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7편 4-10절 (새번역)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으니,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서울역 앞에서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서울에 사는 작은아들 집을 방 문하러 올라오셨던 엄마를 두고 무심한 아버지는 혼자 전철을 타고 가버립니다. 늘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것입니다. 전철 타는 법도 모르고, 주소가 있어 도 아들집을 찾아갈 줄도 모르는, 그저 자식밖에 모르는 어머니는 서울 한복판 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큰아들, 큰딸, 작은딸, 남편이 작은아들 집에 모여 잃어버린 엄마와 아내를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그리워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족 각자의 추억을 떠올리며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리움은 더해가기만 합니다. 결국 9개월이 지나도록 엄마를 찾아내지 못하고 멀리 유럽 여행을 떠난 큰딸은 성 베드로 성당 앞에 무릎을 꿇고 아기 예수를 품고 있는 피에타 상 앞에서 흐느끼며 내뱉는 한마디, “우리 엄마, 엄마를 부탁해….” 소설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의 이야기입니다.

자식이 엄마를 두고 집이 싫다고 박차고 나가는 경우는 많습니다. 남편 이 화가 나서 집을 나가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런데 나가는 식구들이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왜냐하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집을 나갔다 들어갔다 자기 마음대로 왕래해도 엄마는 집 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합니다. 엄마는 집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마음 바뀌면 돌아오면 되니까 나가면서도 당당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엄마가 사라진 것입니다. 엄마가 사라진 후에 그제서야 엄마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마치 공기가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공기의 고마움을 알듯이 엄마가 사라지자 그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찾아오고, 엄마가 그리워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몇 달간 우리에게 예배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배는 늘 우리 친정집 같았습니다. 예배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배가 사라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배를 드릴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은 예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습니다. 내가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안 드리고 싶으면 안 드려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배시간에 일이 생기면 당당하게 나갔습니다. 예배는 늘 그렇듯 다음 주에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모두 충격에 빠진 것은 엄마가 사라지듯 예배가 사라졌습니다.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특별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는지. 우리 모두는 사라진 엄마를 그리워하듯 예배를 그리워했습니다. 친정집 그리워하듯 교회를 그리워했고, 엄마 밥상 그리워하듯 교회 안의 예배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가만 돌아보면 내가 드렸던 모든 예배들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촘촘히 앉아 어깨를 부딪치며 아멘, 아멘하며 드리던 예배가 꿈을 꾼듯합니다. 우렁차게 울리던 성가대의 찬양이 꿈을 꾼 것 같고, 지하 식당에 가득히 앉아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것도 옛적 일 같습니다. 현장 예배가 회복되었다 해도,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고, 예배를 마치고도 손도 한번 덥석 잡아줄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의 그 화려한 예배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와 같이 예배를 잃어버려 괴로워하는 한 사람, 다윗의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하루아침에 성전 예배를 잃어버리고 광야로 버려진 다윗, 하나님의 성전에서 쫓겨난 다윗은 한두 달도 아니고 그 세월이 어느덧 10년이 넘어갔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있던 왕의 사위에서 아쉽고 부족하고 불편한 광야로 쫓겨난 다윗에게는 무엇이 가장 큰 소원이었을까요?

지금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소원을 말해보라면, 당장에 사울을 죽여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나를 왕궁으로 복귀시켜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오해를 풀어달라고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소원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으니 반드시 들어주십시오. 나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러주셔서, 그 성전에서 하 나님과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아름다운 일을 함께 바라보게 해주시며, 내 사는 날 동안 평생 하나님께 예배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유일한 한 가지 소원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소원이 바로 성전의 예배를 회 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왜 이토록 다른 어떤 곳도 아니고, 성전과 그 속의 예배를 그리워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 정도라면 광야가 아니라 어디에 내던져 놓아도 하나님을 예배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야말로, 성전이 없어도, 가나안 성도로 예배하면서 광야에서도 생수의 강을 길러 올리는 뿌리 깊은 영성가 아닙니까? 그가 지은 시편을 보면 그는 광야에서도, 쫓기던 중에도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데려다주십시오. 그게 나의 평생의 소원입니다. 그곳에서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평생 살고 싶습니다.”

광야의 예배자 전문가였던 다윗이 오히려 성전의 예배를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무데서나 예배해낼 수 있는 사람도 성전이 필요 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 정도면 우리는 어떻게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그가 성전을 그리워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시 27:5-6, 새번역)

다윗은 광야에서 자기가 자기를 지켜야 하는 삶에 지쳤습니다. 다윗이 아무리 시편을 지어 부르고, 웅덩이에 빠져 하나님을 찬양했더라도 점점 지친 것입니다, 특히나 다윗은 자기가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지쳤습니다. 밤에도 들짐승 가운데 자신을 지키며 잠들어야 했고, 낮에는 사울의 군사의 화살을 피해서 도망가면서 자신을 지켜야 했던 그 외로운 전 쟁에 지쳐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주시던 그 삶이 그리웠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감추어 주시던 것이 눈물 나게 그립습니다. 나를 높은 바위 위에 올려, 원수들이 올려다보며 나는 원수들을 내려다보던, 하나님이 성전에서 나를 번쩍 들어올려주시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조차도 광야에 나와 보고서야 지금 까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던 그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사울에 의해 성전에서 쫓겨나고, 광야로 내 몰려 홀로 광야에서 도망가야 할 때, 성전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 평범했던 날들이 그토록 소중한 날들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예배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윗이 왜 이토록 성전의 예배를 그리워하고 사모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왜 성전의 예배 가 회복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은혜받고자 합니다.

