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6장 6-11절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토니 캠폴러(Tony Campolo)는 목회자이자 이스턴(Eastern)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회복』이라는 그의 저서에 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기독교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교목에게 한 여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교목에게 상담을 요청합니다. 상담의 내용은 자신이 남자와 연애를 하던 중 임신을 했는데, 소문이 학교 전체에 다 퍼졌다 주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엄한 아버지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 너무도 무섭기에 도망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상담의 내용을 들은 교목이 여학생에게 자신이 직접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여학생의 아버지에 게 전화를 겁니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따님이 다니 는 학교 교목입니다. 이제까지 따님을 지켜보았는데, 봉사활동도 많이 하는 참 좋은 따님을 두셨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도 자기 딸이 참 착하고 좋은 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교목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 30초 동안 아버님이 정말로 아버지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여학생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모두 말합니다. 남자와 연애하던 중 임신까지 했으며, 지금 딸의 임신 사실이 학교 전체에 소문이 나서 도망가려고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교목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아이는 어떤 경우에도 제 딸입니다. 저는 제 딸은 여전히 사랑합니다. 내 마음과 우리 교회에는 언제나 딸의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딸아이에게 꼭 그렇게 말해주십시오.”

토니 캠폴러는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야기 속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나와 같이 연약한 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종종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토니 캠폴러는 사람들이 현재 상황에서 도망가는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실패와 실수로 인한 부끄러움 때문에 도망간다. 둘째,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견디기 어려워 도망간다. 셋째, 회복 가능성이 없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면 도망간다.

본문 말씀인 창세기 16장에 나타나는 하갈의 사건은 삶의 실패와 실수 때문에 도망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여종입니다. 그런데 여주인이었던 사래의 학대로 인해서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하갈이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도망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하갈은 하찮은 여종이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사래의 미움을 사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인싸’와 ‘아싸’라는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인싸’라는 말은 영어 ‘인사이더’(Insider)의 준말입니다. 즉, 무리 속에서 눈 에 띄는 사람, 공동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마치 주인공 같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아싸’는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준말입니다. 무리 밖을 겉도는 사람, 공동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하찮은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인싸’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은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싸’에게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실패와 실수 속에 도망자의 신세가 된 하갈과 같은 여인에게도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도망을 간 시나이반도에 한 광야의 샘 곁에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가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자녀를 약속하셨지만,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는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판단을 합니다. 이때 사래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의견을 말합니다. 바로 애굽 출신인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아내의 의견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거나 비신앙적이라면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동의하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이고, 그 후에 하갈이 임신을 합니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4)

‘멸시했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칼랄’이라는 말은 ‘가볍게 여기다, 하찮게 여기다, 경멸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것은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브닌나처럼 한나를 괴롭히고, 비인격적으로 대한 정도는 아닙니다. 하갈이 멸시했다는 것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임신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여주인을 약간 낮춰보는 정도가 ‘칼랄’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갈의 경멸의 눈을 느낀 사래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창 16:5a)

아브라함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래와 하갈 사이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정리해주고 해결해주어야 하는 것이 남편의 역할인데,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창 16:6a)

