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읽씹”이란 말 들어보셨습니까? 카톡 같은 메신저는 상대방이 내 메시지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바로 확인할 수가 있는데, 분명 읽었음에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을 때, “읽었는데 씹었다”(?)란 표현의 줄임말입니다. 좀 가벼운 말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 같아 죄송하긴 하지만, 굳이 제가 아이들이 많이 쓰는 표현을 빌어다 쓴 이유는, 꼭 하나님이 우리에게 “읽씹”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서입니다. 뭐 하나님이시니까 우리의 기도를 다 들으시겠죠. 그런 찬양도 있지 않습니까?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당최 답장이 없으세요, 분명 읽으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 것 같은데 응답이 없으시단 말입니다. 메시지에 답장이 없어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하물며 간절히 부르짖어 간구한 기도에 묵묵부답 응답이 없으신 하나님께 때론 얼마나 섭섭한지요.

우리도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왜 응답이 없으신지 그 이유를 깨닫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밖에 없도록 우리의 기도를 바꿔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응답받는 기도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실 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습니다.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응답을 받죠. 구한 대로 받는 것, 유보, 그리고 거절입니다. 이 모든 게 결국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내가 원하는 그대로 받는 것만을 하나님의 응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이 모든 것이 응답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유보와 거절도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유보와 거절로 응답하셨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유보와 거절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유보와 거절)도 응답임을 덮어 놓고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응답되지 않는 기도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내 삶에 잘 새기고 잘 적용해야 유보와 거절이 진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전 ‘하나님의 거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가인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지만, 가인의 예배는 ‘거절’하십니다.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우린 단순히 가인이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여기고 있지만, 창세기 본문은 그에 대해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4장 본문 내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가인의 삶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5절에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라고 기록된 이유입니다. 가인의 삶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었기에 그 제물도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마땅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분노가 아닙니다. 심지어 분을 못 이겨 동생을 죽이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거절안에 담긴 뜻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뜻에 맞게 반응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의 거절은 말 그대로 거절이 아닌,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거절을 거절했고, 결국 그의 인생은 매우 불행한 삶이 되었습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린 거절의 의미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방금 예를 든 것처럼 가인의 예배를 거절하신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한계를 가진 인간은 ‘그 여정의 끝에 가야만 깨달을 수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엔 믿음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원치 않는 질병, 사고, 죽음 등, 이러한 것들을 마주할 때, 그 순간 우리가 다 깨닫지 못하는 의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지금, 이 순간에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믿을만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다 알 수 없고, 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이기에 오히려 더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엔 알게 하시고, 결국엔 깨닫게 하실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기도는 응답받지 못할까요?

2) 기도를 통해 ‘나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게 아니라, 자꾸 “하나님만”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굿하고 점보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의 차이를 알면 분명해집니다. 굿, 점, 신에게 비는 것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신을 달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구의 변화만 있습니까? 오직 그 신에게만 있습니다. 사람은 그저 ‘정성’만 들이면 됩니다. 그 신의 마음을 바꿀 정도의 정성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핵심은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 보며 서로 관계하며 교제하는 시간인 것이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드신 비유에 또한 명확히 나타나지 않습니까? 바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7-11)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달래서(?) 그분을 변화시키는 게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 안에서 참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교회 내 성도들이 전도를 가장 많이 할 때가 예수를 처음 믿고 1년 동안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초신자일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유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니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속 변화시켜가니까,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마음 문을 열고 무장 해제를 하니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능력도 없고, 응답도 없고, 기적도 없습니까? 오래 믿은 신앙의 이력 때문에 자신은 이미 다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주변의 변화에만 힘을 쏟게 됩니다. 은연중에 생각하는 거죠. ‘나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른 것에 있다.’ 문제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 주변 환경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변할 게 없고 계속 그런 것들만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화살은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이 모든 환경을 변화시켜 주셔야 할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 하는 것입니다.

초신자 때처럼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에 기대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믿은 신앙 이력, 신앙의 체험, 봉사와 헌신한 것, 알량한 성경 지식을 들이밀면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제가 신앙이 이 정도인데, 하나님 대체 지금 뭐 하고 계신 거예요! 왜 아무 일도 안 하세요. 왜 이리 나한테 관심이 없으세요. 제가 신앙이 이 정도인데, 이제 하나님이 좀 변하실 때가 된 거 같은데요!”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어디 있습니까? 굿하고 점보고 잡신에게 기도하는 것과 사실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의 호칭이 ‘하나님’인 거 밖에는 말입니다. 이처럼 나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는 양 여기며 하나님만 변화시키려고 버티고 있으니 우리의 기도는 계속해서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쌓은 공로로 하나님과 ‘거래’만 하려 하니 그게 무슨 참 기도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없는데 말이죠.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과 마음은 온통 하반절에 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그러나 이 말씀에서 정말 중요한 구절은 상반절입니다. 상반절이 없이 하반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지는 조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여기에 기도 응답의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내 존재의 변화’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정말 머물러 살고, 주님의 그 살아있는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살고 있으면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가 ‘내 존재의 변화’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존재의 변화가 가져오는 놀라운 열매는 그 친밀함 가운데 드려지는 기도들이 주님의 선하신 계획과 능력 안에서 모두 응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기도 응답의 비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를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어떤 상황과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아니 하나님을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네가 먼저 변화해라. 그러면 구하는 모든 것에 응답할 것이다.”

근데 여러분, 이게 사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문제를 허락하실까요? 왜 계속해서 이상한 사람을 나한테 붙이실까요? 왜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을 내 앞에 놓으실까요? 우리가 기도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문제, 그 사람, 그 상황을 통해서 사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친밀한 관계의 장인 기도의 자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남 탓, 상황 탓만 하고 결국 하나님만 변하시라고 부르짖으니, 하나님도 지치고 우리도 지치고. 이거 정말 재미없고 건조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우리의 굳어진 신앙을 다시 새롭게 할 분명한 처방을 알려주셨습니다. 잃어버린 기도의 능력을 되찾을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깊이를 다시 회복하십시오. 그분 안에 거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으로 내 영혼을 채우십시오. 그래서 그 은혜와 능력으로 내 삶의 변화를 간절히 소망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 삶에 놀라운 기도 응답의 열매가 맺어질 줄 믿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은, 하나님 아버지의 여러분을 향한 진짜 사랑의 표현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깟 여러분 삶의 환경 변화가 아닌, 여러분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고 싶어 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복으로 충만한 존재로 날마다 새롭게 빚길 원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오시는 모든 성도님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늘 살펴본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를 뒤집어서, ‘기도 응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바꿔 가십시오. 그렇게 오늘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모든 성도님 되시길 마음 다해 축복합니다.

노한석 목사 하늘벗교회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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