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7장 1-8절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중략)…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누구나 자기 인생에 버킷 리스트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어린시절 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여행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여행지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어요. 최근에 도보 여행을 하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 길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쇠이유'(SEUIL)라는 프로젝트에 대한 것이었어요.

‘쇠이유’는 프랑스어로 ‘경계’ 또는 ‘문턱’이라는 뜻인데요. 프랑스의 독특한 교육 방법을 말해줍니다. 프랑스에서는 비행 청소년을 교화시키고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서 치유 상담소와 그에 대한 쇠이유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범죄 청소년에게 징역대신 1,800-2,000Km를 걷게 하는 것인데요. 자발적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고 쇠이유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게 되면 비 프랑스어권에서 3개월간 1,800Km를 걷게 됩니다. 동행인으로 치유 상담사와 함께 속도를 맞춰서 걷고, 걷는 중에는 누구도 만날 수 없고 말할 수 없어요. 특별히 3가지 물품이 금지되는데 그것은 휴대폰, 음악, 음주나 마약 등입니다. 쇠이유 프로그램의 이런 조치는 자기 마음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차단하는 것이에요. 처음에 자신이 왜 이 길을 걷고, 왜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지만, 걷는 과정들을 통해서 청소년들의 인격 형성에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쇠이유를 통해 아이들이 개과천선한다는 것이죠. 자기 존재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 후에, 자기 삶의 이유와 목적, 그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의 문턱과 경계를 넘어서고 싶은 사람들이 수천 킬로를 걷는 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났어요. 그 여정을 통해 자신의 쇠이유를 넘어서고 새로운 변화를 마주하게 된 것이죠.

여러분, 우리 모두는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저 변화에 대한 기대로 모든 것을 대신할 때가 있어요. 아주 피상적으로 신년 계획을 세운다거나,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들로 말이에요. 자신의 쇠이유를 넘어설 용기와 그 과정을 견딜 각오 없이 삶의 한계, 그 문턱을 넘어서는 기적을 바랍니다.

어떤 면에서 변화의 방법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요. 해결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외면해야 할 것들을 차단하고 직면해야 할 것들에 깊이 머무는 것이에요. 세상의 소음과 얕은 기분 전환과 만족으로부터 자신을 떨어트려놓고 진짜 자기 자신과 직면할 용기를 갖고, 진짜 자신의 하나님을 만날 각오를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속의 기드온 역시, 자기 존재의 쇠이유를 넘어서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미디안의 약탈과 공격이 두려워 포도주 틀에 숨어 타작을 했던 약하고 보잘것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큰 용사라고 불러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기 인생의 거대한 쇠이유를 넘어섰던 것이죠. 자기 한계를 넘고 자기 인생의 경계의 문턱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시는 새로운 역사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기드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군대를 일으키십니다.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룹바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기드온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백성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롯 샘에 진을 쳤습니다. 미디안의 막사는 그들의 북쪽 모레 고원 근처의 평원에 있었습니다.” (삿 7:1, 우리말성경)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기사를 기록하면서 성경은 기드온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작합니다. “여룹바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기드온” 기드온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사기 6장에 등장하는데요. “그리하여 “바알로 하여금 스스로 변호하게 하라”라고 해 그날에 그들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바알의 제단을 허물었기 때문입니다.” (삿 6:32, 우리말성경)

‘여룹바알’이란 이름은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허물었기 때문에 주어진 닉네임. 곧 그의 인생의 제2의 이름이었어요.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의 인생에는 두 가지의 이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기 전부터 이미 결정 되어진 것들이에요. 그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도 모르게 선택되어버린 삶의 많은 내용들이 있어요. 부모, 가정환경, 날 때부터 주어진 신체와 조건들, 시대의 요구와 역사적인 상황들. 무엇을 하기도 전에 이미 주어진 것들이 우리 삶을 결정하게 내버려 둘 때가 많습니다.

