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8-10절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맨해튼에는 관광객들이 가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인들조차 지나가면서 고개를 돌리고 가는 특별한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타임스퀘어 근처 웨스트 42번가에 있는 입니다. 이 시계는 1989년 세이모어 더스트(Seymour Durst)라는 부동산 재벌이 설치했습니다. 처음 를 설치할 때, 미국의 부채(負債)는 약 2조 7천억 달러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나라 빚은 계속 불어나서 현재는 국가 부채가 20조 달러가 넘습니다. 그리고 이 시계 아래에는 미국인 한 가정이 얼마의 빚이 있는지도 표시되어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한 가정 당 부채가 약 9만 달러, 우리 돈으로 1억 2천만 원쯤 된다고 합니다. 는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국가의 빚과 개인의 빚이 있다는 경각심을 깨우치기 위해 만든 시계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시계에서는 미국의 부채가 늘어날 때마다 숫자가 늘어나며 ‘딸깍딸깍’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계를 보기 싫어서 근처에 가면 고개를 돌려버리고, 일부러 이 시계 근처를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채는 누구에게나 부담이 되고 듣기 싫어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죄를 부채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서는 ‘죄를 지었다’라는 말을 ‘빚을 졌다’라고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 중에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죄’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으로는 ‘부채’라는 단어입니다. 즉,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의 부채를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뜻이 됩니다.

인간은 창조 이후부터 지금까지 죄의 부채들을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쌓아가고 있습니다. ‘죄’라는 의미의 헬라어는 ‘하마르티아’입니다. 이 단어 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과녁에 벗어난 것은 모두 죄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국가부채 시계’처럼 오늘도 우리가 짓는 온갖 죄 때문에 끊임없이 하늘에 있는 죄의 부채 시계가 늘어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부채를 쌓아가고 있으며, 그 죄의 부채는 심각한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누군가에게 빚을 진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피하고, 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의 부채를 진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떠나서 숨으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실 때에는 정말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하나 님과의 관계 역시 좋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창조를 하실 때마다 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영어 표현으로는 간단하게 “Good”입니다. 특별히 우리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좋으셨던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부채를 쌓은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받아 마땅한 우리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8)

여기에서 ‘바람이 불 때’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레 루아흐 하이욤’입니다. 히브리어로 ‘루아흐’는 ‘영적인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레위기 26장, 신명기 23장, 사무엘하 7장 등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 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신령한 기운을 가리킵니다. ‘동산에 거니신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타 할레크’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기운 속에 실제로 임재하셔서 아담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본문의 상황은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하여 하 나님을 피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상황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엄청난 죄의 빚을 지고 숨어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마이어(Mayor)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기할 수 없으셨기에 적절한 시점에 그들을 찾아오신 사건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신 가장 큰 이유는 여전히 아담을 사랑하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스런 음성으로 ‘나는 여전히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라며 친히 죄인인 아담을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아담에게 하신 질문이면서, 동시에 우리 인류에게 던지신 첫 번째 질문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쉬운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집, 교회, 시장 등에 있다고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도 자녀에게 이렇게 질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이 질문을 할 때에는 거의 정답을 알면서 물어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독서실, 학원 등이라고 대답을 하면, 음성만 들어봐도 PC방에 놀러갔는지 알아채는 것이 바로 부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질문은 조금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 아담을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뜻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네가 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가장 먼저 하신 질문인 “네가 어디 있느냐?”는 책망과 경고의 의미가 아닙니다. ‘네가 내 말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으니, 너를 찾아내어서 벌을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긋난 길로 가는 자녀를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인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이 닥쳐와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있어야 할 자리 에 있는 것이 명예이자, 축복입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9·11 테러입니다. 이때 많은 사람은 비행기가 돌진해 빌딩을 들이박는 실제 사건을 보면서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건 직후, 뉴스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이 빌딩에서 급하게 뛰쳐나오는 장면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딩이 곧 무너질 것 같은 매우 급한 상황에서 거꾸로 빌딩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방관들과 경찰들이었습니다. 빌딩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과는 달리, 죽음을 무릅쓰고 곧 무너질 것 같은 빌딩으로 들어가는 소방관들과 경찰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습니다. 위험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소방관이 있어야 할 자리는 사고 현장입니다. 아마 소방관들이 두려워서 밖에 있었다면 평생 죄책감과 부끄러움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현장이지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던 소방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합니다.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은 명예를 얻게 됩니다. 바로 9·11 테러의 현장에서 900명이 넘는 소방관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서 하신 질문에도 “아담아, 네가 있어야할 자리, 내 품으로 돌아와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성도의 인생에는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아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0)

이처럼 두려움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이후 성도들의 삶에서 가장 달라진 것은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우리에게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두려움에 얽매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사 41:10)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참으로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움은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어느 곳이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청난 두려움 속에도 부모와 함께 있는 자녀는 두 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함께 있으면 아이들은 2층에서도 부모를 향해 그대로 뛰어내립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부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가만히 있어도 두려워서 울고 맙니다.

