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장 40-52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중략)…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가 잘 알듯이 대개 여객기는 기장과 부조종사가 직무를 분담하여 비행을 합니다. 부조종사에서 기장으로 승격하는 데는 보통 10년 정도가 걸린다고 해요. 그러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경험이나 기술, 판단 능력 면에서 기장이 부조종사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되죠. 하지만 과거에 발생한 항공기 사고를 조사한 통계를 살펴보면 부조종사가 조종타를 쥐었을 때보다 기장이 조종타를 잡았을 때 추락 사고가 훨씬 많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왜 기장이 조종할 때 사고 발생 확률이 더 높을까요?

네덜란드 사회 심리학자인 헤이르트 호프스테더(Geert Hofstede)는 이 문제에서 조직이 지니고 있는 불가사의한 특성이 나타난다고 보고, 이런 현상을 ‘권력의 거리’에 적용해서 해석했어요. 부조종사가 조종타를 잡고 있을 때는 상사인 기장이 부기장의 행동과 판단에 자연스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장이 조종타를 쥐고 있을 때 부하 직원인 부조종사는 기장의 행동이나 판단에 반대 의견을 솔직히 말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상사에게 반론할 때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이 크다고 분석했어요.

여러분 이렇게 어떤 권력 관계에 의해 실수를 보완할 수 없이 사고위험이 더 높아질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 가지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능력과 경험 면에서 훨씬 더 노련하고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은 실수를 하고, 위험한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해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 사고는 능력의 부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태도의 부족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훨씬 더 많은 지식, 더 탁월한 기술, 더 다양한 경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태도의 결핍’이라는 것이죠. 이 태도의 결핍으로 인해 경험과 기술과 판단 능력에서 훨씬 뛰어난 기장이 더 미숙하고, 더 위험하고, 더 부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이 경험에 의존해서 늘 해왔던 대로, 익숙한 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습관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사고 확률을 높입니다. 마음을 다해야 할 자기책임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모든 능력 면에서 훨씬 월등한 기장에게서 더 많은 사고가 발생하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우리 삶의 많은 영역 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요. 정말 두려운 일이죠. 이런 태도는 우리 삶에 사고를 일으켜요.

오늘 본문 속 요셉과 마리아도 늘 익숙하게 해왔던 일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들 삶에 있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죠. 41-4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그들은 관례에 따라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말성경)

율법에는 13세 이상의 유대 성인 남자들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켜야 할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시대 이후 여러 지역에 널리 흩어진 유대인에게 이것은 실질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만큼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참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비춰 봤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신앙의 열심을 지닌 경건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그 익숙한 여정 속에서 늘 하던 대로 절기의 전례를 좆아 갔다가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해마다’, ‘예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여기에서 매번 반복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12년간 꼬박 같은 상황 속에서,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걸 강조해주고 있어요.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12년을 매해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유월절 행사를 치르는 일에 쌓인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있었을 거예요. 자기만의 방법이 생기고, 관록이 생기고, 일정한 패턴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어요. 바로 예수님이요.

여러분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43-44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기간이 끝나 그 부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일행 속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다가 그제야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성경)

오늘의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한번 주목해볼까요? 43절을 보면 ‘기간이 끝나’라고 말하고 있죠. 이 표현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 니산월 14-21일인 일주일간의 규례를 모두 준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느 한 날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유월절 기간을 온전히 지켰다는 거죠. 그래서 ‘끝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완성하다’, ‘완전히 성취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는 말씀을 대하는 그들의 충성스러운 태도와 헌신을 보여 주며,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 삶에서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완성해서 지킨 것이었어요.

바로 그때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린 특별한 헌신이 이루어지는 그때요. 삶에 주어진 과업을 완수하고 기분 좋게 그 만족감을 누릴 그때가 오늘 사건의 발단이 된 시점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바로 이러한 때를 주의하셔야 해요. 우리 인생에서는요. 때때로 완성이 실패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요. 이 완성의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쉽게 태도의 결핍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나의 책임과 의무를 다 했다고 느끼는 순간, 반복되는 일들 속에서 많은 경험이 쌓일 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묻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많아 질 때. 바로 그런 순간, 우리는 오히려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 때 마스다의 『츠타야 이야기』를 잠시 언급 했었죠. 그의 책에 ‘2호점이 실패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츠타야는 히라키타에 1호점을 만들고 많은 고객의 성원에 힘입어 그 기세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고리엔에 2호점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매장은 대실패. 츠타야의 2호점은 왜 실패했을까요? 마스다는 그 원인을 1호점의 성공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일할 때는 다들 자신이 없으니 모든 각도에서 겸허히 기획을 하지만 1호점의 성공 체험을 똑같이 하면 2호점도 성공할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거예요. 고객의 기분으로 매장을 만드는 과정을 밟는 것이 아니라 성공 패턴을 하나 더 만들려고 한다는 거죠. 바로 이 태도를 우리는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경영 방식이나 사업적 전략에서 뿐만 아닙니다. 바로 영혼의 관리 능력에서 말이에요.

