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1-15절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 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오늘은 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가인은 질투 때문에 망한 인물입니다. 축복된 존재에서 하나님을 떠나 악인의 족보에 이름이 쓰인 상징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인이 보여준 ‘질투’라는 감정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닙니다. 대개 ‘질투’라고 하면 귀엽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어서 많은 이들이 간과하기 쉽지만, 질투는 시기심, 투기심과 동의어로 가톨릭에서는 7가지 죄악으로 분류되는 무서운 죄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칠죄종’이라는 이름으로 죄의 종류를 분류했습니다.

칠죄종이란 교만함, 인색함, 음란, 탐욕, 나태함, 분노, 질투로, ‘죄의 기원’이 되는 대표적인 종류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의 나열된 감정들이 다양한 종류의 죄들과 악습들을 파생시켜 다른 새끼 죄악들을 낳기 때문에 ‘죄의 기원’이라는 표제가 붙은 것입니다. “죄가 죄를 낳는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질투에 사로잡힌 가인이 저지른 부수적인 죄악들이 나옵니다. 가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질투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낯빛을 바꿨으며, 동생 아벨을 죽였고, 하나님께 아벨의 행방을 모른다며 거짓말을 했습니다. 질투라는 감정이 낳은 무시무시한 다른 죄악의 여파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질투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잘 다루지 못하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죄악들로 파생되어 무서운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렇다면 질투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가인을 통해서 질투의 특징을 하나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3가지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질투는 비교의식을 불러일으킵니다.

3절과 4절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쓰여 있습니다. 똑같이 제사를 드렸으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가인은 아벨의 제사와 자신의 제사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자신의 제물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신 아벨의 제물 역시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질투는 늘 비교의식을 가져옵니다. ‘나’로 온전히 서지 못하고, 늘 열등의식으로 비교할 대상을 물색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늘 비교로 인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분명히 세워져있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와 비교하냐에 따라서 시시때때로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영희에 비해 내가 좀 괜찮은 사람이지. 나는 행복하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민수에 비해선 난 정말 불행해, 나는 정말 최악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순식간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인은 1절에 나온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이었습니다. 하와를 가인을 낳은 후, 가인을 들어 안으며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인을 낳았다”라며 너무나 기뻐하였습니다. 또한 가인은 광대하고, 광활한 땅을 관리하며 농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계절에 따라 곡식을 심으며 땅을 주관하고, 수많은 열매와 과일과 채소들을 일구어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흘린 땀의 결실을 정직하게 맛볼 수 있는 사람으로, 가인이 아벨보다 더 확연히 드러났을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라서 양의 젖을 짜고 새끼를 보는 것 외엔 이렇다 할 수확과 소산이 없었던 것에 반해, 곡식을 기르고 수확하는 일은 매년 눈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노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아벨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던 그 상황을 단편적으로 바라봅니다. 곡식을 수확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주셨던 햇빛과 비, 바람, 수확량, 온도 등은 모두 무시하고, 그저 지금 당장 하나님이 자신과 아벨 중 누구의 제물을 받으셨는가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가인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질투하는 사람은 늘 비교의 대상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여, 비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마치, 불행해지고 싶어서 작정을 한 사람처럼, 불행하다는 결론이 미칠 때까지 비교 대상을 삼습니다. A란 사람에 비해 자신이 나은 것같으면, 이제 B라는 사람을 비교하고, B하고도 비교하여 나은 것 같으면 이제는 C를 찾아서 비교합니다. 그래서 가인과 같은 사람은 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비교하는 대상이 없으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어리석음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비교했던 아벨이 없어지면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비교 대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질투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비교하는 대상이 없어지면 거꾸로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시험을 본 영희가 시험 성적이 떨어지면 그나마 좀 후련할 텐데’, ‘수행평가에 철수가 실수를 하면 내가 상위권일 텐데’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질투하는 사람이 불행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앞에서 말씀드린 첫 번째 특징과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A란 사람을 비교하면서 불행해하다가 A가 잘못되길 바랍니다. 만약에 A가 불행해지면 어떨까요? 기분 좋음은 잠시뿐입니다. 이제는 B라는 비교 대상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하나하나씩 비교해나가서 언제 끝나게 될까요?

오늘 본문 12절에 하나님께서 그 끝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결국 혼자 남게 될 때까지입니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가인처럼, 완전히 혼자가 될 때까지 누군가를 비교하고, 그 사람이 불행하길 바라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상처 입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신체적 상해도 물론 포함하지만, 보이지 않은 마음의 상처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말로, 표정으로, 시선으로, 행동으로, 분위기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줍니다. 자신이 혼자 남게 될 때까지 그러한 폭력은 계속됩니다.

