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2장 1-10절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 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 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 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 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 왕 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 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지독한 폭염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서울의 수백 배 되는 면적을 태워버린 엄청난 산불이었죠. 1902년에 문을 연 ‘빅 베이슨 레드우드(Big Basin Redwoods)’ 주립공원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요. 최고 수령 2000살의 삼나무를 포함해 삼나무들이 가득 들어 서 있는 숲이에요.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 발생한 산불이 덮치면서 공원 내에 작은 빌딩과 캠핑장 시설들은 이미 모두 불에 타 사라져버렸어요.

그런데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 공원의 삼나무들이 이 엄청난 불길에도 살아남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 사진기자가 화재 피해를 촬영하기 위해 숲에 들어갔을 때 고대의 삼나무들은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던 거예요. ‘숲의 어머니’로 불리는 키가 100m 넘는 삼나무도 모두 건재했어요.

가옥과 빌딩마저도 집어 삼키는 화마 속에서도 어떻게 삼나무가 건재하게 보존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나무의 회복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에요. 피해를 입어도 빠르게 본래 상태로 회복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삼나무는 껍질에 수분과 습기를 넉넉히 머금고 있어서 화재에 강하다는 것입니다. 머금고 있는 습기 때문에 나무에 불이 잘 붙지 않는 거예요. 특별히 삼나무들은 불이 나면 경쟁 식물들이 사라지니 번식의 적기라고 여겨서 더워진 열기로 인한 상승기류에 씨앗을 날려 보냅니다. 그래서 재난을 만나는 상황에서도 삼나무 숲은 건재하게 보존된다는 거죠. 소멸의 위기를 생명의 기회로, 너무 신비롭고 멋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저는 캘리포니아주를 덮친 이 엄청난 화마가 오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참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의 전염병이 마치 우리가 잡을 수 없는 불길같이 느껴집니다. 통제 범위를 벗어났어요. 불길이 번져가지만 막을 길이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에요. 너무 많은 것을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불길이 어디를 향할지,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히고 끝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라서 더 두렵고, 무기력하여 화가 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빅 베이슨 레드우드 숲’의 삼나무 이야기가 더욱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 불길 속에서 우리가 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지나가도록 그냥 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이 흔들리는 시간 안에서도 내부적 회복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빠르게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회복력 말이죠.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영적 회복력을 갖춘 사람이에요. 그 불길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중심을 지키는 사람인 것이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고, 다시 기도의 자리에 엎드려, 다시 약속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오늘 의 평안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우리는 우리 존재에 생명의 능력을 머금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 면역력이요.

우리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고자 하는 모든 어둡고 악한 것들이 우리 영혼의 생명을 소멸시키지 못하도록, 성령의 능력, 말씀의 능력을 머금고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모든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해 야 합니다. 빅 베이슨의 삼나무가 소멸의 위기를 생명의 기회로 삼고, 고 유의 회복력과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오히려 이 불길을 역이용해서 생명의 씨앗을 퍼트리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저와 여러분의 이야 기가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이렇게 기록되기를 사모합니다. ‘한 시대를 휩쓸고 지나간 화마 속에서도 그들은 믿음으로 건재했다’고요. 오히려 이 위기를 기회로 여겨 부흥의 역사, 재건의 역사, 회복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빅 베이슨의 삼나무와 같아 보이는 한 사람이 오늘 본문 속에서도 보석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황폐해진 심판의 화마 속에서도 영적 회복력과 생명력으로 한 시대를 재건하고 회복하여 부흥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소멸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뒤바꾼 사람, 그 는 느헤미야였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루기까지, 자 신을 둘러싼 엄청난 방해와 공격, 그 역경과 시련의 불길 속에서 어떻게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방해의 장벽을 넘어서게 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 월에 나는 왕에게 술을 따르는 일을 맡았기에 술을 가져 다 왕에게 따라 드렸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내가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느 2:1, 우리말성경)