아마 요셉과 마리아도 초행길로 예루살렘에 갔을 때는 모든 면에서 겸손하게, 민감하게 깨어서 많은 부분을 생각하고 돌아보고 준비했을 거예요. 단순히 종교적 관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월절에 대한 의미와 동행의 기쁨이 그들에게 살아 있었을 거라는 거죠.

하지만 자신의 행동 방식이 결정되고 자기 경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매순간 동행에 집중하던 민감함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이뤄놓은 어떤 성취 위에서 안주하려는 태도가 생깁니다. 우리는 날카롭게 이런 태도를 점검해야 해요.

유월절은요. 출애굽의 사건에 대한 기념절기이죠.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신해 죽은 이 어린양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Pass over.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히브리인들이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결국 유월절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들은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잃어버리게 되었어요.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정작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일이요.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가운데 어떠한 순간에도 본질이신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한 가지를 기억하세요. 인생은 능력이 아니라 태도로 사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의 출발선에서 하루를 시작하려는 안일함이 아니라, 오늘도 또 하나님을 새롭게 목말라 하는 태도요. 익숙한 것들 속에서 무뎌져가는 주님의 임재에 대한 감도를 지속적으로 갈고닦는 태도요. 이것이 날마다 본질을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영혼의 노동인 것이에요. 우리가 이 태도를 잃어버리면 언제든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홀리 임팩트 찬양 팀에 가끔 칭찬과 격려를 남길 때가 있어요. 영적인 호흡이 쌓이면 쌓일수록 팀이 더 견고해지고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고요. 그리고는 말해요. “그렇지만 늘 깨어 정신을 차리고. 예배는 항상 0부터 시작.”

영혼의 관리는요.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성은 경험과 노하우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영혼의 성장은 언제나 자신을 0에서부터 시작하게 하는 태도에서부터 길러지는 것이죠. 이러한 자기 설정 능력이 없으면 오히려 경험이 독이 됩니다. 영성은 동일한 경험을 반복한다고 해서 결코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장은 이 0점을 끊임없이 재설정하는 태도에서부터 길러지는 것이에요. 매 순간의 기름부음에 의존해서 예배하는 것이에요. 그러려면 끊임없이 구하고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얼마 전 가수 송창식 씨에 관한 짧은 클립을 본적이 있어요. ‘연습과 결과는 완전 정비례’ 라는 타이틀 이었어요. 여러분 대중음악을 하는 이 분이 자기 음악 인생철학을 이야기 하는데요. 예배자인 저 자신을 많이 돌아봤어요.

송창식 씨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인생을 노래에 건다면, 그 노래를 어떻게 하겠냐?”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불문에 들어서 불공을 드리는 스님들이 평생 좌선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어떤 길을 가고자 할 때 평생을 언제나 새롭게 반복하는 일말이죠. 한 때 반짝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걸 평생 우려먹으려 하는 근성을 경계하라는 이야기였어요. 재주로 평생 음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처음에야 재주와 소질이 반짝 그를 돋보이게 해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면서 갈고닦는 연습에 비례해서만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똑같이 초보자들이나 반복해서 연습하는 기타 주법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습한다고 해요.

이것이 그의 0점인 것이죠. 여기에서부터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 음악에 인생을 건 사람도 이렇게 자신을 비웁니다. 그렇다면 진리에 인생을 건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어요? 예배에 인생을 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0에서부터 시작하세요. 자기 고백을, 자기 성취를, 자기 의를, 자기 경험을, 그렇게 비우는 것이에요. 그때서야 우리는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0점으로부터 우리는 최고의 예배와 인생의 최선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의 예배가 바로 그 태도를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예배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매순간이자 평생의 태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43절 하반절과 4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일행 속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다가 그제야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성경)

‘그러나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가장 중요한 분과 분리된 채 멀어지고 있었지만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일행 속에 있으리라 생각한 그들의 그릇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뭐 이런 부모가 다 있나? 어떻게 자기 아이가 없어진 것을 모를 수 있나?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상황을 생각해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이해가 되요.

