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장 36-40절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한국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가깝고도 먼 단어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합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 사이인데도 “사랑해”라는 말을 어렵게 생각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책에 나오는 유학간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입니다. 유학간 아들이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고마워서 한국으로 전화를 해서 용기를 내어서 말을 합니다.

아들: 아빠, 저에요. 아빠 사랑해요.
아버지: 와, 니 돈 필요하나.
아들: 아뇨, 그냥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 니 술먹었나…

퇴근한 남편이 아내를 안으며 “여보 사랑해”라고 이야기를 하면, 무슨 잘못을 했냐고, 빨리 말하라고 채근을 합니다. 유명 강사 김창옥 교수의 강의에 나오는 어릴 적 본인의 경험입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전라도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김창옥 교수는 어릴 적 바닷가에 놀다가 파도에 휩쓸려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했습니다. 바닷가는 위험하니 놀러가지 말라는 엄마의 명령을 어기고 갔다가 당한 일이라 비밀로 해야 하는데, 그 광경을 목격한 막내누나 김미자 씨가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동생이 물에 들어가서 죽을 뻔한 소식을 전합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외국인 엄마들은 이렇게 말하죠. “아들, Are you ok? Don’t worry, it’s fine, I love you.”하고 안아 준답니다. 그런데, 김창옥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한다고 합니다. “뭐단디 살아돌아왔냐… 그냥 빠져 죽어불제… 하여튼 말 안 듣고 나간 놈은 죽는 게 답이여…”

아이들이 놀다가 접시를 깨도 외국 엄마들은 “Are you ok? Don’t worry, it’s ok, I love you.”하고 꼭 안아주는데, 한국 엄마들은 “뭐단디 냄겨놓냐… 다 깨불제… 다 깨부러… 너도 오늘 깨불자…”하고 회초리로 깨부수는 겁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이런 특징이 하나님 사랑으로도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고 높이는 것은 세계에서 일등인 한국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여전히 서툴고 어색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명령은 잘 순종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표현은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속마음과 상관없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대충 사랑해서도 안 되고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8)

하나님을 사랑하되 대충 사랑해서는 안 되고, 마음을 다해서(전심으로), 나의 뜻을 다해서(의지를 다해), 그리고 나의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크고, 중요하고, 급하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없다고 해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이라 함은 선택권 없는 절대명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계명이라는 말 자체가 ‘작은 거인’, ‘차가운 열정’과 같은 옥시모론(Oxymoron, 모순어법)입니다. 사랑의 가장 숭고하고 최고의 가치가 자발성인데, 어떻게 사랑을 하라고 명령할 수 있냐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대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 같은 분들이 대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사랑이 서툰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으로 태어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사람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사랑과 성숙의 함수관계는 사랑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성숙하는 단계가 언제냐면 누군가를 사랑할 때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사랑하게 되면, 성적이 오릅니다. 직장인이 자기의 일을 사랑하면 곧이어 승진이 됩니다. 아이가 공놀이를 좋아하면 커서 선수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저절로 성장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가장 많이 성숙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단계를 넘고, 알아가는 단계를 넘어, 사랑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합니다. 이때가 여러분의 믿음에 가장 큰 진보를 가져다주고, 신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여러분의 지난날을 돌아보세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그때 여러분의 믿음이 대부분 가장 많이 자랐을 겁니다. 그때 모두 찬양을 인도하려고 기타도 배웠고, 아이들 교사하려고 공과공부도 했고, 하나님께 찬양하려고 찬양대원도 되었고, 대부분 지금 하고 있는 사역이 예수님을 사랑하던 그때 모두 시작한 일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무슨 일을 해도 힘들지 않기 때문에 그때 가장 많은 일을 하게 되고, 실력도 늘고, 가장 열매도 좋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단계가 되면, 신앙생활이 어렵지 않고 쉬워집니다.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도 힘들거나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부담되기보다 사모하게 되고, 교회 가는 길이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데, 갑자기 교회 가는 길은 가까워지고, 집에 가는 길이 멀어지게 됩니다.

좋아하는 곳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습니다. 연애할 때 울산에서 춘천까지 사모를 만나러 올라가는데 차로 8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춘천에 갈 때는 하나도 멀지 않았는데 울산으로 내려가는 길은 멀고 험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면 힘들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압니다. 남편이 “여보, 부엌에서 물 한잔만 가져다줘요”하는데 사랑하면 방법을 찾고. 사랑하지 않으면 핑계를 찾는다는 것을요.