성경은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 월’이라는 시점을 우리에게 말해주죠. 니산 월은 태양력으로 3-4월에 해당하는데요. 느헤미야가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알리면서 시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죠. 1장에서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울며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할 때의 시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 기슬르 월 내가 수 산 성에 있을 때에” (느 1:1, 우리말성경)

기슬르 월은 11-12월에 해당합니다. 자, 그러니까 지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한 11월부터 오늘 새로운 사건의 전개가 시작되는 2장의 1절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입니까? 약 4개월에서 5개월 의 시간의 간격이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이 행간의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요? 느헤미야가 한번 기도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5개월의 시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5개월의 시간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문제는 지속되고, 해결은 지연되는 시간이 있어요.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시작된 기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감동을 느끼고, 의지를 가지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면서 시작된 기도들이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작정하여 시작된 기도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러고서는 행방불명이 됐어요. 그 기도가요. 시작은 했으나 끝을 맺지 못한 기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에요. 구함은 있었지만 응답이 없는 기도들로 중도 하차 한 일이 우리 삶에 얼마 나 많으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은 했으나 끝이 없는 중도 하차한 기도들에는 이유가 있어요. 무엇 때문입니까? 기슬르 월과 니산 월의 간격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니산 월은 바벨론식 달력의 명칭인데 그 뜻은 ‘결실하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기도가 응답이 되고, 열매가 되기까지 그 시간의 간격을 견디지 못해서 소멸된 기도가 너무 많다는 것 이에요.

여러분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 기도는 응답의 열매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여러분의 기도가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르나, 그렇지 않아요. 기도는 응답이 오는 길을 열고 있어요. 길이 완성되어야 그 길로 하나님의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죠. 새로운 변화, 새로운 시작이요. 하박국 선지자는 불합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왜 의인이 고통을 받고 악인이 득세 하는지 고통하며 하나님 앞에 원망 섞인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2장에 들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내가 초소에 서서 망대에 자리를 잡고 주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실지, 내 호 소에 주께서 뭐라고 응답하실지 지켜보겠습니다.” (합 2:1, 우리말성경)

자기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그 응답을 기다리며 초소 위 망대에 서서 기다리겠다는 것이에요. 이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보세요.

“그러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셨다.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달리는 사람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왜냐하면 이 묵시는 정해진 때가 돼야 이뤄지고 마지막 때를 말하고 있으며 반드시 이뤄진다. 비록 늦어진다 해도 너는 기다려라. 반드시 올 것이며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합 2:2-3, 우리말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정해진 때가 돼야 이루어집니다. 니산 월의 그날, 열매가 결실하는 그날,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그날이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에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다 들으시고 받으시는 정해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기다림 뒤에 응답이 옵니다. 기다림은 거절이 아니라 완성이에요. 기다림을 기도 응답의 거절이 나 혹은 하나님의 부재로 받아들이면서 완성의 단계에서 이탈하시면 안 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가 도래하기를 기다렸어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성은 훼파된 채로 황폐하고, 세상은 권력과 물질로 돌아가는 거 같지만 새로운 변화와 회복은 오지 않고, 지나간 영광과 남겨진 역사만 있을 거 같았지만 그는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렸던 것이죠. 상황의 변화가, 문제의 해결이 즉각 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언젠가 하나님 이 반드시 기회를 주시고 때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지녀야할 기도의 믿음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올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으세요. 여러분의 기도의 초소, 거룩한 기도의 망대에 서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뭐라고 응답하실지 기도하며 기다리세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우리 인생의 니산 월, 곧 결실하는 때,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는 그 시간까지의 간격을 기도로 채우며, 하나님의 응답이 오는 길을 계속해 서 열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 앞에서 선 느헤미야의 슬픈 기색을 보고 왕이 묻습니다.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네가 아프지도 않은데 네 안색이 왜 그리 슬퍼 보이느냐?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무척 두려웠지만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만수무강 하옵소서! 제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성이 폐허가 됐고 그 성문들이 불에 타 허물어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느 2:2-3, 우리말성경)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보이는 것은 고대 왕실에서는 절대 금기시되는 일이었어요. 특히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를 보면 왕에 대하여 굳은 표정을 지었다는 이유로, 불길하다고 종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절 2대 군주인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느헤미야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는 것은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중죄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느헤미야의 모든 성공적인 삶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기였던 거죠.

