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장 13-15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2002년 탤런트 신구 씨가 했던 “니들이 게 맛을 알어?”라는 말이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월드컵 유치와 연관이 되어서 한국인들의 식용개고기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되고, 한국인의 정서가 야만성으로 오인될 즈음에 언어유희로 바다에서 나는 게를 빗대어, “니들이 게 맛을 알어?”라며 외치는 이 문구는 즉시 전 국민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닷게를 베고 누워 “니들이 게 맛을 알어?”라고 외치는 신구 씨의 표정과 질문은 참 명품입니다. 단순히 사전적으로 “알어?”가 아니라, 바다의 한가운데서 산전, 수전, 공중전, 해상전을 다 겪고 건져 올린 그 게의 깊은 맛을 식탁에 앉아서 남이 발라주는 것을 먹는 너희들이 알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표정은 참된 게 맛을 맛본 사람만 낼 수 있는 표정연기입니다.

게 맛 하나의 맛을 안다는 것도 저마다 수준이 다른 것 같습니다. 식당에 가서 예쁘게 종업원이 발라서 내어놓은 게를 한입 마늘 버터소스에 찍어 먹으면서 ‘아, 알겠다 이런 맛이구나…’하는 그 아는 것과, 알아버린 그 맛 때문에 집채만한 파도를 뚫고 나가는 사람이 아는 맛은 하늘과 땅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같은 수준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아는 깊이가 다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맛을 보는 것으로 표현하는 곳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시 34:8a)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맛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맛보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맛이던가요? 사람의 혀에는 오감이 있다고 합니다.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 여러분이 맛보고 알게 된 하나님의 맛은 어떤 맛입니까? 다윗은 자기가 맛보고 알게 된 하나님의 맛은 선한 맛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체험해서 맛본 하나님의 맛은 어떤 맛입니까? 너무 무섭고 혹독한 짠맛입니까? 아니면 고통과 아픔을 준 쓴맛입니까? 아니면 시마다, 때마다 힘과 도움을 주시는 단맛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대충 알면 쓴맛, 짠맛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안다는 것이 매우 귀찮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물질을 드려 헌금하고, 시간을 바쳐 봉사한다는 것은 쓴맛과 짠맛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점점 하나님을 알아가는 깊이가 깊어질수록 짠맛과 쓴맛은 사라지고, 깊고 깊은 단맛과 감칠맛을 느끼게 되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윗이 말한 맛,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입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삶에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진답니다. 맛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은혜와 평강의 단맛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반대로 하면, 예수님을 모르면 모를수록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단맛을 주시려고 이렇게 알아 가라고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인생이 단맛 이 되기도 하고, 여전히 쓴맛이라도, 쓴맛 속에 숨어있는 단맛을 맛보는 초절정 미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호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쳤던 외침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a)

대충 알지 말고, 하나님을 알되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호세아가 말한 ‘알다’라는 단어는 그냥 아는 것이 아닌 체험한 사람만이 아는 ‘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할 때, 힘써라는 뜻의 원어 ‘라다프’는 전력질주, 전력투구 라는 뜻입니다. 류현진 선수가 공하나 하나를 전력투구를 하듯, 그렇게 하 나님을 힘써 알고, 또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믿으라는 말씀으로, 영적으로 거듭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태어났다면, 그 다음 단계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13절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엡 4:13)

사람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될 때 온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온전히 자라는 것입니다. 믿으면 됐지, 아는 것까지 강요하지 말라고 으름장 놓으면 안됩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분들께 소개하고 싶은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 8:2)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다는 착각 때문에 배우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른다는 그 겸손함 때문에 날마다 알아가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이 서른밖에 안되었는데도 예수님을 다 안다고, 알아가지 않아 영적 성장판이 닫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80세가 넘어도 예수님을 날마다 더 알아가려고 힘써, 성장판이 활짝 열려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어느 수준까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13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RSV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to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상태의 수준까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라남의 목표가 예수님의 어릴 적 모습 을 닮는 데까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장 성숙하셨을 때 그 모 습에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충만한 상태에 계셨을 때의 수준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한국 기독교의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준과 목표와 바라봄의 대상이 ‘Just like Jesus’, 충만한 ‘예수님처럼’ 되어 야 하는데,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Just like 집사님’, ‘집사님처럼’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고, 어느 집사님처럼만 되면 그때부터는 만족하고 자라남을 멈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목회자 후보생들도 목표가 예수님처럼 되어야 하는데, 어느 성공한 목사님처럼 되려고 하니까, 그 수준이 그 목사님을 넘어서지 못하고 멈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일 큰 착각은 예수님은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다른 것을 더 알아가려고 집중하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착각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신학교에서 20년 이상 공부하고, 강의도 하면서 수많은 신학생들과 목회자 후보생들을 만나보았지만, 그들 중에, 예수님을 더 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신학생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엄청난 착각 한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학교 입학 전부터 알 만큼 안다”는 착각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 후부터는 예수님에 대해서 더 연구하고, 알고, 기도하고, 찾지 않습니다. 대신, 교회사 2천 년동안 지나간 신학자들을 예수님보다 더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그들에 대해서 남들보다 모르면 자괴감을 느끼고,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한 시간 동안 그의 일대기와 신학을 이야기해야 신학생이 된 것으로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는 지금까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루터(Martin Luther), 칼빈(Jean Calvin), 웨슬리(John Wesley), 칼 바르트(Karl Barth), 불트 만(Bultmann)을 더 몰라 속상해 하는 신학생은 수도 없이 봐도, 예수님을 더 몰라서 속상해하는 신학생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알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 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8-19)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 자리를 뱅뱅 도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날마다 알아가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은 회전목마를 타고 돌며 똑같은 광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깊은 계곡을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가문비 나무의 노래』의 저자인 마틴 슐레스케Martin Schleske)는 “신앙의 순례자는 ‘아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찾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미 다 아는 사람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숲의 계곡을 다니며 그 오묘한 신비를 찾아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깨달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한 고백을 들어봅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8)

세상의 모든 지혜를 합친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지식을 만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배설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존 파이퍼(John Piper)는 ‘모든 보물을 배설물로 만드는 보배’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만들어 버리는 진짜 보배라는 뜻입니다.

마치, 탤런트 공유가 대한민국 남자 모두를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듯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보배가 세상의 모든 보배를 배설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이 존 파이퍼의 ‘모든 보물을 배설물로 만드는 보배’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매일 매일 알아간다는 것은 매일 매일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석을 캐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이 필요 없거나 몰라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앎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부터 분명히 알고, 나중에 알아도 되는 것은 나중에 알면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데, 예수님만 모르고 나머지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오늘날, 교회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알고, 교회직제, 교회운영, 성경 66권의 순서와 연대기로 성경을 배열할 수 있고, 성서의 지리는 백지를 꺼내놓고도 완전히 그려낼 줄 아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에 많은데, 정작 알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지금 무엇을 보시고 울고 계시는지, 예수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고, 예수님 발은 어디를 향하고 계시는지는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고, 관심 없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조금 아는 것이 머리로 많이 아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날마다 조금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가슴으로 알아가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몰라도 되는 것은 너무 많이 알고, 알아야 하는 것은 아는 게 없는 모습이 우리 한국 기독교를 이렇게 값싼 복음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즈음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가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 무엇을 하시고 계십니까?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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