당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인파들이 오갈 때 사람들은 친족 단위로 움직였어요. 산행을 할 때 도적떼들이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무리지어 이동을 했던 겁니다. 그렇게 이동을 할 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그룹을 지어서 움직였어요.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 쪽 가운데 한 편을 따라 갔죠. 그러니까 당연히 요셉은 아이 예수가 마리아 일행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반면, 마리아는 요셉 일행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려 하룻길을 가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확신 속에 예수님의 부재가 오래 방치 된 것이에요. 여러분 이 표현을 보세요. 하룻길이라고 하잖아요. 시간이 거리가 됐어요. 방치한 만큼, 점점 더 벌어졌어요. 어느 편에 있다고 확신했든지 간에 이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거예요. 예수님의 존재감이 그들 가운데 희미했던 것입니다.

분명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의심의 순간이 있었을 거예요. ‘어? 예수가 어디갔지? 어? 예수가 안 보이네?’ 아이 예수님이 그들의 시선에 들어오지 않을 때 순간순간 이런 의심이 찾아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의심을 적당히 방치합니다. 부모로서 그 의심이 찾아온 순간, 즉각적으로 아이를 찾아야 하는데 책임을 적당히 유보하고 미뤄두는 것이죠. 그리고 적당히
확신합니다. ‘어딘가에 있겠지 친척들과 있겠지.’

여러분 이것은 긍정이 아니라 게으름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미루기 위해 적당히 외면하는 것이에요. 경각심이 끼어들 때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을 잘못된 확신 속에 하루 길을 가도록 만들었어요.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가장 민감했어야 해요. 본질에 대해 가장 먼저 행동했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본질에 대한 무감각이, 이 지체된 반응이 결국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시간을 지연시킵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더뎌질수록 우리 마음도 무뎌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무뎌진 만큼 우리의 회복은 더뎌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에게도 이렇게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릇된 확신이 있어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 안에 당연히 예수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혼 생활을 하면 갈고닦지 않아도 당연히 사랑이 언제나 유지될 거라 생각해요. 직장 생활을 하면 노력하지 않아도 당연히 자기 몫의 성장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냥 그렇게 믿고 싶어서 자기 생각을 공교하게 만듭니다. 이 당연함이 인생의 적신호인 겁니다.

흔히 영적 침체에 빠졌다고 말하죠. 영적 침체는 어떻게 빠지는 것일까요? 영적 침체는 긴장감이 찾아올 때마다 적당히 외면하고, 경각심을 느낄 때마다 자기를 위안 하면서 빠집니다. ‘이 정도면 됐지’하는 생각에 점점 멀어지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못한 채, 당연하게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영적인 생활에 만족 할 때 찾아오죠. 그렇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지조차 모르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위기의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세요. 영적인 반응속도가 좋은 사람들이 되세요.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 주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요. 우리가 말씀에 대한 반응을 미루고, 하나님의 임재 의식에 대한 반응을 늦추면, 먼 길을 가서야 깨닫게 됩니다. 내게 주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회복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요. 특별히 분주함과 바쁜 일과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힘써 지키세요.

한자에는 ‘바쁠 망(忙)’ 이라는 단어가 있죠. 이 한자는 형성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글자로 마음 심( )+ 잃어버릴, 달아날 망(亡)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쁘다는 말은 ‘마음을 잃어버린다’라는 뜻이라는 거죠.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분주함으로 일하는 것은 헌신의 표시가 아니라 배신의 표시라고 했어요. 그만큼 분주함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이 섬김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중요한 본질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주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 영적 긴장감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마음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여러분의 일상의 시간을 주님께 구별하여 드리세요. 해야 하는 많은 일 속에서도 흩어지는 마음을 주님께 집중 할 수 있는 믿음과 사랑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뒤늦게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셉과 마리아는 놀라 당황해서 예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44-4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일행 속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다가 그제야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3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성전 뜰에서 예수를 찾게 됐습니다.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말성경)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기 시작하죠. 친척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찾지 못하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찾았어요. 3일이 지나기까지요. 3일의 시간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찾는 데에 왜 3일이나 걸렸을까요?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에서 그분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예루살렘 놀이터란 놀이터는 다 돌아다녔겠죠? 12살 남자아이의 흥미를 끌만한 곳을 다 찾아다녔을 거예요. 저는 이 지점에서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어떻게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어요. 우리는 사소한 물건을 잃어버려도 나름의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잃어버린 것을 추적하게 됩니다. 내가 그 물건을 완전한 무의식 상태에서 어디에 놓을 확률이 큰지 그 무의식을 더듬는 과정도요. 다 나름 개연성을 따라 가는 거예요. 핸드폰 잃어버렸을 때, 차키 잃어버렸을 때도 추적해내는 방법이 있잖아요.