그래서 느헤미야도 당황하고 심히 두려워했어요. 그런데 너무나 두렵고, 죽을 수도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를 이끌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려운 위기의 순간에도 그를 이끌고 있었던 것은 바로 목적이었어요. 그의 인생에 부여된 사명과 비전이요. 그의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었던 하나님의 꿈 말입니다.

용기란 두렵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아주 심히 두렵지만 거기서 멈출 수 없는 거예요. 포기할 수 없는 거예요. 내 가슴속에서 당겨진 비전의 활시위가 이미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있기 때문에요. 이 활시위가 당겨진 사람을 가리켜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라보았고 그리고 기도해요. 그래서 두렵지만 외치는 것이고, 불이익이 예상되지만 저항하는 것이고, 방해와 장애물이 있지만 견디고 돌파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느헤미야의 삶에는 이미 이 활시위가 당겨져 있던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정한 리더는 ‘문제’속에서도 ‘목적’ 을 찾습니다. 그 안에서 ‘비전’을 봐요. 느헤미야는 문제를 만나기 전까지 는 목적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궁극적인 비전을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졌고 성문들이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 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어떻게 부르고 계신지를 알게 되었어요. 부인하고 싶지만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부담감이 삶의 불순물들을 뽑아내고 그를 이끌었어요.

오늘 여러분은 문제 속에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혹시 문제 속에서 문제 그 자체만 보고 있지 않으세요?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하며 분노하고, 그래서 무기력에 빠지지 않으십니까? 상황을 탓하고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관하며 그 자리에 멈춰있지는 않으신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문제 속에서 목적을 찾습니다. 비전을 보고,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신 마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그 두려움을 잘 알고 계세요. 약함도 아세요. 그 길 위에서 소망을 붙잡고 평안을 지키기에 쉽지 않다는 것도 아세요. 고독과 싸워야 하고, 저항에 맞서야 하고, 반대에 부딪혀야 하는 것도 아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심히 두려웠지만 왕께 말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우리 인생의 모든 두려움의 파도를 넘어 비전을 향해, 목적을 향해 계속해서 항해하기를요.

사랑하는 여러분, 목적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게 하세요. 비전을 따라 가세요. 두려움에 끌려가고, 사람들의 기대와 세상의 속도에 치여서 사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분명한 목적의식 속에서 그 꿈의 항해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전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도록, 사명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도록 그렇게 믿음으로 멈추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그 길을 가십시오. 저는 저와 여러분이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대답했어요. 3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왕께서는 만수무강 하옵소서! 제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성이 폐허가 됐고 그 성문들 이 불에 타 허물어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느 2:3, 우리말성경)

우리는 여기서 느헤미야의 답변의 지혜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으나 다르게 말하고 있어요. 뭐라고 하죠?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성이 폐허가 되었고”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인 처소인 성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다의 구심점이 되었던 예루살렘에 대해 본문 이하 그 어디에도 그 지명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루살렘 성전을 조상들이 묻혀 있는 묘소라고 말하죠.

이건 느헤미아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워딩이었을 거예요.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요. 특히나 페르시아에서는 조상들의 묘소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조상들의 묘소가 있는 성읍이 황폐하게 버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적들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라는 것은 페르시아 전통상,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크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질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상들의 묘소라고 할 때, 이에 민감한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겠죠. 예루살렘이 느헤미아에게 영적인 어떤 의미가 있건 그건 아닥사스 왕에게는 공유될 수 없는 가치예요.

