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2장 24-32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 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바바라 존슨(Barbara Johnson)이 동성애에 빠졌던 아들이 돌아오는 시점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쓴 책이 바로 『자신이 가장 고통 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라는 책입니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씁니다. ‘삶이란 항상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불행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불행이라는 인생의 가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든지, 아니면 기쁨과 소망의 꽃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
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상사람 들에게도 고난이 찾아오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고난에 더해서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고난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엄청난 파도처럼 더 큰 문제가 닥쳐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닥쳐오는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가 중요합니다. 바바라 존슨이 책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고통과 절망의 문제는 상황도 환경도 아닌 자기 자신의 관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의 뿌리를 찾아가면 결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문제, 둘째는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문제의 크기와 모양이 다를지라도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문제 또는 자신과의 문제입니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 첫 장에서 이렇게 씁니다. ‘참된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하나님 혹은 자신의 문제를 풀면, 삶의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느냐는 의문을 가집니다. 하나님께 서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내 자신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되돌아볼 때,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단번에 해결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인 창세기 32장에서 세상적으로 보면 성공한 인생처럼 보였던 야곱은 절망과 고독의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 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정확하게는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절망과 고독 속에서 얍복강 가에 있던 야곱을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고독과 절망의 현장에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오신 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본문의 얍복강 가에서 있었던 야곱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시청각 메시지에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야곱은 형인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자권(長子權)을 빼앗아 도망을 갑니다. 도망자의 신세가 된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1,600Km나 떨어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합니다. 도망가던 중에 벧엘에서 여전히 야곱을 사랑한다고 약속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종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야곱은 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외삼촌과의 갈등, 착취 등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끝까지 자기가 원했던 것을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았던 야곱은 자기 재산을 소유하고, 많은 자식들을 낳고, 어느 정도 명예를 가진 위치에 오릅니다. 그런데 창세기 31장에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야곱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창 31:3)

야곱은 ‘그동안 죽을 고생했으니 이제는 누리면서 살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세상적으로 아무리 형통하여도 하나님을 떠난 자리는 저주이며, 이 땅에서 아무리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축복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르십니다. “야곱아, 네가 이곳을 떠나 믿음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약속을 해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떠납니다.

고향 땅에 거의 다 온 야곱이 선뜻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바로 형 에서 때문입니다. 에서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당시 족장 사회의 400명이란 숫자는 전군(全軍)을 이끌고 오는 것입니다. 많은 구약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형인 에서가 야곱의 귀향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오고 있는 모습이고 해석합니다. 중동의 문화 속에서 사람을 환영할 때는 군인을 데리고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온다는 소문을 들은 야곱의 마음이 창세기 32장 7절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야곱의 심정을 ‘메오드 와이라’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들은 보통 죽음의 공포를 느낄 때 쓰는 단어들입니다. 따라서 원문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야곱은 죽음의 공포와 같이 크게 두려웠고, 심히 고민하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야곱은 먼저 재산을 반으로 나눕니다. 혹시 형이 군대로 한 쪽을 공격하면, 그동안 다른 쪽은 도망가겠다는 계획입니다. 다음으로는 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준비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자기보다 앞장서서 아내와 아들들 에게 얍복강을 먼저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야곱 자신은 얍복강 가에 홀로 남아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고민하며, 홀로 지새우던 밤은 절망과 공포에 뒹굴던 시간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야곱은 급한 대로 인간적인 방법을 써보았지만, 가슴은 답답하고 죽음의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현현(顯現)이라고 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야곱이 만난 하나님의 사람이 구약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표현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이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봤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야곱을 만나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십니다. 야곱은 지금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어찌할 바 모르는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로하시고, 해결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씨름을 걸어오십니다. 영어성경 에는 레슬링(Wrestl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서로 자세를 잡고 하는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대로 야곱을 넘어뜨리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끝까지 밤새도 록 달려듭니다. 그 이유를 26절에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 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이 끈질기게 하나님을 붙들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도저히 야곱을 어찌하지 못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제서야 야곱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7-28)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모르셔서 질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도 아시고, 내 모든 상황과 형편, 처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신 까닭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1.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너의 이름인 야곱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네 이름과 같이 살았던 과거의 삶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 뒤꿈치를 잡았다, 붙잡는다, 집착한다, 약탈한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삶은 이름처럼 남의 것을 빼앗고, 집착했던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며 살아왔습니다.

첫째, 야곱은 여자에게 집착했습니다. 얼마나 한 여인을 사랑했던지 14년 동안 라헬을 위해 외삼촌 밑에서 종처럼 일을 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요하게 그것을 쟁취합니다.

