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18-23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기독교인은 누구보다 성서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서를 가장 귀하고 가치 있게 여기며, 그것을 삶과 신앙의 기준이자 근원으로 삼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속내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우린 성서를 사랑하되, 우리가 ‘사랑할만한’ 것만 사랑합니다. 즉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 기쁨을 주는 것, 평안을 주는 것 등을 사랑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손해보게 하는 것, 고난을 겪게 하는 것, 부담을 주는 것에는 아예 시선을 두려하지 않고, 순종하려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우린 성서를 사랑하되, 사랑할만한 것만 사랑한다는 것이 정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는 대체로 우리에게 감동과 은혜를 줍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상당히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말씀들도 많습니다. 아마 그중 하나가 오늘 읽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얘기하는지 다 아실 것 같지만(이미 수많은 세월 동안 외면해온 말씀이죠.), 왜 그런지 본문을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을 부르시는 참 단순한 장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장면, 단순한 부름이 사실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당사자로선 말이죠.

예수님은 먼저 어부로 일하는 네 사람,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를 부르십니다. 넷 다 어부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십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19)

이어 조금 더 가시다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십니다. 네 사람 모두 그들이 하던 어부 일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계시는 직장이나 사업장에 찾아가셔서 갑자기 “자 전도하러 가자! 나를 따라와라!” 그러면 직장이나 사업장 팽개치고 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장면이 매우 단순한 장면인데 전혀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순하지 않은 점 때문에 우리 또한 부담스러워하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본문을 대할 때 무슨 생각을 많이 할까요?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내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건가…?’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반응의 폐해가 무엇이냐면,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은 간다고 하니까 믿어는 보겠는데, 예수를 따르는 거면 제자로서의 삶은 모든 것을 다버리고 포기하는 거 같으니까 그건 아주 특별한 사람들, 선교사나 목회자 등에 해당된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옳은 해석이고, 반응일까요? 소위 믿는 자들의 이러한 반응이(때론 무관심이) 이 본문을 대하는 합당한 반응일까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린 이 본문을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의도를 완전히 잘못짚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을 통해 ‘예수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설득을 하지 않으신다

아니 사실 제자들에게 엄청난 요구를 하시는 건데, 사정을 해도 시원찮은 판에 설득이란 걸 전혀 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부르십니다. 그냥 따르라 명령하십니다. 왜 설득하지 않으셨을까요? 이게 아주 중요한 지점인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삶은 설득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주신 분과, 복음 전하는 삶으로 부르신 분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아주 공개적인 장소에 갑자기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자 당신에게 100억을 줄 테니 날 따라 오세요.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길 겁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 부름에 안 가실 분 계시나요? (그럼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100억을 받을만한 능력과 조건이 안 되는 사람에게 당장 100억을 주며, 또 그것을 통해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기겠다는 데 대체 무슨 설득이 필요한가요?

다시 말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실, 또 맡기실 ‘대체 불가능하고, 비교불가능한’ 복음의 가치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설득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 은혜의 부르심에 순종할 건지, 안 할 건지 그저 선택만 남을 뿐입니다.

2. 게다가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말합니다(20절). 아마 어부 중에서도 고용된 이들이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됐건 그들은 부유한 사람으로 여기긴 어려움이 있습니다. 반면에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21절). 사람을 두고 쓰는 어업 종사자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2절에 보면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앞선 베드로와 안드레보다는 나름 부유한 어업 종사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자기들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배와 가족을 두고 떠났다고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른다는 건 자신이 귀하게 여겼던 모든 가치를 내려놓고 따르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마 이 메시지 때문에 우린 이 이야기를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특정한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하게 밀어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3. 옛사람을 온전히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옛사람은 내 과거 전체를 부정하라는 게 아니라, 내가 예수를 만나기 전 추구했던 가치, 삶의 목적, 목표 등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모든 것(생업, 재산, 가족)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그들의 옛사람, 즉 그들이 이전에 추구했던 가치들을 다 내려놓고 예수를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고 따름은 옛사람과의 이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지금 한 사람과 연애 중인데 헤어진 옛 애인을 틈틈이 생각하고, 심지어 중간중간 다시 만난다면 지금의 연인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과 깊은 친밀함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그분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여전히 옛사람을 그리워하고, 옛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버림의 역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옛사람을 버린다고 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이 다 쓰레기장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놀라운 이유는 내 옛사람을 전부 부정하시는 것이아니라, 옛사람을 승화시켜 참된 가치 있는 삶으로 아름답게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4. 옛사람의 본질적 승화가 일어난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부였던 그의 삶을 놀랍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도 그렇습니다. 양을 치던 목자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바울은 또 어떻습니까? 교회와 복음을 적극적으로 핍박하는 사람에게서,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그는 누구보다 율법의 한계 또한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자유케 하는 복음의 진리를 누구보다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옛사람과의 단절이 아니라, 옛사람의 본질적 승화를 일으켜 주십니다. 내 과거가 전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위한 놀라운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복은 내 과거가 몽땅 쓰레기통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어찌 보면 쓰레기통에 있던 내 미천한 삶마저 예수를 따름으로 인해 놀라운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입니까?