대신 아닥사스 왕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의 가치에 부합하는 접점을 찾는 것이죠. 느헤미야는 왕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고, 예루살렘의 재건 에 대한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터치 포인트를 만들어냅니다. 굉장히 지혜롭죠. 저는 여러분이 이 전략적인 소통의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사회적 관계에 필요한 지혜예요. 부모님과 대화할 때도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여러분의 뜻을 전할 수 있는 말의 지혜를 구하세요. 배우자와 자녀, 동역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도요. 이런 현숙한 지혜가 필요 합니다. 직장 상사와 대화할 때도 여러분이 설득해야 하는 대상을 만날 때 에도 이런 전략적 지혜가 믿음의 청년들에게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이 사안은 굉장히 민감하고 중대한 문제였어요.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한 시도는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을 중심으로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들의 대적들이 유다 귀환민들이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성 벽을 재건하려 한다고 아닥사스다 왕에서 허위 보고서를 올렸어요. 아닥 사스다 왕은 이것을 반란에 대한 가능성으로 보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해 즉각적으로 중단 명령을 내렸었죠. 그러니까 성벽 재건 중단을 명한 장본인에게 성벽 재건을 위한 허락을 받아야 했던 거였어요.

그런데 같은 이유로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동일한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재가됩니다. 왕 자신이 금지시킨 성벽 재건을 허락해주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했겠습니까?

“왕의 마음은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어 강물과 같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대로 돌리신다.” (잠 21:1, 우리말성경) 원문을 보면 강물이라기보다는 봇물이라고 부르는 저수지의 물을 의미합니다. 보의 물은 농사를 할 때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저축해두는 것이죠. 농부는 자기 뜻에 따라 그 보의 물의 물길을 이 논에 대기도 하고 저 논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농부의 마음에 달린 일이죠. 그런 것처럼 왕의 마음이 누구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하나님 그분의 뜻대로 왕의 마음이 인도함을 받고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죠.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세요?

인생의 모든 우연적인 변수와 결정권자의 마음과 모든 상황과 환경은 다 스리시는 하나님의 결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우리는 사람에게 반응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환경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오직 그분께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 인생을 세우는 것,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삶에 끊임없이 작용해서 결정적인 타이밍과 결정적인 성취를 만드는 것, 그것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비결인 것이죠. 그리고 그 신뢰의 반응이 바로 기도입니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 하나만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일은 가능하다. 한 사람의 지도자로서 당신은 당신의 상관이나 권위자를 도저히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가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기도이다.”

느헤미야에게 아닥사스다 왕처럼,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있을 거예요. 여러분이 꿈꾸는 비전의 성 취를 위해서, 그 부르심의 길을 가기 위해서요. 오랜 기도의 제목이 응답 되고,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결정권을 가 진 대상이 저마다 있다는 겁니다. 그 대상이 마음을 열어야 여러분 인생이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어요. 반드시 세상의 인정을 얻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인기가 아니라 여러분의 일에 있어서 여러 분의 꿈과 비전에 있어서 영향력을 가지시려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 중요해요.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원리가 있어요.

제가 아는 한 자매가 어떤 형제를 결혼 대상자로 아주 오랫동안 끈질기게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절실한 기도로 문을 두드리고 부수려고 해도 그 끈기와 정성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는 그 자매가 자기가 훈련받던 중보기도 단체의 대표님을 찾아갔어요. “하나님께서 저 형제를 저에게 주신 거 같아, 그래서 저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대표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크리스천 청년들이 꼭 알아야 하는 아주 적절한 조언이었어요. “자매님, 만약 그 형제의 마음을 얻고 싶으시다면 자매가 혼자 열심히 기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형제에게 자매가 발견되어야 해요.”

