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 4-5절, 17-19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 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 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 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 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 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소명이라는 뜻은, ‘부를 소(召)’에 ‘목숨 명(命)’ 자를 씁니다. 다시 말해 ‘부름받은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비장하죠. 다르게 풀어보자면, ‘목숨 걸고 순종해야 할 부르심’이라는 뜻입니다.

사명은 무엇이냐 하면 ‘심부름 사(使)’ 자에 ‘목숨 명(命)’입니다. 즉, ‘심부름 받은 목숨’입니다. 요약하자면, ‘소명’은 ‘부름받은 목숨’이고, ‘사명’ 은 ‘보냄 받은 목숨’입니다. 오늘은 부름받은 목숨, 즉 소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6소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생 중에 여섯 번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하나 여섯 번의 부르심을 설명하는 가운 데 여러분은 받았는지 아닌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산다면, 적어도 자기를 부르신 것과 그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 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망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 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 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 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 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엡1:17-19)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6가지의 소명은 어떤 것일까요?

첫 번째 소명, 창세전에 부르심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선택’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을 함께 읽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전에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누구를 부르실지, 선택하시는 부르심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은 이 땅에서 자녀로 부르심을 받지 못합니다. 설령 누구로부터 전도를 받아도, 귀가 열리지 않아 듣지 못하고, 눈이 열리지 않아 보지 못하고, 그냥 그 복음을 농담으로 여기고 맙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 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3-15)

그러나 창세전에 선택된 사람은 복음이 들릴 때 귀가 열려 듣게 되고, 영 안이 열려 보게 되면서 구원을 얻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을,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6)

복음이 들리고 보이는 사람은 창세전에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고, 들어도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영혼은 복음을 하찮게 여기고 농담으로 여기는 첫 번째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가지고 천사가 와서 말을 했을 때, 구원받을 롯은 그 말을 듣고 소돔 성을 벗어났지만, 그 사위들은 그 말을 듣고도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 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 19:14)

여러분이 평생 주님께 감사해야 할 제목이 무엇일까요? 복음이 귀에 들린다는 것입니다. ‘들린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것 때문에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것이 들리고, 믿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여러분을 자녀로 선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복음을 듣 자마자 바로 믿는 사람이 있고, 좀 오래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바로 믿지 않았다고 해서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믿게 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소명, 세상으로 부르심입니다.