여러분이 부모라면 아이를 잃어버린 장소에 되돌아 왔을 때 어디부터 찾아가시겠어요? 당연히 아이의 시선과 주목을 끌만한 것부터 추적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은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보다도 훨씬 더 큰 위기입니다. 부모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이 어떻게 아이가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보다 크겠어요? 그러면 무엇보다도 부모는 아이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아이의 시선을 따라 아이를 찾아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장난감 가게, 저 앞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풍선. 아이의 입장에서부터 주변을 되짚어 보게 되어 있어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처음 그 자리에 되돌아갔다면 무엇부터 했어야 할까요? 정말 예수님을 이해했다면, 정말 예수님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면요. 당연히 성전부터 갔을 겁니다. 그런데 장장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엉뚱한 곳에 가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여러분 이건 분명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어요. 얼마나 애가 타서 찾았겠어요.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다녔겠어요. 여러 가지 불안과 자책과 두려움의 시간을 지났을 거예요. 제 생각에는 성전 빼고 예루살렘을 다 훑어본 것 같아요. 성전에는 있을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3일이 지나서야 설마 여기에 있으려고?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들어가니 거기 예수님이 계셨어요.

지금 요셉과 마리아에게 근본적으로 무너져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왜 3일 동안 헛수고를 했나요? 요셉과 마리아에게 아이 예수는 12살짜리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이것이 마리아의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예수님의 잘못된 존재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은 구원자셨어요. 마리아는 오랫동안 일상에 파묻혀, 아들 예수가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인줄을 잊고 있었어요. 일상에 희석된 예수님의 존재로 인해 마리아는 어디에 가야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던 거예요. 예수님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 못했어요. 그들은 분명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갖지 못하자 그들은 삶의 문제에 대해 엉뚱한 답안지를 내놓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신앙생활이 여러분의 일상이 되고 예배와 말씀이 여러분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삶에서 마주하는 인생의 문제를 제대로 풀 수가 없어요. 우리 인생에는 온통 오답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두려워지고 조급해지며 불안해질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오랜 시간을 방황합니다. 이곳저곳 열심히 헤매며 돌아다녀요. 그럼에도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자리에 가서 예수님을 찾아요. 회복이 없는 곳에서 회복을 구하고, 소망이 없는 자리에 가서 소망을 찾아요. 평안이 없는 곳에서 평안을 구하고, 자유가 없는 곳에 서서 자유를 갈망합니다. 여러분이 노력을 안 한 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은 잘못된 구함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생은 너무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도 방황합니다.

여러분 단순하게 풀어야 해요. 예수님이 계실 곳으로 가야죠. 두려움을 어떻게 물리칩니까? 인생의 불안을 어떻게 해결하시겠어요? 어디로 갈지몰라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어떻게 해결하시겠어요? 오늘 본문은 사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조금 난이도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완성 뒤에 잇따르는 실패, 일상 안에서 발견되는 부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마 여러분의 직장에서 상사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잘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목사님, 신앙생활에서도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잘 하는게 중요하다니요? 너무 어렵네요’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신앙생활을 무의미한 열심히 아니라 잘하려면 반드시 두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태도를 갖춰야 하고요. 다음, 초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을만한 데에서 찾아야 해요.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고 사람들 속에서 찾다가 끝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던 장소로 돌아갔어요. 그랬더니 주님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어요. “너희 첫 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가를 생각하고 그 자리로 돌아가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세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요. 우리 인생의 가장 귀한 것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에서부터 시작하세요. 주님과 나누었던 첫 사랑의 자리로, 그 사랑으로 돌아가세요. 주님이 계신 자리로 달려가세요. 말씀이 있는 곳, 임재가 있는 곳, 기름 부으심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우리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은혜가 있길 축원합니다.

원유경 목사

서울 여자 대학교 학사
횃불 트리니티 M.div.
(現) 온누리 교회 SNS 청년부 담당
(現) 온누리교회 대학 청년부 예배 기획 담당
(現) 홀리 임팩트 예배 인도자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