이게 정답입니다. 사람의 마음은요. 문을 두들기다 못해 부수고라도 들어갈 그럴게 아니에요. 이 둘 사이에 한 가지가 끼어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발견’이예요. 그 대상이 여러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반짝거리는 비전, 꿈틀거리는 열정, 감 춰진 재능이 발견되지 않으면 묻혀버려요. 그 발견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여러분의 스펙? 여러분의 열심? 아니요. 그건 Favor. 은혜의 영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성실하게 준비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발견을 위해 기도하세요. 오랫동안 여러분이 기도로 열어둔 수로를 따라 그 보의 물이 쏟아져 흐르도록 그 대상의 마음에 기도로 길을 내는 것이에요. 물길을 만들어놔야 물이 부어질 때 그 길을 따라 흐르죠. 기억하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 아래에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저 와 여러분의 인생을 향해 새로운 은혜의 물길을 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그 은혜, 새로운 비전의 항로가 열리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느헤미야는 드디어 그 수로의 은혜의 강물이 자신을 향해 흐르는 것을 느꼈어요.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여러분 이 대답을 듣기까지 5개월이라는 시간의 기도가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그 앞 에 주어졌습니다. 느헤미야의 요구대로 왕은 그의 예루살렘행을 허락하고 언제쯤 돌아오겠냐고 물었어요. 그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죠. 자,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때 느헤미야의 반응을 보세요. 정말 감탄하게 됩니다.

“내가 다시 왕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왕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유다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유프라테스 강 건너 총독들에게 보여 줄 친 서를 써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왕의 산림 감독 아삽에게 친서를 내리셔서 성 전 옆 성문과 성벽과 제가 살게 될 집의 들보 재목을 내주도록 해 주십시오.” 왕은 내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내 위에 있었기 때문 주입니다.” (느 2:7-8, 우리말성경)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 허락만 받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성벽과 성문을 세 울 건축 자재까지 요청하고 자신이 안전하게 예루살렘까지 갈 수 있도록 친서를 부탁합니다. 맡겨 놓은 것을 찾아가는 사람처럼요. 무척이나 두려웠다는 느헤미야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자신의 모든 필요를 다 말 하고 있어요. 대체 무슨 일이죠? 정말 두려워했던 사람 맞나요? 느헤미야는 확신했던 거예요. 하나님의 최종 컨펌이 났다는 것을요. 아니 왕의 마음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 베푸시기로 결정을 하셨는데 이제 더 뭐가 두렵습니까? 다 끝난 거예요.

여러분, 이게 비전의 사람이 갖는 담대함이에요. 이 담대함이 이 확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지금 느헤미야의 요청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가 아니에요. 그는 유다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관문들이 있을 것을 정확하게 예상했어요.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대안과 해결책은 왕의 친서였죠.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의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 해결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에요.

성문과 성벽을 위한 나무, 게다가 자기가 살게 될 집의 재목까지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 목재들을 어디에서 구하는 것이 좋을 지까지 알고 있었어요. 산림을 감독하는 아삽에게서 구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느헤미야는 5개월의 시간동안 기도만 하지 않았어요. 그는 기도 속 에서 이런 순간을 수없이 그려 봤습니다. 기도 속에서 최상의 방법을 구체 적으로 그려봤어요.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에 대해서도요.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현실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위해서 현실적인 필요와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 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성취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진짜 절실한 사람은 절대 현실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허황된 것에 그 치거나, 막상 현실에 부딪힌 문제에서 우왕좌왕한다면 그만큼 절실하지 않거나, 그래서 그만큼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진짜 기도를 한 사람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진짜 절실하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부분까지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얻습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는 이 일의 시작과 완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어요. “왕은 내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내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내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은혜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저는 사모합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우리 위에 있기를요. 오늘 이 장엄한 손길을 경험하세요. 이 은혜의 손길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일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시작되게 하십시오. 저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그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유경 목사

서울 여자 대학교 학사
횃불 트리니티 (M. Div.)
(現) 온누리 교회 SNS 청년부 담당
(現) 온누리교회 대학 청년부 예배 기획 담당
(現) 홀리 임팩트 예배 인도자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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