바로 아내 사래에게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래는 곧바로 하갈을 학대합니다. ‘학대하다’가 히브리어로는 ‘왓테안네하’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고통을 주다. 벌을 주다. 굴복시키다’는 뜻인데,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받는 고난을 표현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즉, 사래는 하갈을 아주 혹독하게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 갈에게는 억울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은 아이를 임신한 것이 기쁘고, 자부심도 들어서 여주인을 깔보는 눈으로 약간 멸시하는 정도였는데, 여 주인 사래는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모욕을 주고 굴복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사래의 학대가 얼마나 심했던지 도저히 하갈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하갈이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도망을 가버린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하갈이 있는 시나이반도의 샘 곁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던 헤브론에서 자신의 고향인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도망친 하갈이 광야의 샘 곁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저명한 구약신학자인 폰 라드(Gerhard von Rad)에 따르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 (顯現)하신 것으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해 주는 것입니다. 즉, 하갈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 나타나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인을 멸시하여 학대를 당하고, 더는 견디지 못 하고 도망간 여종 하갈의 슬픔의 현장에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 나님께서 하갈을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이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하갈아, 네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창 16:8)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하갈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 중요한 두 구절이 나옵니다. ‘에 밋제 바트’와 ‘웨아나 텔레키’입니다. ‘에 밋제 바트’는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는 질문으로써 하갈의 과거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웨아나 텔레키’는 “너는 어디로 가느냐?”라는 질문으로써 하갈의 미래에 대한 물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네가 앞으로 걸어가려고 하는 삶이 옳은지 한번 돌이켜보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어찌 보면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던지시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성경은 하갈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합니다. 이집트 출신이었고, 사래의 여종이었으며, 아브라함의 첩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랍비 주석에는 하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래와 기근(饑饉)을 피해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파라오가 사래의 아름다움에 반합니다. 그래서 사래는 바로의 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래의 후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구속사를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사래를 다 시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냅니다. 바로 파라오의 집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파라오가 사래에게 주었던 여종이 하갈이었습니다. 처음에 사래와 하갈은 굉장히 사이가 좋았습니다. 관계가 얼마나 좋았으면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서 대를 잇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하갈은 한 많은 여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종이자 첩의 신분입니다. 거기에다가 스스로 계획하거나 주인을 유혹한 것이 아닌 사래가 시켜서 임신을 합니다. 임신 후에 여주인을 조금 멸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가가 너무도 큽니다. 상상할 수 없는 모욕을 받고,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갑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갈에게는 큰 잘못이 없습니다. 차라리 하갈을 학대한 사래나 그것을 말리지 않고 내버려둔 아브라함이 더 나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갈의 잘못은 자신의 위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부르실 때에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움’과 ‘위치’라는 중요한 명제를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성도는 성도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랑게(J. P. Lange)의 주석에는 이렇게 씁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범죄한 인간이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하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눈물 어린 호소이다.” 바로 이 질문은 자녀가 옳은 길로 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부모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호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절망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린다고 해도 그 상황 속에서 고통만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으며,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 모두 늘 생각해봐야 할 질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이 질문을 했을 때 자신이 이제까지 온 인생의 여정이 ‘억울하다’, ‘한 많은 인생이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불행하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사무엘하 11장 27절에 보면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나는 억울하고, 내가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을 했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 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갈은 직분을 망각했습니다. 주인을 멸시했습니다. 하갈의 마음에는 주인을 미워하는 쓴 뿌리, 마음속에 상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 게 하신 질문은 “하갈아, 네 자신을 돌아보라”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말씀이었습니다.

1. 하갈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은 “네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라, 너의 위치로 돌아가라”라는 반어법(反語法)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 16:9)

하갈의 입장에서는 다시 돌아가기 싫은 길입니다. 하갈이 순종하기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견딜 수 있었으면 도망치지 않았지, 오죽하면 도망쳤겠습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이더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제는, 더는, 도저히’의 앞 글자를 따온 말입니다. 하갈과 같이 우리도 때로는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고, 벗어나고 싶고, 떠나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자기 기준으로는 ‘내가 오죽하면 그랬을까, 이제는 못 참겠다, 더는 안 되겠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합리화(合理化)하기 쉽습니다. 아마 하갈은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돌아가라고 말했을 때, 자기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아신다면 ‘하갈아 네가 그 동안 고생이 많았다. 내가 새로운 도피처를 줄 테니, 그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이제까지 너를 학대한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깊은 뜻은 하갈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을 가지고, 참고 기다리면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돌아가라, 네 자리를 지키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내 위치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나의 현실에서 떠나고 싶을 때, 절망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네 위치와 자리를 지키고, 견디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떠나라, 내가 다른 길을 열어주겠다, 더 좋은 상황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현실이 너무나도 힘들지만, 지금의 자리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현실이 힘들다고 해서 함부로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정말 힘든 분들이 있습니다. 직장도 어렵고, 가정도 쉽지 않고, 물질적으로도 힘들어서 더는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그래도 성도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령, 아무리 자녀가 애를 먹이고, 고생을 시키고, 힘들어도 어머니가 자신의 자리에서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있어야 할 자 리에 돌아가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참고 견디는 것이 성도의 표징(標徵)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빌 1:28)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어려운 시절이 많았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거쳐 전쟁을 겪고, 경제발전을 이루기까지 지난 세대의 부모님들은 끝까지 참고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만약,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 세대는 없었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는 더 큰 절망 가운데 있었을 것 입니다. 죽을 만큼 괴로웠어도 어머니가 자식들을 지켰고, 고된 노동과 어려움 속에서도 아버지가 가정을 지켰기에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 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하갈은 다행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다시 돌아갑니다. 하갈의 순종 때문에 배 속에 있는 자녀 이스마엘이 복을 받습니다. 만약 하갈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애굽으로 돌아갔다면, 이스마엘은 애굽에서 또 다른 이방인으로 비참하게 끝나는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인 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선조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사에 나타나는 ‘님’은 해석에 따라서 이상향이나 민족과 나라, 그리고 남편을 뜻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님’을 남편으로 본다면, 에 나타나는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문제 있는 남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 가사에 보면 남편이 아내와 가정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남편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음 절의 가사를 보 면 ‘심심산천(深深山川)에 초가집을 짓고, 우리 님 만수무강을 빌어나 볼 까’라고 노래합니다. 아무리 남편이 문제가 있어도 아내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떠나간 남편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에는 ‘청천(晴天)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에는 수심(愁心)도 많다’는 가사가 나타납니다. 하루하루가 쉽지 않습니다. 생활고에 찌들어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자식들도 속을 썩입니다. 삶에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으니, 하늘에 별이 많은 것처럼 내 가슴에 근심도 많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떠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날 버리고 가신 님은 가고 싶어 가나.’ 해가 서산으로 지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지는 것이 아니듯이, 날 버리고 간 남편 역시 오죽하면 그랬을까’라고 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날 버리고 가는 님 잡지를 마오. 갔다가 올 때가 더 반갑다네.’ 남편이 나를 버리고, 가정을 떠나도 잡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남편이 떠나도 자신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자식들을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와도 자기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때가 되면 남편이 돌아올 것이고, 그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갈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을 자리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독하게 견디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돌아가면 삶의 방법을 바꿔서 네 자리를 포기하지 말고 살라는 의미입니다. 하갈은 과거에는 사래의 종으로 자신과 주인을 비교하며 살았습니다. 매사(每事)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주인의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갈에게 “네 자리로 돌아가서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갈 스스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갈 스스로가 변하면 상황도, 환경도, 처지도 모두 바뀝니다. 환경과 처지가 그대로일지라도, 자신의 관점과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하면 모든 것이 다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때 기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 하갈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은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며,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는 따뜻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질문하신 이유는 여전히 하갈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갈의 실패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다시 하갈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해 절망 속에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다시 해보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테니 돌아가서 네 자리를 지키라 하십니다. 창세기 16장 10절과 11절에 보면, 하갈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돌아갔을 때 주시겠다는 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또’라는 단어가 2번이나 나타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하갈을 사랑하셔서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십니다. 하갈에게 아들 이스마엘과 그 후손이 크게 번성한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고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현재 이스마엘의 후손으로써 아랍어를 모국어로 쓰는 자가 4억 8천만 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알고 계시고,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들은 하갈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 16:13)