자 정리해봅시다. 우린 이 이야기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합니다. 아닙니다. 우린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면, 그것을 진정 깨닫는다면 우린 부담은커녕 오히려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기뻐 춤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가 2, 3번째 내용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따른다는 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 즉 옛 사람의 가치, 아니 사실 지금도 추구하고 있는 가치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런데도 그걸 요구하실까요? 아니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가 예수님의 ‘부담스러운 요구’인가요?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옛사람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예수님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득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부르시고, 그 복된 삶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 13:44-46)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린 이 이야기를 너무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따르려면 특별한 부르심이 필요하고, 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결코 아니란 겁니다. 무엇과도 비교 불가능한, 대체 불가능한 보물! 진주! 바로 복음! 그 복된 삶으로의 부르심이 얼마나 큰 가치와 능력이 있는지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경제 관련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저자가 말하길 투자 법칙에서 이윤 10% 이상은 투기라고 말하더군요. 그게 몇 년 전이니, 그때보다 금리가 훨씬 낮아진 요즘 10% 이익을 얻는다면 완전 대박이지요. 만약 정말 확실하게 여러분에게 10%의 이윤을 준다고 하면 정말 통장에 있는 돈 다 끌어다 넣으세요. 물론 그런 제안은 사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자, 우리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가치인가요. 내가 가진 것의 10%만 이익을 얻어도 횡재했다는, 대박이 되는 세상인데, 우릴 구원한 복음, 영원한 생명을 준 복음, 그래서 우리의 삶을 완전히 전복시킬 그 복음에 대해선 우린 과연 얼마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을까요?

아주 흥미롭고, 또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제목은 ‘개밥그릇 이야기’입니다. 전남 신안 앞바다에 증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매년 여름 태풍이 불기만 하면 꼭 바닷가에 그릇이 밀려옵니다. 이 그릇이 밀려오는 이유는 뻔합니다. 오래전 난파된 배에서 떠밀려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섬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미신이 있었습니다. 그 미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귀신 붙은 물건은 집안에 절대 들여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도 사람들은 행여나 죽은 사람이 쓰던 물건이 섬에 해라도 끼칠까 해서 매번 그릇을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이유는 귀신 들어오지 말라고. 그런데 하루는 목포시청에서 일하는, 공부를 꽤나 한 젊은이가 증도로 먼 친척을 찾아오게 됩니다. 그는 동네를 돌아다니다 담 너머 마당 한쪽에 있는 똥개 한 마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의 개밥그릇 을 이 청년이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 집 주인에게 ‘이거 가져가도 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어차피 한 3년 돼서 갈아야 하니까 가져가라”고 답합니다. 이 청년은 개밥그릇을 공짜로 가져옵니다. 목포로 돌아온 이 청년은 이 개밥그릇을 되팔게 됩니다. 값이 얼마였을까요? 1975년 일인데, 당시 강남 32평 신축 아파트값이 천2백만 원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밥그릇의 감정가는 2억 8천만 원에 낙찰됩니다. 사연인즉슨, 고려 시대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려던 길이 34m, 너비 11m의 당시 초대형 무역선이 증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던 것입니다. 태풍만 불면 바다 위쪽에 있던 그릇만 밀려서 해변으로 왔는데 섬사람들은 매번 귀신 붙었다고 보이는 족족 박살 내서 해변에 던졌던 것입니다. 개밥그릇 사건이 있던 이듬해인 1976년부터 9년 동안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보물선 인양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9년간 인양한 것을 모아 전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국립해양박물관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그릇을 할아버지도 깼고, 아버지도 깼고, 아들도 깼습니다. 1975년 개밥그릇의 가격이 2억 8천만 원입니다.

한 목사님께서 알려주신 이야기인데, 들을 때마다 가슴을 치게 합니다. 물론 그 깨진 개밥그릇이 아까워서가 아닙니다(진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가 늘 우리 삶에 밀려오고, 또 넘치고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가치를 지키고자(섬사람들이 귀신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처럼) 그 복음의 가치를 무참히 깨고 있는 건 아닌지요.

자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가치는 어느 정도 될까요? 아니 우린 복음에 어떤 가치를 두고 있을까요? 결국 깨지거나, 버려지거나, 기껏해야 개밥그릇 밖에 안 되었을 우리에게 그러나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주신 그 복음. 우리 삶에서 그 복음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그 복음의 가치를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 많은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복음의 가치를 믿는 자가 곧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밖에 없음이,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의 삶을 통해 간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노한석 목사

한세대학교 선교학
한세대학교 영산신학대학원(M. Div)
한세대학교 일반대학원 구약학(Th. M.)
인천순복음교회 청년부 선교학교 강사
인천순복음교회 유년부 여름성경학교 강사
여의도순복음광명교회 청년부 수련회 강사
삽교감리교회 청년부 수련회 강사
신나는교회 청소년부 수련회 강사
100주년 기념교회 청년교구 전도서 세미나 강사
순복음강남교회 중등부 수련회 강사
순복음강남교회 교회학교 교사대학 강사
(現) 하늘벗교회 담임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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