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8장 6-7절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랑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정신적 질병 중에 ‘강박증’이란 게 있습니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생각이나 장면이 떠올라 불안해지고 그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질환입니다. 예를 들면 현관문을 잠그고 돌아서서 몇 걸음 가다가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가서 확인해보는 행동을 여러 차례 또는 수십 번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증상을 들 수 있습니다. 그나마 가벼운(?) 증상으로는 물건을 꼭 특정한 장소에 위치시키거나, 색과 줄을 꼭 맞춰야 하는 습관 등이 있죠.

‘사랑은 일종의 정신병이다’라는 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 때문에 강박증을 언급해 봤습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강박증 환자(걱정을 많이 하고, 집착하며, 집요한 모습 등)의 뇌 상태와 사랑에 빠진 이들의 상태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굳이 이런 연구 결과를 들지 않아도, 사랑하면 이것이 정말 미친 짓인 줄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꼭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 친구들 간의 우정과 의리, 심지어 어떠한 대상이나 물건에 대한 사랑 내지 집착 등을 살펴보면 우리는 ‘사랑은 일종의 정신병이다’란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언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분명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원인과 결과’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분명 내가 손해거나 내게 피해가 있을지라도 일단 덮어주게 됩니다. 분명한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허물까지도 사랑스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전문 용어로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합니다.

자식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는 부모의 수고가 그렇습니다. 입을 것, 먹을 것 아껴가며 돈을 모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그렇습니다. 새 핸드폰 출시일 전날, 한순간이라도 빨리 손에 넣고 싶어서 밤새 길바닥에서 텐트 치고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 등을 보면, ‘진정한 사랑은 이성을 초월하여 행동하게 하는구나’ 깨닫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왜 또 미친 짓입니까? 조건을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는 모두가 조건이 붙습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는 사실 수많은 조건을 따져가며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관계에서 내가 얻을 유익이 없다면 우린 그 관계를 소중히 하지 않고, 지속하려 하지 않죠. 하지만 진정한 사랑에는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어떠한 것에 대해 조건이 붙지 않는다는 것, 이익의 유무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미친 짓 중에 미친 짓이죠. 이렇듯 사랑은 종종 정신병으로 설명될 만큼 위대하고 신비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아가서는 남녀의 사랑을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책입니다. 아가서 곳곳에 굉장히 낯 뜨거운 표현들도 있어서 이런 책이 왜 성경에 포함되었는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 아가서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라는 문학적 가치가 있는 책이지만, 그저 남녀의 사랑을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구약의 관점에서는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신약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과 교회(성도)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주님과 교회(성도)가 서로를 향해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이 아가서를 읽으면 다른 성경을 읽을 때와는 색다른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아가서 8장 6-7절은 아가서의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 과연 어떠한사랑인지, 얼마나 우리에게 미쳐 계시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1. 죽음 같이 강한 사랑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눈꺼풀입니다. 무거운 바벨을 거뜬히 드는 힘센 장사도 잠들려고 내려오는 눈꺼풀은 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잠’인 죽음은 어떻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죽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죽음은 결국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돈, 명예, 권력, 사랑 등, 이 모든 것들이 결국 그 힘을 잃고 무릎 꿇는 곳이 바로 죽음 앞 입니다. 죽음은 그 어떤 힘보다 강합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은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증명된 사랑은 ‘죽음을 이기신 사랑’입니다. 죽음마저 이긴 하나님의 사랑, 그래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과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그분의 사랑뿐입니다.

2. 질투하는 사랑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다”라고 할 때 스올은 ‘음부’를 말하는데 이는 죽어서 가는 곳이며, 죽음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질투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려는 열심’입니다. 여러분 아시겠지만 질투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을까요? 더 풀어 설명하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그 어떤 것에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말이 곧 질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불같이 말입니다. 모든 것을 살라버리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불은 바닷물도, 강물도 끄지 못하는 불입니다. 6-7절의 시적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의 질투 안에 담긴 엄청난 힘과 그 의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힘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것에도 빼앗기게 놔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든든하지 않습니까?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 34:1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신 4:24)

그러니깐 절대 딴생각 마시고 주님만 열심히 섬기시기 바랍니다. 타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농담이지만, 그만큼 주님은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악한 영향력과 사단의 위협으로부터 언제나 강력하게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또 우리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3. 값을 지불하고 살 수 없는 사랑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 8:7b)

진부한 질문이지만 진정한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값을 지불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고 순종한다고 더 얻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 힘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7절 하반절 말씀처럼 모든 것을 팔아 다 주어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은혜로 받는 사랑입니다. 그저 은혜로 누리는 사랑입니다. 그 어떤 노력과 대가를 통해서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크기를 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받을 뿐입니다. 누릴 뿐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증명된 사랑입니다. 우리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 그 사랑의 은혜 아래 자녀 삼아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잠시만 살펴봐도 실수와 실패, 죄악의 역사가 곧 교회의 역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시대 가운데 한 줄기 빛과 같은 교회와 성도들도 있었지만, 정반대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 이들도 또한 교회요 성도였습니다. 그래서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회 공동체가 이어져 오고,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악함과 부족함을 품으시고, 참으시고, 기다려주셨기에 우린 계속 그렇게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지난 삶은 어떻습니까? 똑같습니다. 실수와 실패, 죄악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의 교회가, 이 땅의 성도들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그 담대함,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신다는 믿음에 기인합니다.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있음을 확신해도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종종 그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꾸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이제 결론을 내려합니다. 좀 불경한 표현을 써야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미치신 게 분명합니다. 이 모양 이 꼴인 우리를 제정신으로는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여전히 죄인임에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까지 주시며 사랑하신다고 하시니 어떻게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주님은 미치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린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정신 차리시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정신 차리시는 순간 우린 다 그날부터 흔적도 없이… 농담이지만, 이게 진짜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토록 찬란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 모든 상식과 기대를 뛰어넘는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너무 좋습니다.

오늘 설교의 마무리는 그 어떤 미사여구의 나열보다, 이 말씀으로 끝맺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 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5-39)

노한석 목사 하늘벗교회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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