이것을 ‘출생’이라고 합니다. 한 인간이 출생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으로 부르신 부르심입니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이 출생이라는 부르심을 거역해서도 안 되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으로 부르시기 위해 임신과 출산을 통해 사람을 이 세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낙태를 하여 아이를 없애거나,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가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를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그냥 태어난 사람은 없고 실수로 태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 중의 하나를 자기를 항상 ‘막걸리 보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막걸리보이냐고 물어보니, 우리 아버지가 막걸리 먹고 집에 들어와 서 실수로 자기를 낳았다고 해서 막걸리 보이라고 했습니다. 막걸리 먹고 낳았든, 식혜를 먹고 낳았든, 실수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두 번째 부르심을 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소명입니다. 막걸리 보이가 무슨 소망이 있냐며 말썽 꽤나 부리던 그 친구는 지금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 소명, 구원으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창세전에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그 부르심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순간은 태어난 아이가 동사무소에 이름을 올리는 날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식 적인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예수님을 영접하면 창세전에 선택된 자녀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이제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네 번째 소명, 일꾼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심부름 사(使)’ 자에 ‘목숨 명(命)’. ‘심부름 받은 목숨’이라고 합니다.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녀의 권세 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녀로써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사명을 어떻게 발견하는지,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다섯 번째 소명, 죽음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을 살다가 죽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소천’이라는 말을 씁니다. ‘부를 소(召)’, ‘하늘 천(天)’을 써서, ‘하늘이 불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목숨’, 즉 ‘소 명’입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가 죽음을 ‘소천’이라고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이 불렀다’는 뜻입니다. 그냥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집으로 부르시는 것처럼 하늘이 부른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어떤 용어를 쓰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스텐퍼드(Stanford) 대학을 졸업하고 캐임브리지(Cambridge)와 예일대학 (Yale University)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모교인 스탠퍼드에서 레지던트로 일하며 미국 신경과 학회로 부터 최고 연구 상까지 받으며 장래가 촉망되던 36의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는 7년 레지던트의 마지막 1년을 남겨둔 어느 날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시한부 인생이 됩니다. 그는 자기가 하루하루 생명이 저물어가는 날들을 담담하게 글로 표현해서 책으로 출판합니다. 한국에 도 번역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죠. 그 책 제목은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입니다. 이 책의 내용도 참 좋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제목입니다. 그는 죽음을 ‘마지막 숨결이 바람이 되어 사라지는 것’ 이라고 표현합니다. 인생의 헛헛함과 허무함을 그 제목에 담은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죽음을 ‘귀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늘로 돌아간다는 표현 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 시인은 죽음을, ‘귀천, 즐거운 소풍 끝내고 하늘로 되돌아가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독교의 죽음과 가장 근접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소명에 관한 영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영화 입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1917년, 독일군에 의해 모든 통신망이 파괴 된 상황 속에서 영국군 병사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에게 하나의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함정에 빠진 영국군 부대의 수장 매켄지 중령에게 에린 무어 장군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은 1600명의 아군과 블레이크의 형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공격하러 들어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러 갑니다.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이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블레이크는 죽고 스코필드만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사명을 위해 끝까지 걸어갑니다. 겨우 도착하니 1600명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한 병사의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노래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저는 방황하는 가련한 나그네입니다 전쟁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떠돌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가는 밝은 그곳에는 병과 위험이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저는 요단강을 건너 고통이 없는 그곳으로 갑니다 집을 향해 갑니다
먹구름이 감싸리라는 걸 압니다
가는 길이 거칠고 험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곧 황금들판이 펼쳐지겠지요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이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 저는 어머니의 집으로 갑니다
사랑했던 모든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갑니다 요단강을 건너 집을 향해 갑니다
곧 모든 고통이 끝나겠지요
전 교회 묘지에 잠들어 있겠지요
제 십자가를 지고 삶의 보상을 받겠지요

저는 이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갑니다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
저는 지금 요단강을 건너 그곳으로 갑니다 저는 지금 집으로 갑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자체가 두렵기도 하고, 그 순간이 무섭기도 하고, 남겨진 세상이 궁금하기도 하고, 가족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죽음을 이긴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죽음을 끝이 아닌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여섯 번째 소명, 시상대로의 부르심입니다.

죽음은 최종적인 부르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부르심 뒤에는 또 한 번의 부르심이 남아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는 죽어서 천국으로 불려가지만, 누구는 죽어 지옥에서 불려갑니다. 이때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천국의 아버지 집에서 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부르는 소리는 아버지 집에서 어서 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스데반입니다. 스데반만큼 아름답게 죽은 사람이 있을까요? 스데반은 죽음을 공포에서 감격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 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 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5-56, 60)

스데반은 시상대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도 평안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심판대로 가는 사람은 비참한 인생이지만, 시상대로 가 는 인생은 신바람 나는 발걸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 음 후에 시상대로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이 예비해 두신 상을 받는 것으로 여섯 번째 소명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후에 받을 상이 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상이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상을 바라면서 신앙생활 을 하냐며 욕심 없는 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순수하게 믿어야지 무슨 상 받으려고 믿느냐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고, 종교생활 열심 히 하라고 기독교가 만들어낸 거짓 교리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상대로의 부르심을 위하여 살아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4)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 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 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6-8)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2)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분명히 우리가 죽은 후에 시상대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반드시 이 시상대에 서기 위해 오늘을 열 심히 예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시상대에 서 받을 많은 상들이 있겠지만, 받을 상중에 가장 큰 상은 무엇일까요? 하 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상을 우리에게도 주실 터인 데, 성도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우리가 받을 상중의 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시상식에서 우리가 하 나님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와락 껴안고 펑펑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눈물을 직접 닦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물로 받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복된 인생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 평생에 이 여섯 가지 부르심을 다 받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여섯 가지 부르심의 소명이 여러분 가운데 이루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병락 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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