한글 성경과는 달리 히브리어 원문은 하갈의 감탄문으로 되어있습니다. “오! 내가 광야에 홀로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조차도 나를 돌아보시고 위로해주고 계셨구나!”라는 뜻입니다. ‘살피시는 하나님’이란 단어는 ‘엘 로이’로써 살피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갈을 비롯한 성경의 여인들에 대해 쓴 기엔 카젠(Gien Karssen)이라는 분의 『믿음의 여인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하갈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시내 반도에 거친 사막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한 점과 같은 하갈의 모습은 하나님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온 인류에게 그러하시듯, 하나님은 하갈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녀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고,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는 말씀은 하갈이 자신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비무장적인 접근이었다. 이 질문은 요한복음 4장과 8장에서 예수님이 죄 많은 여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구원하실 때 사용하셨던 따뜻한 방법이었고, 하갈과 함께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잘난 사람도 한 점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갈을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셨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시고, 지금도 보고 계시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하나님 저도 고치실 수 있나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맥스 루케이도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 아다마 라는 언덕에 사는 35세의 ‘부주내 툴레마’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주내 툴레마’는 술고래였고, 동네 망나니였습니다. 처음으로 꾸렸던 가정은 깨어졌고, 두 번째로 맞은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자녀들은 돌보지 않고,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떠넘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네 사람이 ‘부주내 툴레마’를 문젯거리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받은 근처 교회 성도들이 ‘부주내 툴레마’ 부부를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사랑을 베풉니다. 그래서 아내는 술을 끊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하지만 ‘부주내 툴레마’는 계속해서 1년이 넘도록 술을 먹고 망나니짓을 합니다. 그러다가 술을 먹고 취한 상태에서 협곡에 떨어져서 안면이 움푹 들어가는 심각한 부상을 당합니다.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던 그를 교회와 성도들이 정성껏 돌봅니다. 마침내 ‘부주내 툴레마’도 술을 끊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월드비전에서 일을 하는 ‘매스크램 트랭고’를 만나게 됩니다. 트랭고는 ‘부주내 툴레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소똥’을 보는 순간에 좋은 묘안(妙案)이 떠오릅니다. 트랭고가 소액 대출을 받아서 ‘부주내 툴레마’에게 소 한 마리와 외양간을 사줍니다. 그리고 소똥으로 메탄과 비료를 생산해서 팝니다. 그러자 1년 만에 대출금을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자식까지 키울 형편이 됩니다. 소가 10마리가 되고 염소가 30마리가 됩니다.

이 이야기를 책에 소개하면서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씁니다. ‘이 모든 기적은 누군가를 유심히 살펴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위로하시고 해결해주시는 방법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개의 점보다도 못한 우리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에디오피아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망나니였던 ‘부주내 툴레마’에게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푸시고, 함께 해주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음성으로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가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답을 요구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답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며,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앞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로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