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장 5-12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위기가 곧 기회다”란 말이 있습니다. 상황적으로는 분명 위기지만, 그것이 오히려 또 다른 성취와 더 나은 성공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성도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위기와 고난인 것 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릴 위해 예비하신 진정한 성장과 승리의 기회가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의 기회가 됩니다. 이처럼 위기 자체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아마도 신약에 나오는 말씀 중에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요, 찬양의 고백일 것입니다. 이 찬양 앞에 마음으로 무릎 꿇지 않는 성도가 어디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으심에 대한 이 아름다운 고백은 수많은 성도들의 삶과 신앙을 새롭게 했으며, 그 은혜 앞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의 이 찬양이 어떤 상황 때문에 기록된 줄 아시나요? 바로 빌립보 교회의 위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찬양이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위기를 드러내고 치유하기 위해 이 찬양의 고백을 써서 보낸 것입니다.

그럼 빌립보 교회에 있던 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교회의 ‘분열’입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하나됨을 권면하며 그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바울은 지금 분열하여 서로 공격하며 싸우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 예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땅히 취하고 누리셔야 할 영광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20대부터 단기선교를 많이 다녔습니다. 특별히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하는 지역을 자주 갔었는데, 그러한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늘 깨닫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 그 은혜 아래 사는 게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기도, 희생을 통해 얻게 된 구원이요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가난한 저개발 국가를 둘러보면 지금 한국 땅에서 누리는 많은 풍요로움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요, 이 땅에 태어나고 자라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절절히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내가 누리며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7) 여기서 ‘비워’의 원어적 의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다’입니다. 즉 예수께서 사람과 같이 되신 ‘성육신’은 그냥 좀 낮아지고, 겸손해진 상태가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상태가 되신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흙으로, 먼지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 예수님의 성육신 중 가장 놀라운 점은 그분이 우리 인간과 동일하게 10개월간의 태아 상태, 영아, 유아기를 거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요? 창조주께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모든 연약함, 제약을 그대로 다 지니시고 또 그렇게 사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그것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스스로 연약해지고 제약하는 삶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그것의 실제를 봅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죽음입니다. 내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연약한 삶을 사는 것을 넘어,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나요? 만방에 극악한 죄인임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메시아인줄 알았던 예수가 로마와 유대 권력 앞에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임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가 실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임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토록 열광했던 무리와 제자들도 떠났고, 심지어 그 순간만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예수를 버리셨던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수치와 연약함, 저주를 짊어지신 채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죽음으로 순종을 완성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도전을 던져줄까요?

3. 내 자아를, 내 옛 사람을 죽이고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내 자아를 죽인다는 게 내 성질 다 죽이고, 내 성격 싹 다 바꿔서 완전 다른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방해하는 내 안의 자아와 옛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각이 이 지점에 있습니다. 우린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종교 생활의 열심’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예배 많이 드리고,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는 등 이러한 종교 생활의 열심이 내 신앙을 증명하는 줄 압니다. 성질 좀 죽이고 조금 착하게 살면 마치 작은 예수가 된 것인 양 착각에 빠집니다. 내 자아, 내 옛 사람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내 자아와 옛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우린 얼마든지 훌륭한 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분열을 주도한 성도들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연약해지고, 스스로 제약하고, 심지어 내 자아, 내 옛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무조건 약해지고, 무조건 지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운동선수를 할 수 없습니다. 지려고 운동을 하는 선수는 없지 않나요? 누가 봐도 사기 치는 게 뻔해 보이는데, 그걸 감안하고 피해를 받아들여야 하나요? 물론 이렇게 극단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은 없지만, 오해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해 연약해지고 죽느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연약함, 제약, 죽음은 바로 하나님의 뜻,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 즉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이뤄야 할 때, 그 때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할 때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열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하나 되어 그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이러한 삶엔 반드시 ‘반전’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이 구절은 사실 문맥상 말이 안 됩니다. ‘이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전혀 논리적인 기능을 못합니다. 앞선 내용들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 될 수 있는나요? 약해지고, 제약하고, 심지어 죽음을 택하는 존재가 어떻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끼? 그러나 인간의 상식과 논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뒤집어졌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이러므로’가 논리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0-11)

결국 하나님이 예수를 지극히 높이셨고, 모든 존재 위에 가장 뛰어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예수를 예배하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놀라운 반전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가 무엇인가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열쇠’가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삶에는 반드시 반전이 있습니다. ‘이러므로’가 있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들과 비할 수 없는 그분의 영광과 풍성함으로 채워주십니다. 또한 스스로 연약해지는 삶, 스스로 제약하는 삶입니다. 이러므로! 약할 때 진정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내 자아를, 내 옛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죽는 것 같으나 부활합니다. 나를 지으신 그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어떠한 물음표 없이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재앙 앞에 우리 모두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린 두 개의 갈림길 위에 서 있습니다. ‘위기를 모면하기에 급급할 것인가?’ 아니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것인가?’ 코로나19로 인해 이전부터 지속되어온 ‘교회의 위기’는 더 가속화됐습니다. 사회적 신뢰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있는 싶을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늘 생존의 위기에 몰렸던 작은 교회들은 이젠 정말 고사 직전에 몰렸습니다.

상투적인 언급이 아닙니다. 이 중대한 위기를 우린 기회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외면해 왔던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삶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안의 무뎌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다시 품고, 그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나아가 이 세상을 품고 섬길 때 오늘 말씀처럼 ‘이러므로’의 은혜, 반전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장차 코로나19시대가 교회의 암흑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정신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부활의 능력,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축복의 시절로 기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노한석 목사 하늘벗교회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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