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장 32-43절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 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 작품을 보신 적 있으시지요? 누구의 작품입니까? 37세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명성을 날리게 한 작품 바로 입니다. 1508년 시작해서 4년 동안 작업을 하여 1512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로마 시스티나 성당 예배당의 천장화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높은 비계 위에 서서, 익숙하지 않은 천장화를 그리느라 허리가 꺾이는 듯 고통스럽다고 불만을 토해 냈고,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 달렸습니다. 이 작품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엄지손가락을 서로 맞닿을 듯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접촉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보면서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첫째, 하나님과 아담이 손가락은 서로 터치하기 이전일까요? 아니면 터치 한 이후일까요?

이 그림은 터치를 하기 이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터치 이전과 이후의, 감정은 다를 것입니다. 터치를 하기 전에는 ‘애틋함’이 있고, 터치를 한 이후 에는 ‘만족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애틋함이 느껴집니다. 이 그림에서 흰 수염의 노인은 하나님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아담은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무릎 위에 손가락을 늘어뜨리고 있는 반면 노인은 돕는 천사들과 더불어 하늘에서 땅의 사람에게 몸을 기울여 터치하기를 강렬히 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나님의 손가락 방향을 보세요! 아담의 엄지손가락은 땅을 향해 그런데 하나님의 손가락은 그 아담의 늘 어진 엄지손가락과 터치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생각나는 전래동화가 있습니다. 입니다. 옛날 하늘나라의 임금님에게 직녀(織女)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직녀는 건넛마을의 피리를 잘 불고 잘생긴 견우(牽牛)라는 청년을 보게 되었고 좋아하게 됐습니다. 임금님은 이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한 결같이 착하고 성실하다고 측창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견우와 직녀를 혼인시켰습니다. 그런데 혼인을 하 고 난 후 두 사람은 사랑놀이에 빠져 베를 짜는 일을 하지 않았고, 견우도 소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임금은 견우와 직녀를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강제로 헤어지게 했습니다. 단 부부의 정을 생각해 1년에 한 번 음력 7월 7일에 만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칠월 칠석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은하수 때문에 서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까마귀 떼와 까치들 이 은하수에 다리를 만들어 주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다리를 오작교( 烏鵲橋까마귀 오, 까치 작, 다리 교)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게 되었고 매년 음력 7월 7일에 비가 많이 오는 이유가 견우와 직녀가 끝없이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헤어져 터치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리고 만남에는 그리웠던 세월만큼 기쁨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 애틋함이 담겨 있습니다.

둘째, 이 그림에서 과연 누가 먼저 손가락을 내밀었을까요?

각자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우리가 사랑함은 그라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이 말씀이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미셨음이라” 신앙,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미는 손가락에 우리가 손가락을 내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과 나의 손가락을 접속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응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손가락과 나의 손가락이 이어지는 것, 하나님과 ‘Ontact’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청춘 남녀가 서로 만나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며 교제를 시작하게 되면 맨 처음 하는 행위가 무엇입니까?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것입니다. 손을 터치하는 것입니다. 그 손을 통해서 따뜻한 상대방의 사랑을 전달받고 느끼게 됩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을 잇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손가락의 터치를 넘어 하나님의 품에 우리 가 안기는 행위입니다. 신앙은 바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행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한 후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주제가 ‘돌아온 탕자’아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거리가 멀어도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거리가 멀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입니까? 아들 이 집을 떠난 날부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발견하고 달려가 아들을 안 고 입을 맞춥니다. 이런 아버지의 행위에 대하여 불평하는 큰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2)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포기 하지 못해서 기다리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죽었다고 여겼던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거지꼴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아왔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살아 돌아온 아들을 안는 아버지는 얼마나 좋았을까요?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 마음은 아버지가 되어 보지 못 한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다음 그 림을 볼까요?

이 작품은 1912년 독일의 에밀 놀데(Emil Nolde)의 작품입니다. 십자가 앞 좌측에 마리아와 여인들 이 그리고 우측에 로마의 군병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서 두 팔을 벌리고 그 손목에 못이 박혀 있고 피가 흐릅니다. 그 벌리 신 두 팔로 세상을,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옆에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좌우의 두 강도는 예수님의 손과 겹쳐져 있습니다. 왼편의 강도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우편의 강도는 눈을 뜨고 있습니다. 군인들은 신 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눅 23:39)고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의 고개는 숙여져 있고, 예수님의 우편의 강도 역시 고개가 숙여져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우편의 행악자는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 행악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눅 23:39)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그 행악자를 꾸짖어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0)

유대인은 모두 야훼 신앙에 대해서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그러나 교육을 받았다고 하여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았고 그 결과 사 회적 악을 행하게 되어 십자가에 죽일 만큼 큰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좌편의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우편의 강도는 그 조롱자를 꾸짖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자신은 행한 일에 대한 결과이지만 예수님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무기력한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요청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 23:42)

이 행악자의 간청이 이해되십니까? 함께 죽어가는 마당에! 좌편의 강도 가 정상이에요? 우편의 강도가 정상이에요? 아니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비방을 하지 않는 것만도 대단한 것 아닐까요? 어떻게 같이 십자가에서 죽 어가는 처지에 이런 위대한 고백과 간구를 할 수 있습니까? 이 행악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은 모두 옳은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 신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행악자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분명히 예수님의 사역을 보았을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우편 강도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주님은 이 행악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구원받은 행악자를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십자가에서 세 마디 한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나?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쉬운 일일까요? 십자가 위에서 그것도 기적을 보이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가 동일하게 죽어가는 마당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좌편의 강도처럼 “너나 나나 똑같네!”라고 하는 것이 비난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우편의 강도는 예수님의 삶을 보았고 그 삶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예수로 오신 것과 예수님의 모든 일생의 삶을 내가 받아들이고 그가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강도는 그 죽어가는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 결코 쉽지 않은 믿음의 고백을 하였고,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손끝은 에밀 놀데(Emil Nolde)의 예수의 십자가 손끝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천지창조 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은 골고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좌편의 강도 역시 자신의 손이 예수님과 겹쳐 있지만 그 손을 예수님께 로 향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오른 편의 강도만이 그 손끝을 예수님의 손에 터치했습니다. 그 강도는 비록 이 땅 위에서 선하게 살지 못했지만 그는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고백했고, 믿었고, 의탁(依託)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 위에서 살면서 선한 일을 하면 착한 일을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귀하신 사 랑에 우리가 손끝 한 번 내밀었더니 주님이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구원 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벌린 두 팔로 피곤한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몸을 안아 주시며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허 물과 죄를 사해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을 ‘십자가 위의 믿음으로’ 정중히 초대합니다.

장승권 목사 청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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