 16절에 도마가 등장합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의 첫마디가 간단합니다. “Let’s go”, “가자!” 그런 후 더 멋있는 두 번째 마디를 합니다. “그와 함께 죽자!” 예수께서 유대로 가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제자인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도마의 이 말에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이 시원하셨을까 싶습니다. 도마는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믿기로 결정하고, 따르기로 선택한 일에는 어떠한 회의나 고민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 계신 예수님의 선택과 뜻을 분명히 붙잡았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도마에게 의심이 생긴 근본적인 원인에 있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분명한 대상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영적인 세계와 진리에 대해서는 상당한 무지를 가진 자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는 예수님이 갑자기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치 자신의 다음 말에 제자들의 반응을 미리 알고 계시기라도 한 듯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2절부터 4절까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거처를 예비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5절에 서 도마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 14:5)

풀어보면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저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릅니다. 둘째, 그렇기에 저 또한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못갑니다. 도마가 이렇게 질문했던 까닭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예비하신다는 그 길이 바로 세상 왕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지배를 꺾고 이스라엘이 일어서는 그날에, 그리하여 예수님이 왕 되시고, 제자인 자신들은 그런 왕을 보필하게 되는 그날을 꿈꾸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자리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도마는 상당히 신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현실적이고,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그 길을 설명해 주셔야하는데, 너무나 애매하게 자신을 믿으라고만 하시고, 거처를 예비하면 그때 자신을 따라오기만 하라는 그 말씀에 도마는 조바심이 난 것입니다. 세상 왕국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 일이 진행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다는 그 길을 우리 또한 어떻게 따라갈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어떤 도시로 가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연줄이 있는 어떤 인물을 만난다는 것인지,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인지 그 ‘길’을 확실히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눈에 보이는 세상 왕국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왕국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도마 입장에서는 세상 왕국을 건설하실 예수께서,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이끄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혜와 공의로 다스려주실 예수께서, 너무나 처참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입니다. 앞에서 봤듯이, 도마는 눈앞에 있는 것을 분명하게 붙잡 는 스타일입니다. “맞다. 확실하다”고 하는 것은 의심 없이 믿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 분명한 대상이 사라지자 도마는 엄청난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한 후, 도마가 얼마나 큰 상심에 빠졌을지는 요한복음 20장 24절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며 함께 슬퍼하고 있을 때, 그곳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는 동굴 안에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그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도마의 눈앞에 확실하게 다가온 사건입니다. 그는 슬퍼하며 비통해했습니다. 그는 깊은 슬픔을 지닌 채로 홀로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결국 비통에 빠진 도마는 제자들을 아예 떠나 홀로 있었습니다.

도마는 그저 의심만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도마는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하는 사람입니다. 상대적으로 도마는 영적인 일들에 대해 눈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세계를 신뢰하는 탓에, 예수님의 죽음은 도마에게 훨씬 더 충격적이고, 더 많은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함께 모여있던 자리에도 가 지 못할 정도로 도마는 무너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예수님을 보았던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2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20장 26절 바로 앞에 나온 단어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여드레를 지나서”라는 구절입니다. 일주일이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혼란스러움과 의심 속에서 제자들과 일주일을 함께 머물렀습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우리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주일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즐거움에 콧노래가 나오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그동안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며 도망가서 떨었던 지난날이 이미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과 어떤 여정을 거닐게 될까?”, “부활을 하신 예수님이 행하실 일들이 얼마나 멋질까?”하는 기대들로 하루가 핑크빛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그들 속에 도마가 있습니다. 도마는 근심했습니다. 아직 두려웠습니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만났다던 그 사람이 예수님을 사칭하는 사기꾼인지, 아니면 자신이 지금 불경스러운 의심을 하고 있는 건지, 혹시 로마가 고용한 앞잡이에게 속고 있는 건지, 아니면 예수님의 쌍둥이 동생은 아닌지, 자신은 도저히 이 무리에 어울릴 수 없었고, 함께 기뻐할 수 없었고, 즐겁게 밥을 먹을 수 없었고,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주일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도마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때, 예수님은 바로 나타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도마의 결정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도마야. 너는 그곳을 박차고 떠날 것이냐, 아니면 의심 가운데서도 나를 기다리겠느냐?”하는 질문으로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도마가 끝까지 예수님을 기다리고자 마음먹었을 때, 예수님이 비로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26절에 잠겨있던 문을 그대로 통과하셨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인사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우며 근심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인사는 누구를 향하여 하신 말씀일까요? 네 맞습니다. 이 인사는 오로지 도마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도마의 넘실거리는 그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자, 몸소 그 자리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도마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미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요 20:27)

예수님이 입으신 긴 상의를 들어 올리시며 친히 도마에게 옆구리를 내미셨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는 로마군 병사가 창으로 찔러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던 상처가 선명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도마는 똑똑히 그 당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과 피를 보았습니다.

그때에야 도마의 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선명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의문과 혼란스러움은 안개가 걷히듯 선명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라는 한 사람에게까지 찾아와 도마의 영혼을 의심의 풍랑에서 구원하셨습니다. 28절에 도마는 힘차게 주님을 불렀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초기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의심 자체를 죄악시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인 니고데모는 어두운 심야 시간에 예수님을 찾아와 의심 속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또한 4장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이상하다는 듯이 질문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4장 48절에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사람들 앞에서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또한 의심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마는 이미 3년이란 시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해왔음에도, 혼란스러운 의심에 빠졌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도마의 의심에 확실한 답을 내려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에 확실한 신뢰를 얻게 된 도마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페르시아로 넘어갑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자들의 증언이 필요치 않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위트니스, 즉 ‘증인들’이라고 부릅니다. 확신 속에서 도마는 홀로 페르시아로 건너가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다시 인도에 건너가 동부교회를 세우고, 앗수르교회, 네르토리안교회, 갈대아교회도 설립합니다. 훗날도마는 인도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 사상을 공유하지 않는 제 3세계로 가서 하나님,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까지 전해야하는 일들은 전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도마는 믿음과 확신 속에서 쉼 없이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여러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예수님을 위해 바쳤던 것입니다.

의심이 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덮어놓고 믿음이 있는 척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만약 도마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음에도 그곳의 제자들과 함께 확신이 있는 척했다면, 결코 그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 자국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애매한 확신과 이렇다 할 믿음 없이, 미적지근한 신앙을 소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의심이 든다고 해서, 그 자리를 떠나서도 안 됩니다. 스스로를 불경하다고 생각하며, 믿지 못하니 예수님께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며 예수님의 임재를 사모할 때, 분명히 예수님은 그 의심을 걷어주실 것입니다. 도마와 같은 분들이 있다면, 예수님은 그 풍랑이 이는 마음에 엄청난 평강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강주혜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졸업
숭실대학교 기독대학원 상담학과(Th. M.)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종교교육학과(M. Ed.) 졸업
(現) 안산동산고등학교 교목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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