아담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벗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죄를 지은 후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로 만들어서 입고 있는데도 오히려 부끄러움이 심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어버립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5)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벌거벗었는데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곁을 떠나면 부끄러움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을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의 삶에 온갖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기 전에는 헛되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결혼식을 올릴 날도 함부로 정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손(損)이 있는 날인지, 없는 날인지 따지고 신경을 씁니다. 잠을 자는 것도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땅 아래에 수맥(水脈)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못도 함부로 박으면 안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궁합을 봐야 합니다. 언뜻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헛된 미신에 사로잡힌 삶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염려, 불안, 두려움에 얽매여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려고 하고,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인생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2. “네가 어디 있느냐?”는 ‘너는 내 앞에 선 존재’라는 뜻으로 하신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 기껏해야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서 하나님을 속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기준이나 생각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시고, 사람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하나 님 앞에 우리는 숨을 곳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여러 가지 고난 또는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은 나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그리고 나를 지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며, 나에게 죄의 유혹이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과 죄의 유혹은 내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 39:9)

즉,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겁니다. “당신의 남편이자, 나의 주인인 보디발은 모를 수 있습니다. 집에 함께 있는 여러 하인들의 눈은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냐”는 요셉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숨을 곳이 없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을 여는 열쇠는 바로 ‘코람데오’(Coram Deo) 바로 ‘하나님 앞에 서’이다.” 그래서 칼빈이 늘 강조하는 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안상헌’의 『미치도록 나를 바꾸고 싶을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책에서 나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자극과 반응’을 기억하라고 조언합니다. 사람은 정말 잘 안 바뀝니다. 원망과 불평하는 모습을 바꾸고 싶은데 잘되지 않습니다. 회개해도 다시 죄를 짓는 자신을 볼 때가 많습니다. 이 때 자극과 반응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을 바꾸고 싶다면 큰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두 번 다시 죄를 지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극에 대한 반응은 겸손과 솔직함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서,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회개하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솔직함으로써 반응해야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 가는 길에 길바닥에 도시락이 놓여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도시락을 챙겨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거기 놓아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놀란 아이는 도시락을 그 자리에 다시 둡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이 소리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아이는 다시 도시락을 챙겨서 가려고 합니다. 그때 다시 “거기 놔둬라”라는 고함이 들립니다. 그제야 깜짝 놀라서 위를 쳐다보니 전봇대 위에서 전선을 수리하는 아저씨가 위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가져가려던 도시락은 그분의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다 보고 계시는데, 우리는 아무도 없다며 죄를 지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 에서 선 존재’라는 뜻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꼼짝하지 마라’라는 부담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니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습 니다. 죄악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어려울 때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며, 우리를 지금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우리를 돌이키시고, 회복시키시고 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을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사실, 버림받은 인생이라면 하나님이 찾아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다시 한번 부르십니다. 바로 이 질문에는 ‘나는 여전히 너를 포기하지 못한다’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다시 한번 회복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튤리안 차비진(Tullian Tchividjian)은 그의 책에서 ‘처벌 대신에 또 다른 책임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인생의 실패자가 되어 고향으로 가서 다시 어부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 지 못합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해주셔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해변에서 떡 과 생선을 구워주십니다. 밤새도록 떨며 수고했지만, 빈손이었던 제자들 입니다. 죄책감에 두려움에 떨던 실패한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와서 조반을 먹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에게 “네가 어떻게 나를 세 번이나 부인했냐?”라고 책망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베드로의 죄를 용납하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책임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시며 안타까워하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어린 양을 먹여라, 또 내 양을 치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실수투성이에 죄인인 우리의 모습 보다 회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 속에서도 철저하게 회개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실패를 인생의 새로운 ‘터닝포인트’(Turning Point)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패가 변하여 기쁨이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여인이 모두 떠나가고 없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죄를 용납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악에서 결단하여 돌이킬 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이현수 목사의 『위대한 실패』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절망과 실패 속에서 깨달은 것을 쓰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① 당신의 죄와 실패를 하나님 앞에 인정해라. ② 당신의 죄와 실패를 고백하고 회개하라. ③ 당신의 죄와 실패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④ 당신의 죄와 실 패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이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분명히 정산(精算)해야 합니다. 집착, 후회, 미련, 상처, 죄책감을 모두 털어버리고 새 출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실패한 죄인들의 비참한 말로(末路)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회개한 다음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흔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를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라고 합니다. 이분은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영접하게 하고, 죄인들의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를 연구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설교를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설교에는 특별한 것은 없지만, 한 번도 빠짐없이 들어가는 구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God has prepared a great future for you”,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위대한 미래를 준비해놓으셨다”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죄악 속에 빠져 헤매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도,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너를 위해 위대한 미래를 준비해놓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 상 아담에게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을 벗어나고, 하나 님을 떠난 자들을 향해서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질문을 들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회복할 기회를 주시는 때입니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