기드온의 인생도 그랬어요. 그래서 그는 미디안이 두려워 비참하게 포도주 즙 틀에 숨어서 자기의 것을 빼앗길까 봐 전전 긍긍하며 불안에 떨었어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인생의 틀 안에서 자기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더 이상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이 그의 삶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믿음으로 자기 삶에 다른 길을 놓았던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그의 이름 앞에 그가 믿음으로 획득한 또 다른 이름 ‘여룹바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두 번째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무엇이라고 불러 주길 원하세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삶의 내용들이 여러분을 결정짓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한탄하고, 탓하고, 원망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인생에 제2의 이름을 만들어 가세요. 믿음으로 새로운 길을 놓는 것이죠. 그러나 믿음은 상황을 바꾸는 버튼이 아니에요.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단추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능력인 것이죠. 믿음의 진정한 승리는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기드온이 처음 했던 것은 단순히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심어 놓은 바알의 신상들을 부수는 것이었어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을 다지는 것이에요. 삶의 환경이 여러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믿음이 삶을 결정하게 만드는 사람, 그런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는 백성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들을 넘겨주려고 하는데 백성이 너무 많다. 이스라엘이 내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며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고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삿 7:2, 우리말성경)

이제 그 유명한 기드온의 300용사들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과 방법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미디안의 군대는요. 메뚜기 떼로 비유할 정도로 많은 13만 5천 명이었어요. 그리고 기드온의 소집 명령에 따라 모인 이스라엘 군대는 3만 2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죠? “기드온 너에게 내가 미디안을 넘겨주려고 하는데 너의 군대가 너~무 많다”라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세요. 우리가 하나님 차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엄청난 갭이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너무나 길들여진 나머지 하나님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지나치게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대로 역사를 이루어 가시려고 하면 우리는 쉽게 좌절하고 거절감을 느낍니다. 여러분 이것은 거절이 아니에요. 이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 이런 것에 있지 않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백성의 마음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하나님이 하신 일들로 인정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현실이 무엇을 말하든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마음인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으니까요.

우리는 그분이 해오신 일들과 지금 하고 계신 일들,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인정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에 최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불러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에 우리가 자고 하여 높아지지 않도록 마련하신 장치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분은 우리의 본성을 아시고 체질을 아시기에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장치들을 만들어두십니다. 겸손과 믿음을 위한 장치인 거예요. 하나님이 치르시는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의 상식은 숫자로 결과를 가늠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대진표는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 느끼는 실제 체감은 비현실적인 희망사항 같은 이야기예요. 이미 그들에게 미디안을 이길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었어요. 그들이 가진 자원과 능력이 그것을 증명하듯 말해줘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개입을 보고 계셨어요. 그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한지를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백성들이 누리게 될 영광이 자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님을 철저하게 인식할 장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얻게 되는 승리를 안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오직, 세상을 이기신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싸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교훈하고 계신 것이에요. 3절 말씀입니다. “그러니 지금 너는 백성들의 귀에 선포하여라. “누구든 두려워 떠는 사람은 돌아서서 길르앗 산으로부터 떠나라.” 그러자 백성 가운데서 2만 2,000명이 돌아갔고 1만 명만 남게 됐습니다.” (삿 7:3, 우리말성경)

하나님께서는 두려워서 떨리는 사람은 돌아가라고 말하라고 하세요. 그러자 자그만지 2만 2천 명이 돌아갑니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바로 이 부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의 사람들을 선별하실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요. 이렇게 상대도 안 되는 전쟁을 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떨지도 않는 용기 있는 사람들만 골라내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이 장면에서 기드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앞서 언급했지만 기드온은 미디안의 약탈이 두려워서 포도주 즙 틀에 숨겨서 몰래 타작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큰 용사라고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미약한 가문과 그중에서도 가장 작고 약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나약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실 때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며 표징을 구했던, 불안이 많고 불신을 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기드온을 통해 하나님의 군대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으로부터 구원하시기에 그는 어떤 자격의 기준을 갖췄다는 것이죠?