둘째, 야곱은 재물에도 집착합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하면서 조카 롯에게 결정권을 줍니다. 실제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것이 쉽지 않은 결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쪽을 바라봤을 때, 아브라함의 오른쪽은 전부 산악 지역입니다. 그리고 왼쪽은 소알 땅과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마치 천국 같다고 표현할 수 있는 땅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더 가치 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어떤 땅이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 내 땅이 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우물은 귀중한 재산이자, 생명의 근원으로 그 것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우물을 파니 주변 사람들이 빼앗아 갑니다. 이삭은 다시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팝니다. 자기 우물에 집착하지 않고, 빼앗기면 주고, 다시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팝니다.
그러나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은 자신의 것, 물질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야곱은 자식에게도 집착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요셉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습니다. 요셉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던지, 요셉이 아직 어렸음에도 상속권을 의미하는 색깔 있는 옷을 입힙니다. 이러한 야곱의 편애(偏愛)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이처럼 야곱은 집요한 사람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손을 꽉 쥐고 태어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우리가 집착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집착하는 것, 집요하리만큼 움켜쥐려고 했던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이제 고생은 끝이 났고, 어깨에 힘도 주며, 누리면서 인생을 즐기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네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것들, 집요하게 움켜쥐고 있었던 손을 펴서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초대교회 교부 중 한 사람인 어거스틴(Augustine)은 인생을 “포기시키시는 하나님과 집착 하는 인간과의 싸움이 인생이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테니, 네 손을 펴서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달려가라 하십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움켜잡은 손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도 내려놓지 못한 채 집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돈, 자녀, 권력, 명예, 심지어 취미까지도 집착할 수 있습니다. 나의 노후 보장을 위해서, 내가 대접받기 위해서, 내 눈에 좋아 보이고,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취미 중에 어린 시절에 많이 했던 것이 우표 수집입니다. 물론, 우표 자 체가 다양하고, 예뻐서 수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재테크에 목적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우표를 모아 오래 보관하고 있으면 가치가 오른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가난한 시절에 우표를 많이 모은 것입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우표는 1823년에 영국의 식민지 가이아나에서 발행한 1센트짜리 우표입니다. 이 우표는 2014년 미국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 97억에 낙찰되었습니다. 1센트짜리 우표가 세월이 지나니 97억의 가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취미이지만, 아이들 때부터 돈이 되는 수집을 하면서 물질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야곱의 인생은 험악한 인생이었습니다. 걸어온 길이 피곤한 인생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낸 이유는 따지고 보면 야곱이 세상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인생이 험악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려놓고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악착같이 가지려 하고, 다른 사람들과 치열하게 싸워 이기려고 하니 험악한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이런 험악한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바로 ‘아마르’라는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야곱의 이야기 중에 처음으로 나오는 단어가 바로 ‘아마르’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마르’는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이 악착같은 인생을 살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 이룬 것처럼 보여도 단번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갖은 고생을 하며 모았던 재물, 사랑하는 아내, 자녀들을 형 에서가 군대를 데리고 모두 쓸어버리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집착해야 할 대상이 세상에 어떤 것들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시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9장 31절에 보면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한 레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태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사랑받았던 라헬은 당시에는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레아가 자녀를 낳으면서 기대를 합니다. 아들을 낳으면 남 편 야곱이 자신을 사랑해주리라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첫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짓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전히 레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시므온’을 낳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시 레아는 셋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레위’라는 짓고, 세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고 기대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야곱은 레아에게 시선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아는 넷째 아들 ‘유다’를 출산합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 29:35)

레아는 남편인 야곱의 사랑에․ 집착했습니다. 아들을 셋이나 낳을 동안에 는 어떻게 하면 야곱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만 몰두하고 있었는데, 넷째 유다를 낳고서 깨닫게 됩니다. ‘아마르’, ‘생각해보니 남편이나 아들에게 집착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처럼 세상에 집착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특히 젊은 부부들은 자녀가 우상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이니,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양육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에게 너무 집착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 생각의 틀로 자녀를 맞추려고 하거나 자녀를 손에 쥐고 양육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나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붙들고,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집착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모두 얍복강 너머로 보내고, 홀로 얍복강 가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붙잡고 씨름했던 야곱은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부터 바꿔주십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8)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이유는 ‘다시는 집착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어렵지만 세상에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십니다. 그리고 내 손을 붙잡고 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져 주신 것입니다. 신학자 존 레스비(John Lesby)는 “우리의 삶에 서 경험하는 온갖 딜레마는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해서 오는 것이다. 내가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놓을 때 하나님은 내 편이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일 먼저 붙잡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집착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놓았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우리에게 져 주시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바라 존슨의 경우처럼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도 하나님을 붙들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명예에 집착합니다. 자리에 연연(戀戀)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이건 자기 것이라고 악착같이 움켜쥐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높아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집착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명예, 자존심, 돈과 같이 내가 악착같이 붙잡고자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단번에 해결해주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몽골에서 선교사역을 했던 이용규 선교사의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 삶 가운데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막는 영역들이 무엇인지 헤아려보십시오. 예수님의 발치까지 가져갔지만 더는 깨뜨리지 못한 채 여전히 두 손에 꽉 틀어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저는 깨어지기 싫습니다. 상처받기 싫습니다. 내 체면도 좀 생각해주세요. 나도 영광을 같이 받고 싶습니다. 나도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도 적당히 같이 누리면 안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안에 네가 너무 크면 내가 들어갈 수 없단다.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구나.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다. 그러나 네 안에 네가 너무 커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네 것을 달라 는 이유는 너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절대 아니란다. 너를 온전케 하려면 네가 잡고 있는 그것을 깨뜨리고 놓아야 한단다.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 하지만 네가 그것을 끝까지 잡고 있으니, 줄 수 없는 것이란다.”