여기서 질투의 중요한 속성이 나옵니다. 질투는 절대로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감정입니다. 한번 솔직하게 손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솔직히 미국 대통령에게 질투가 나서 정말 혼났다.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고, 부럽고 시기심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아니면, “이번에 하버드에서 수석을 하고 뉴욕타임즈에 인터뷰까지 한 사람이 나왔는데,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났다. 그 사람은 되고 왜 나는 안 될까,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 수석을 차지했는지,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서 잠이 안 온다” 이렇듯,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을 우리는 절대로 질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게 질투하는 사람은, 우리의 옆집 이웃, 나와 같은 동기, 우리 반친구들, 교회 식구, 일가친척들, 형제자매, 동아리 친구들과 같이 자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질투는 자신의 주변을 파괴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불행하게 된다고 해서, 여러분이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남게 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질투하는 사람의 특징은, 피해의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타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인은 첫째 아들입니다. 아벨이 태어나기 전, 가인에겐 자신의 직업에 대한 선택권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벨을 비교하며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 하나님을 탓했습니다. 6절에서 가인은 아벨로 인해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아벨 때문에 하나님이 내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이 제사를 안 받으셨기 때문에 내가 아벨을 죽였습니다”하는 뉘앙스로 자신이 아우를 지키는 자냐고 오히려 되묻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인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가 타인이나 다른 환경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핑계를 댑니다. “우리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나는 출세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나한테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안 살았던 거다”, “선생님이 우리 반 일등만 챙겨줬기 때문에 성적이 안 올랐다.” 등등과 같이 늘 누군가 때문에, 혹은 어떤 환경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자신이 불행한 것에 대한 이유를 늘어놓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탓을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안 해주셔서’, ‘하나님이 나보다 저 자매를 더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나한테 엄격하셔서’처럼 생각하고, 불퉁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를 상실한 채, 불평하는 것에만 급급합니다.

만약 자신이 이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질투하는 사람입니다. 질투가 시작되면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죄를 유발하는 원동력이 채워집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죽였고,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했고, 불평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질투심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은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상태에 사로잡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더불어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입혀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일찍이 지혜로운 솔로몬은 질투심에 대해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잠 14:30)

시기하는 마음은 그 독성이 매우 강력하여, 주변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기하는 당사자의 뼈까지 썩게 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질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그답이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기심이 발생한 원인과 이유를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나타나시어 여러 번 질문을 하십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가인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감정에 휩싸여 범죄 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다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또 질문하십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정말 모르셔서 가인에게 질문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가인에게 나타나 두 번이나 질문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가인에게 쏟아질 솔직한 마음과 고백을 듣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가인이 입으로 하게 될 그 더러운 고백들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함께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하며, 그 질투심을 함께 해결해나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가인은 그러한 하나님에게 자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혼자서 고민하고, 머리를 짜고,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시기심을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00아, 지금 너의 마음에 드는 생각이 무엇이니? 어떤 분노와 아픔을 안고 있니? 네가 지금 그 사람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이니?”하고 물어보고 계십니다. 그런 질문에 하나하나 솔직하게 대답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장하지 않고, 숨기려 하지 말고, 합리화를 하거나, 거짓말로 에둘러 가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주신 해결책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구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피를 쏟으신 그 사건을, 오늘날 나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주시는 그 사랑을 마음 가득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시기와 아픔이 씻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N 분의 1로 쪼개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여 실수도 많고, 잘못도 많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셔서 나를 향한 그 사랑에는 실수도 없고 잘못도 없으십니다. 가인을 잘 살펴봅시다. 비록 나중에는 악인의 반열에 들게 되는 가인이지만, 정말 하나님은 가인을 사랑하지 않으신 걸까요? 정말 아벨을 차별하여 사랑하셔서 가인을 버리셨던 걸까요? 여러분이 성경 본문을 보시면서 제 질문에 한번 대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인과 아벨 중,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고, 하와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하나님께 찬양했던 자식은 누구입니까? (가인)
2. 가인이 자신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으신 하나님을 앞에 두고, 안색이 변하자,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찾아가서 말을 건 사람은 가인과 아벨 중 누구입니까? (가인)
3.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하나님이 아벨에게 도망가라 경고하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가 범죄 하지 말라 만류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또한, 살인이라는 무서운 범죄 후에도 하나님은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가인)
4. 하나님은 가인을 똑같이 죽일 것이라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마에 표를 만들어주셔서 가인이 보호받도록 하셨습니다. 오히려 가인을 죽이려 하는 자는 일곱 배의 벌을 내리리라 맹세하셨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 하나님이 보호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가인을 죽이려 하는 자입니까? 가인입니까? (가인)

여러분이 제가 드린 4가지 질문에 모두 답을 하셨습니다. 이런 데도 가인은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한 자였을까요? 아벨을 질투하고 시기할 만한 사람이었습니까? 가인이 자신 있게, “나는 하나님께 차별받으며 사랑받지 못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나누어지거나 쪼개어지지 않습니다. 아벨을 사랑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50 대 50으로 가인에게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가인을 사랑하셨고, 온전히 희생하셨고, 온전히 참으셨으며, 이해하시며 가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오늘 본문의 가인처럼 유랑하며 떠돌게 됩니다. 결국 혼자 남게 될 때까지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뼈가 썩는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비교하는 행동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사랑을 만끽하며 질투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주혜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졸업
숭실대학교 기독대학원 상담학과(Th. M.)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종교교육학과(M. Ed.) 졸업
(現) 안산동산고등학교 교목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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