오늘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 중에 인생의 두려움을 안고 있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두렵지 않은 사람 있으세요? 우리 모두는 두려워요. 그래서 불안에 떨어요. 괜찮은 척 남들에게 들키지 않아도, 때로 자신에게조차 괜찮다고 말할지 몰라도요. 거대해 보이는 세상의 요구 앞에서, 답이 없어 보이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너무 연약하고 부족한 나 자신의 한계 앞에서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고 그래서 떱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드온도 두려웠고 그의 군대도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두려움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연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각자의 아킬레스건이 있어요. 하지만 그 연약함이 누구 손에서 다뤄지는지에 따라 인생은 탁월해지기도 형편없어지기도 합니다.

기드온도 두렵고 떨리는 것은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불안과 깨어진 좌절을 다루셨어요. 기드온은 자기 인생의 두려움과 자기 한계와 그로 인한 불안과 실망, 깊은 좌절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안에서 해결했어요. 말씀으로 다스리고 믿음으로 소멸시켰어요. 두려움과 불안은 믿음 없음의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이 부어지면 곧 소멸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 평안이 임하고 자유가 있고 소망이 있는 것이에요.

제가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풍랑 만난 제자들의 배 위로 예수님이 걸어오시면서 보이신 주님의 반응이었어요. 제자들은 거친 파도와 풍랑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게다가 깜깜한 밤 거친 바람에 흩날리는 예수님의 긴 머리와 긴 옷자락, 거기에 빨간 스톨을 생각하면 저는 너무 무서워요. 예수님은 안정적으로 걸으셨을지 몰라도 머리랑 옷자락까지 바람을 거스르진 않았을 것 아니에요. 아마도 미친 듯이 휘날렸겠죠.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바다 위를 걸어 가까이 다가오시고 있어요. 어쩌면 풍랑보다 그 모습이 더 무서웠을지 몰라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4:27)

제자들의 두려움을 정말 즉시로 해결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뭐였을까요? 파도를 향해 명령하시는 거였겠죠. “파도야 잠잠하라.” 그럼 고요해진 바다를 볼 때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을 거예요. 무섭지 않았을 거예요. 안심이 되었겠죠. “이제 살았다…” 그런데 주님의 방법과 순서는 달랐어요. 예수님은 잠잠해진 파도로 평안을 얻기를 원치 않으셨어요. 상황이 변해야 비로소 평안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그들에게 주어지는 평안은 절대적으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어야 했어요. 그들의 고통 가운데 두려움 가운데 걸어오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믿는 순전한 믿음.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주어지는 평안, 약속에 근거한 평안을 누리길 원하셨던 것이죠.

믿음으로 얻는 평안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어서 얻는 평안, 말씀을 믿어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을 보는 것 말이에요. 믿음의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순간입니다. 여전히 폭풍 치는 바다를 보고 있는데 “나다! 내가 왔다! 내가 함께 하고 있다”라는 예수님의 그 말씀 때문에 두렵지 않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과 출렁이는 파도의 소리가 동시의 그들의 귓가를 울릴 때 무엇에 반응할 것인가? 이 선택이 우리의 믿음이고, 그 믿음이 모든 두려움을 소멸하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길 원하세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두려움과 좌절을 말씀으로 해결하는 사람을 말이에요. 낙심과 실망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것을 딛고 말씀 위에 서는 사람, 저와 여러분이 그런 하나님의 용사로 부름받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만 명의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서 멈추지 않으세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거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를 대신해 내가 그들을 시험하겠다. 내가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갈 것이다’라고 네게 말하면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네게 말하는 사람은 가지 않을 것이다.” (삿 7:4, 우리말성경)

여러분, 아직도 너무 많다고 하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선별의 기준에 대해 말씀하시죠. 물가로 데려가 그들을 시험하겠다고 하세요. 하나님의 테스트. 두 번째 시험지가 나눠집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자 하나님께서 문제를 내시는데요.