첫째, 광야에서의 예배는 성전에서의 예배가 지속될 때 가능합니다

성전의 예배가 있어야지, 광야에서만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예배가 은혜로운 것은 성전의 예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예배도 은혜롭게 드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왔기 때문에 그 은혜가 아직 남아있어, 가정에서 예배드려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성전의 예배를 드리지 않다가 온라인 예배만을 드렸다면 지금 당연하게 느껴지는 은혜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초대교회가 왜 그렇게 건강했냐면 그 이유가 그들이 성전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행 2:46-47a)

다시 말해 성전의 예배와 가정의 예배가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두 곳의 예배가 모두 은혜로웠던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성전의 예배가 무너지고 광야의 예배만 살아있으니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제아무리 다윗이라고 할지라도, 광야에서 주옥같은 시편들을 써 내려간 다윗이라고 해도, 성전의 예배를 이토록 그리워했던 것을 보면 성전의 예배가 없는 광야의 예배가 매우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이러할진데 우리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여러분, 성전의 예배에서 힘을 공급받아야, 광야에서의 예배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에 나와 한 주간의 은혜를 가져가십니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교회에 우물이 있고 여러분이 예배에 가져오시는 것은 물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통은 일주일이면 물이 마릅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일주일 동안 원 없이 마시고 다시금 성전에 빈 물동이를 가지고 와서 은혜의 물을 채워가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예배, 직장에서의 예배, 출장을 가서 드리는 예배, 혼자 드리는 예배, 모두 귀하지만, 본 교회에서의 예배를 떠난 상태에서 그렇게만 드리는 예배는 처음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영혼이 지쳐가게 됩니다. 물론, 특수한 상황(코로나19 같은 집단 전염병)에서는 성전의 예배가 불가한 특수 경우이지만, 그 외에는 신속한 성전의 예배가 회복되고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야 일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광야에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지만, 광야에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10년을 살았다고 한들 광야가 집이 될 수 없습니다. 광야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학교이지, 영원히 살 집이 아닙니다. 다윗은 10년 동안 광야에 살아 광야가 고향이 될 만도 한데, 오히려 광야에 살면 살수록 돌아갈 집이 그리웠습니다. 각 가정으로 흩어지고, 각 직장으로 흩어져서 기간이 지나 그곳이 내 집처럼 느껴지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이 친숙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있는 여러분의 처소는 영원히 낯설어야 합니다. 광야에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광야가 다윗에 소리치고 있습니다. 너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다고. 너의 살 곳은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너의 돌아갈 고향이라고. 인간에게는 영원한 영혼을 향한 노스텔지어(향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합니다. 모든 인간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광야에 있어도 성전에 대한 그리움, 성전에 대한 목마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돌아갈 고향은 천국입니다.

캐나다 브리티시콜롬비아의 프레이저 강을 떠나 어마어마한 연어 떼가 태평양으로 갑니다.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태평양 바다를 떠돌며 살다가 결국 자기가 태어난 프레이저 강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어릴 적 떠났던 그 강으로 다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것을 회귀본능(回歸本能)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있습니다. 인간도 세상에 태어나 광야 같은 인생을 살지만, 결국에는 우리 마음속에 회귀본능이 있어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그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되어있습니다. 다윗도 광야에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었고, 그 속에서 드렸던 예배가 그리웠던 것입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속에 있는 당연한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근원적 목마름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광야에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돌아갈 성전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집에서, 커피숍에서, 직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안간힘을 다해 살아내려고 해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성전을 향한 그리움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누렸던 그 아름다운 순간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히 목마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전의 회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인간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 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 27:5-6)

여러분은 설교를 듣다 보면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감각이 기억합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고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압니다. 예배의 한 시간 동안 육신이 영혼에게 헌신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일주일 동안 세상에 나가 살 때 영혼이 육신을 배려합니다. 먹을 곳에 찾아가고, 미용실에 가고, 마사지 숍을 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배의 한 시간은 육신이 영혼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여러분의 영혼은 예배에 나올 때에 이제 숨 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영혼을 위해 투자해 주어야 삽니다. 그래야 광야와 같은 일주일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시간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 8:10)

코로나19로 인해 세상 어디에도 웃음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소망이 사라졌을 때, 교회도 어둡고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지고 침울한 분위기로 예배가 이어진다면 그것은 시대를 향한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라 소망을 이야기하는 곳이고, 어둠을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라 빛을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슬픔을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라 찬송을 이야기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여러분 영혼에 빛을 가득 담고 세상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명을 가지고 예배드리십시오. 이 성전에서 영혼이 회복되고, 육신이 회복되고, 믿음이 회복되어 나가면 지금 어두운 세상, 지금 절망한 세상에 여러분이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이 밝게 빛나는 것처럼 큰 기쁨으로 이전에 없던 예배를 사명감을 가지고 드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소생케 하는 은혜가 지금부터 모든 예배 가운데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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