사람은 사랑할 때 가장 많이 성숙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화내는 것도 절제하고,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나쁜 습관도 끊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요리 실력도 키우고, 커피도 내리고, 여행에도 전문가가 되고, 옷 잘 입는 법도 배우고, 배려, 인내, 친절도 배우고, 사랑은 사람을 가장 빠르게, 가장 많이, 가장 깊게 성숙시키고 자라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온유하라, 절제하라, 질투하지 말라, 참아주라”라는 명령보다는 그저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면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서는 온유하라, 질투하지 마라, 교만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하는데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하늘에서 이 땅까지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이곳까지 오신 것입니다. 우리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만 하나님께로 가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하늘에 계실 수 없어서, 우리 곁으로 오셨고, 우리 곁에 계시기도 너무 먼 것 같아,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를 향해 이렇게 가까이 자라나고 계시는데,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은 어떻게 하나님께로 자라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한 가지 유사품에 주의해야합니다. ‘사랑한다’라는 단어의 가장 유사한 단어는 ‘좋아한다’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 좋아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라고 했지, 좋아하라고 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 좋아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좋아하라”고 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어느 글에 보니,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아주 잘 설명해놓았습니다.

‘좋아하는 것’(Like)은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Love)은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다…. ‘좋아하면’ 욕심이 생기고, ‘사랑하면’ 그 욕심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해’는 들으면 가슴이 설레는 것이고, ‘사랑해’는 들으면 눈물이 나는 것이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꽃을 꺾지만,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꽃에 물을 준다. ‘좋아하는 사람’은 내 곁에 두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은 것이다.

좋아하면 내 소유로 만들지만, 사랑하면 너의 소유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면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마술램프처럼 대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면 내가 가는 길에 함께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님가시는 길에 나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시기만 기다리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나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속에서 여전히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라고 사랑을 명령하셨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사랑은 자발성이 기초될 때 숭고한 것인데, 이 숭고한 사람을 강요한다고 되는 것인가? 그냥 사랑하라고 하시면 되지, 이것이 명령,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사랑을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의 책에서도 소개를 한 적이 있는 뉴욕에서 성공한 사업을 이루시고 난 뒤에 은퇴를 하고 지금은 이라고 하는 재단을 만들어서 인도에서 제일 빈민지역인 비하르 지역에 급식공장을 만들어 지역주민에게 직장을 주고, 만들어진 진공급식은 아프리카 학교에 공급하고, 공급한 급식대신 커피를 받아 커피사업하고, 그 수입으로 다시 인도회사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선교사업을 하시는 채요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을 만나면 참 재미있는데 툭툭 던지시는 말에 명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이 한번 이런 고백을 하시더군요.

‘내가 왜 이렇게 뉴욕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7성급 호텔 부럽지 않은 일류아파트를 가지고 일년에 며칠 자보지도 못하고 늘 인도, 아프리카에서 잠을 자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내가 비하르의 사람을 사랑하냐고 스스로 물어보면 뉴욕을 버리고 인도에서 살만큼 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에티오피아의 아이들에게 급식을 줄만큼 내가 그 아이들을 사랑하나?’하고 물어봐도 에티오피아에 가서 급식을 나누어 줄만큼 그들을 사랑하는 게 아닌데, 내가 왜 이 일을 70살이 넘어도 하고 있는지 물어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어느 날은 ‘내가 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왜 이일을 하는가?’하는 질문이 심각하게 올라왔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사랑을 감정으로 하면 감정은 언젠가는 변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지하고 이 사역을 했다면 열두 번도 그만 뒀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명령.’ 사랑이 명령이 되지 않고 감정으로 남아있으면 그 감정은 금방 식어버리지만, 계명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거지요.”

여러분, 그렇게 뜨겁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첫사랑이 왜 식은 줄 아세요? 그렇게 충성하던 교회 사랑이 왜 갑자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식은 줄 아세요? 계명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준엄한 사랑요구가 계명임을 안다면, 그것은 크고 작은 서운한 일에, 실망감에, 소외감에, 그렇게 뜨겁게 하던 일을 내려놓지 않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계명을 붙들고, 그 모든 감정을 뚫고 앞으로 계속 사랑하며 또 다른 수준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듣고 있으면 ‘나는 사랑하면 안 되나?’하는 생각도 올라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99% 나온다면,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1%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안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명령하지 않아도 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자기 사랑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고백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자아를 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을 잊고 부인할 정도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멈추는 순간 무서울 정도로 그 사랑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기만 먹이고, 입히고, 챙겨주기 시작하는 자기사랑이라는 우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최병락 목사

침례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졸업(B. A.)
사우스웨스턴신학교 졸업(M. Div. Biblical Language)
Dallas Theological Seminary(M. A. 성서연구과정 수학)
사우스웨스턴신학교(Th. M. Evangelism 수학)
(前) 세미한교회 Founding Pastor 및 담임목사
(現) 사우스웨스턴신학교(D. Min. 과정 중)
(現) 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

■ 저서
『다시 일어남』, 『부족함』, 『쏟아지는 은혜』, 『자라가라』, 『모든 것을 살리는 예배를 회복하라』, 『어둠 속에 부르는 노래』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