“개처럼 물을 혀로 핥아먹는 사람과 물을 마시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사람 모두를 따로 세워라.” 그러자 손을 입에 대고 핥아먹은 사람의 수가 300명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삿 7:5b-6, 우리말성경)

‘물을 마시는 방식으로 최종적 선별을 완성하다.’ 이것에 하나님의 어떤 한 수가 녹아져 있는 것일까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소수 정예의 군사로 준비된 사람을 얻고자 하셨다면 하나님의 테스트는 용병술이나 군사 기술을 확인하는 것이 되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고 무엇을 찾으셨던 것일까요? 지금 이곳에 있는 만 명은 기드온의 소집 명령을 받고 하롯에 모이기 위해 고향으로부터 행진해 오느라 육신이 갈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목말랐고 분명 마실 물이 부족한 상태였을 것이에요. 샘과 거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육신의 필요에 반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그룹으로 나뉘었어요. 먼저 물을 혀로 핥아먹었다는 것은 그들이 땅에 완전히 엎드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무방비 상태였어요. 온전히 자기 필요에 집중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에요. 그리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손을 입에 대고 핥아먹은 사람들. 여기서 성경은 손을 단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한 손으론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들 손에 들려진 무기를 놓지 않은 채로 고개를 완전히 떨구지 않고 주변 경계를 살피며 물을 마셨을 거예요. 그러니까 물을 마시는 순간에도 그들은 언제 적이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자제력과 경계심을 보여준 것이죠. 바로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필요가 있는 순간에도 먼저 영적인 시스템이 작동되는 사람인 것이에요.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가? 그것을 잊지 않고 그의 부르심의 사명을 자각하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분의 역사를 이루실 때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태도가 준비된 사람이에요. 능력이 아닌 태도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모든 순간 자신의 최선으로 반응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그것을 찾고 계셨어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기 삶의 태도의 평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요. 여러분 그렇다면 ‘태도’는 무엇입니까? 제가 여기서 말하는 ‘태도’란 ‘단순한 성실함’과는 조금 다른 ‘진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마음이요. “우리가 전심으로!”라고 말하는 바로 그 전부를 건 마음 말이에요. 그냥 감상에 젖은 어떤 충만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감상에 젖은 마음은 쉽습니다. 그리고 쉽게 사그라들어요. 진정성이란 그 안에 엄청난 치열함이 담겨 있습니다.

언젠가 TV에서 유명한 도예가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장인이라고 부르는 무형 문화재 같은 분이었어요. 옛날 선조들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정성스럽게 진흙으로 빚고, 고운 모양으로 다듬어서 유약이 발린 도자기가 뜨거운 가마에서 나옵니다. 그 도자기를 손에 들고 햇빛 아래 이리저리 돌려가며 면밀히 살펴보는데요.

“야… 역시 장인이 구운 도자기는 다르구나…참 아름답다.” 생각하는 순간, 이 분이 돌망치를 손에 들고는 그 도자기를 땅! 하고 깨버려 깜짝 놀랐어요.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멀쩡한 도자기를 왜 깨.” 그런데 이 생각을 채 하기도 전에 그다음 다른 모양의 고운 자태를 드러낸 멀쩡한 도자기를 손에 들고는 또 깹니다. 이 다큐를 보면서 제가 일단 놀랐던 것은 이 분이 자기가 만든 도자기나 그릇의 대부분을 깨트려 버린다는 것이었어요. 100개를 만들면 90개 이상은 깨버립니다. 어떤 때는 한 개도 못 건지고 다 깨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그걸 보면서 “아니 저걸 왜 깨나… 저기 어디지?” 저분이 망치 들고 깨기 직전에 “나를 주시오” 뭐 이러고 다 가져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거 주워다가 팔아도 꽤 될 거 같은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분 옆을 지키고 있던 아내분이 남편이 멀쩡한 그릇들을 사정없이 깨버리는 바람에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것들을 한 개라도 시장에 나가서 팔면 얼마나 비싼 건데 왜 저 아까운 것을 다 깨트려 버리는지 모르겠어. 우리 남편은 미쳤어, 저거 미쳤어.”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이죠. 그런데 비범한 사람들의 사고와 선택은 다릅니다. 그때 이 장인이 담담하게 뱉은 한 말이 제게 너무 인상적으로 남았어요. “덜 좋은 것을 과감하게 깨버리지 않는 한 가장 좋은 것은 얻을 수 없어요.” 저는 정말 이 말속에서 진정한 장인의 삶이 전하는 깊은 감동을 느꼈어요. 제가 뭐에 감동했나요? 저는 도자기 몰라요. 그러나 저는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어요. 이분의 삶에 태도에 대해서 말입니다.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이란,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덜 좋은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과정 안에 얼마나 많은 치열함과 얼마나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되는지 그것을 추구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에게 바로 이 마음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차선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해요. ‘차선은 최선의 적’입니다. 자꾸 차선에 의지하고 기대어 서면, 최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최선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게 돼요. 최고의 것을 드리기 위해서 조금 좋은 것, 덜 좋은 것은 거절하는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인생의 태도를 만들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 앞에 깨어 있을 수 있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에요.