‘우리 안에 혹시 하나님조차 들어가실 수 없는 영역이 없는지 살펴보고, 주님이 내 의식 깊숙한 곳에 들어가셔서 나의 주관자가 되어주시도록 해야 한다.’

2.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하나님의 질문은 ‘새로운 인생, 새 이름을 주시겠다’라는 뜻입니다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가능합니다. 야곱은 30절에 나타나듯이 이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명명(命名)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는데, 죽이시기는커녕 나에게 져주셨다는 고백이 담긴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형과의 문제로 절망과 고민에 빠진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직장, 물질, 관계, 질병 이런 모든 문제들을 인간의 방법으로 풀려하니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욱 고통과 절망 속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말씀하십니다.

『인간 야곱, 이스라엘이 되다』 책에서는 ‘우리는 엉뚱한 문제를 붙잡고 허비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나면, 다른 문제는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야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물리쳐 주시고, 에서와 싸워도 이길 수 있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회복이 되고, 하나님을 붙드는데도 삶이 더욱 어려움과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야곱이 그런 모습입니다. 야곱은 세상의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에게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셔서 절뚝거리게 하십니다. 우리 생각처럼 약간 걸음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억지로 걷다가 쓰러지고, 기어서 갈 정도의 형편입니다.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이 드디어 형 에서를 만납니다. 야곱은 의문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장애도 함께 주셨습니다. 하지만 에서를 만나고, 야곱은 이것이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 33:3-4)

이상한 일입니다. 야곱을 죽이려고 왔던 에서가 달려와서 안고 입맞추고 서로 울고 있습니다. 많은 구약 학자들은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야곱은 지금 잘 걷지 못합니다. 조금 걷다가 넘어지고, 또 일어나서 걷다가 넘어집니다. 불쌍한 모습입니다. 에서에게 가면서 절뚝거리며 일곱 번이나 땅에 몸을 굽힙니다. 에서가 기억하는 동생 야곱은 악착같고, 교활하고, 집요하던 야곱입니다. 에서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성공해서 오는 동생의 소식을 듣고 으스대며 귀향하는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동생의 모습을 보니 그런 마음이 다 사라집니다. 잘난 체 하던 동생이 자신에게 기어옵니다. 동생이 절뚝거리며 걷다가 넘어집니다. 야곱이 어쩌다가 20년 간 저렇게 되었느냐는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야곱과 에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나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고, 삶의 문제 자체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만난 절망 속에서도 나를 찾 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져 주시고, 문제 있는 나를 안아주시고, 축복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현재 성도들의 경험과 야곱의 경험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다. 야곱에게 절망의 얍복강 가에서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들의 개개인의 삶에서 나타나 주신다. 이처럼 성도들은 자신들의 시험 속에 서 하나님과 씨름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8)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과거가 문제 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세상의 어떤 것을 집착했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져 주시고, 우리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살게 하십니다.

<The next time you feel God can’t use you. Just remember the following people>이라는 글을 한 편 소개합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쓰실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절망의 순간에 다음의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노아는 술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늙었습니다. 이삭은 공상가였습니다. 야곱은 집요한 거짓말쟁이였습니다. 레아는 못 생겼습니다. 요셉은 학대를 받았습니다. 모세는 말이 어눌했습니다. 기드온은 두려워했습니다. 삼손은 바람둥이였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예레미야와 디모데는 어렸습니다. 다윗은 간음한 살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심한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이사야는 벌거벗은 설교자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과부였습니다. 욥은 파산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벌레를 먹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모든 일에 대해 근심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이 들렸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다섯 번이나 이혼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바울은 너무 율법적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핑계거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다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세상의 것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시고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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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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