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14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 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중략)…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 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주변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중에 애완견을 키우는 분들한테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키우다보면 그 애완견이 마치 자기가 사람인 양 행동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자려고 할 때 꼭 주인이 자는 이불 속에 들어와서 자려고 하거나, 잘못을 해서 혼내면 마치 아이들 이 어른 눈치 보듯이 애완견들도 눈치를 본다는 것이죠. 그럴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또 너무 귀여워서 애완견 키우는 기쁨을 느낀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귀엽고 예쁜 애완견이, 사람 흉내를 내면 참 귀엽고 사랑스러울 것 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애완견을 너무너무 좋아하다 못해 주인이 개를 흉내 낸다면? 하루하루 점점 개처럼 살아간다면? 그게 과연 귀여울까요? 그냥 미친 것 아닐까요?

애완견과 사람이 잘 공존해서 살려면 많은 부분 애완견을 사람에게 맞춰서 키워야 합니다. 대소변도 정해진 곳에서 가려야 하고, 여러 가지 규칙에 따른 통제가 되어야 애완견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완견과 사람이 공존하기 위해서 사람이 개처럼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존재가, 우리 삶의 수준이 애완견 수준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 지금까지 아무리 애완견을 사랑해도, 사람이 개처럼 사는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개 같은 인간(?)이 된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개는 개요, 사람은 사람인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생각할 때면 바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똑같이 사람이 되셨을까? 아니,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어떻게 창조주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수 있을까?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사실 신이 큰 기적과 능력을 베푸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요. 아니 신 정도 되면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들 그게 뭐 사실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진짜 신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요.

하지만 아무리 신이라도 정말 할 수 없는 것, 정말 하기 힘든 게 이것 아닐까요? 신이 인간이 되는 것. 창조주가 피조물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것. 더 나아가 누가 봐도 영광스러운 모습의 인간이 아닌,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시고, 가장 비참하게 죽으신 창조주의 성육신. 성경에 이보다 위대한 것,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그 말씀이 신 예수는 하나님이셨다고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즉,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분 자체셨습니다. 나아가 빛이신 그분을 통해 모든 창조물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3-4절).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신 분임을 하나님이 그에 앞서 보내 신 사람인 세례 요한을 통해 증언되었습니다(6-8절).

그러나 빛으로 오신 예수를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그분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여겨진 이스라엘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10-11절). 그러나 빛 되신 예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를 알아 본 자들이 있었고, 그분을 맞아들인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유대인이 생각한 것처럼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뜻과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 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심과 우리 가운데 사셨음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오신 예수, 성육신하신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들에 게 주시는 복이자 영광인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항상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컨대 낮엔 구름 기둥, 밤의 불기둥(출 13:21-22)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산 아래에서 그저 먼 산만 바라볼 뿐이 었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출 19:16, 18)

예언자 에스겔도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그가 본 영광의 이미지를 표현합니다. 귀 기울여 잘 들어보십시오.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겔 1:26-28)

이 말씀을 들으실 때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솔직히 뭔 말인지 모르시겠죠? 아무리 보고 들어도 사실 어떤 모습인지 잘 그려지지 않으시죠? 그런데 이것이 당시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 이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자신이 설명하고도 분명히 알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범접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당연합니다. 그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14절에 정 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구약 시대에서는 희미하게 보았던, 심지어 실제로 본다 해도 그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팔레스틴 땅의 작은 도시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신 그 예수. 그 예수의 모습과 삶을 통해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 나님의 영광을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음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12절). 그리 고 그분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은혜와 복이요, 영광임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우리의 예배이길 소망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오셨던 2,000년 전이 아닌,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우리 가운데 사시는 예수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풍성히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는 한 달에 한 번 성찬식을 합니다. 사실 더 자주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직접 명하시고 지키라고 하신 거의 유일한 예식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의 희생과 사랑, 부활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할 것을 다짐하며 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 질문드립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한다는 게 대체 뭘까요? 예수님과 하나 된다는 게 대체 뭘까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한다는 건 대체 뭘까요?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과 하나 되고, 예수를 전하는 것을 우린 너무 ‘관념적’으로 합니다. 소위 말해 ‘영적으로’ 합니다. 우린 예수님을 너무 영적으로, 관념적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몸 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그래서 그분의 몸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기억하라고 하신 예식도, 그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직접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보이지 않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게 좋은 믿음인 줄 착각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하나 되고 싶으시죠? 그럼 어떻게 하나가 되실래요? 이런 질문을 들으실 때 어떤 생각,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 ‘묵상’하고, ‘집중’하고, ‘기도’하는 것들을 생각하실 겁니다. 그냥 막연히 예수님께 정신 집중하고, 하루 종일 계속 예수님 생각하면 그분과 하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분처럼 ‘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 의 자리에서 몸으로, 손으로, 발로 그분을 믿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과 하나 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그분의 은혜와 진리를 맛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방법입 니다. 예수님은 ‘보이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보여야 합니다!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새기는 예배요, 성만찬이 되어야 합니다.

20대에 갔던 중국 선교 여행 중, 북한 접경 지역의 압록강을 따라 배를 타고 북한의 황폐한 마을들을 죽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중국 쪽 산은 나무들로 울창한데, 강 건너 북한 쪽 산은 여기저기 듬성듬성 나무가 패여서 온전한 산이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큰 공장이었을 건물들은 지붕이 뚫리고 금세 무너질 것만 같았습니다. 강변 주변과 저 멀리 마을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행색은 마치 우리나라 60-70년대 영상을 보는 것처럼 참으로 남루해 보였습니다. 그런 북한 땅과 사람들을 보며 중보하면서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가 저 땅에 들어가서 산다면, 저 사람들 모두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난 저 땅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까? 저들과 똑같이 살 수 있을까?’

솔직히 전혀 자신이 없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 그때 조금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의 오심의 의미와 크기를 말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말만하고 듣기만 했는데 그때 성육신의 의미와 그 크기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를 향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낳고 기르니 생각이 하나 추가됐습니다. 만약 저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 아들, 내 딸을 저 땅에 살게 할 수 있을까?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내가 가서 순교할지언정 절대 제 아이들은 보낼 수 없겠더라고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난 예수님의 성육신,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와 깊이와 크기를 절대 알 수 없다.’ 같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 1장의 이 말씀이 동일하게 이 땅을 사는 우리의 믿음, 고백이길 소망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 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 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1-3)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진리 안에 거하게 되고, 그래서 그 영광 안에 살게 된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마음 다해 찬양하고 감사하는 시간되길 소망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육신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또한 이 세상 가운데서 그 성육신의 사랑과 은혜를 몸으로 전하는 교회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과 삶을 통해 세상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 보고, 만지고, 듣게 되길 축복합니다.

노한석 목사 하늘벗교회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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