제가 가끔 지체들이 어떤 일을 해낼 때 “과연 마음이 있냐”고 질문하면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음이 있었는데요. 저도 잘 하고 싶었는데 요. 그래서 이렇게 자원해서 시간 들여 노력하고 있는 건데요.” 그리고 자신의 노력을 장황하게 설명하려 합니다. 네 물론 누구나 잘하고 싶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태도에는 다양한 차이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요. 그 사람 머릿속에 1부터 100까지가 다 있어요. 그만큼 고민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머릿속에서 수백 번, 수천 번 그려봤다는 거예요. 흐름이 있어요. 디테일이 다릅니다. 언제나 플랜 비(B)가 있어요.

여러분, 마음이 있고 없고의 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마음의 전부가 정말 그 일에 쏟아 부어져 내렸느냐를 질문하는 것이에요. 여러분의 전부는 어디에 부어지고 있습니까? 진짜 영혼의 고민이 있는 그 지점이 어디죠? 여러분의 예배에 전부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에 순도가 있어요? 여러분의 헌신에 최선이 있습니까? 최선은 100을 드리는 것이에요.

00을 추구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인 진심을 드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우리 인생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태도 속에서는 탁월함이 빚어져 나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리하여 기드온은 300명만 남기고 다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은 돌아간 백성들의 식량과 나팔을 손에 들었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기드온이 있는 평원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삿 7:8, 우리말성경)

‘그리하여 기드온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모든 과정은 기드온에게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군대의 수장으로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는 13만 5천의 대군과 싸워서 이김으로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는 최종적 책임을 안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13만 5천에 비하면 4분의 1도 안 되는 3만 2천을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300입니다. 300명 만을 남기고 다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각기 자기 집으로 돌려보낼 용기. 이 믿음과 순종과 겸손이 없이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기록된 기드온의 300용사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는 이런 도전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300이라는 숫자를 만들어 가실 때를 말이죠. 이 과정은 어쩌면 아픔이 동반된 시간이에요. 우리는 오직 겸손과 믿음과 순종을 요구받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 아주 극단적인 방법으로 말이에요.

3만 2천이 300이 되기까지 우리는 때로 우리 인생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나 초라해지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가장 철저하게 낮아지고, 부수어지고, 깎여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꿈꿀 수 없는 가장 무능하고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니까요.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죠. 즐거운 요구는 아닙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과정일 때가 많아요.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위해 우리 인생의 300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길이 남을 그분의 군대, 그분의 용사들이 될 것입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미디안의 13만 5천명의 군사들을 물리칩니다. 기이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기드온의 용사들을 이기게 하세요. 이것은 상식을 뛰어넘고 모든 가능성을 역전한 결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에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바라보세요. 전심으로 하나님께 의뢰하세요. 여러분 인생의 300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우리 인생의 무력해 보이는 이 숫자가 13만 5천을 물리치는 기이한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들린 영광스러운 도구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유경 목사

서울 여자 대학교 학사
횃불 트리니티 (M. Div.)
(現) 온누리 교회 SNS 청년부 담당
(現) 온누리교회 대학 청년부 예배 기획 담당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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