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장 31절, 로마서 14장 7-8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저는 하나님 없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누군가 물어본다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제의 아쉬움과 내일의 두려움 사이에 끼어 살아가는 불안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작년 추석 때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황 나훈아 씨의 신곡 에 도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중략)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 형 가보니까 천국 은 있던가요 테스 형.”

어쩜 인생을 이렇게 요약해서 구슬프게 묘사를 했는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어제 같은 오늘이 왔기에 살기는 하지만, 오늘 같은 내일일지는 모르기에 반백년을 살아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또 내일이 두려운 것이 인생입니다.

톨스토이(Leo Tolstoy)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 김상용은 왜 사냐고 물으면 그저 웃는다고 하더군요.

저는 오늘 이 질문을 예수님께 물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왜 살아야 합니까?”

법륜은 그의 책 『인생수업』에서 사람이 왜 사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태어난 사람이 왜 태어났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태어났으면 살아라.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찾기보다 태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저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요즈음 현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갑니다. 요즈음 생활방식을 잘 나타내는 말이 ‘욜로족’입니다. YOLO.(YOU ONLY LIVE ONCE.) – “한 번밖에 없는 인생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묻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그런데 이 말은 서양에서는 진화론에서 똑같은 논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다윈주의자로써 『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등의 책을 써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진화생물학 자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인류는 생명체의 의미에 대해서 항상 궁금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생명체는 DNA의 생존을 영속시키려는 것보다 더 높은 목적이 없다. 생명체는 단지 맹목적이고 냉혹한 무관심만 있을 뿐, 설계와 목적, 선과 악이 없다.”

그의 표현을 요약하자면, 인간이 사는 이유는 ‘목적 없는 생존’(Survival without purpose)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그냥 생존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나, 더 큰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낸 우연의 산물이다. 우연의 산물이 무슨 목적 이 있겠는가?’입니다.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진화론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고,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사 는 것으로 인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된 이어령 교수는 인간 은 ‘의미’로 산다고 말하더군요.

‘과학이 사람은 눈을 왜 깜박이는가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물질인 사람의 눈꺼풀이 운동에너지를 사용하여 눈꺼풀과 눈꺼풀이 만나게 하는 것이 사람이 눈을 깜박이는 이유이다.’

사람이 눈을 깜박이는 것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는 물질과 빛의 속도의 제곱이다. E=MC2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공식으로 이해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눈을 깜박이는데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친구끼리 미팅을 나갈 때 약속 을 하면서, “야 내가 눈을 한번 깜빡이면 내 앞에 앉은 여학생이 좋다는 뜻이고, 두 번 깜빡이면 빨리 일어나자는 뜻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절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과학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의미의 존재라고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의미가 빠진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냥 탁자 위에 놓여진 물건이 아닙니다. 아니, 물건이라 해도 모두 만 들어진 목적이 있습니다. 컵은 컵대로, 볼펜은 볼펜대로, 종이는 종이대로 모두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던져진 물건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세상은 자꾸 인간을 향해 의미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유물론을 가르칩니다. 세상은 자꾸 우리에게 목적 없이 살고, 그냥 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가르쳐 자기의 존재를 쉽게 포기하고, 자살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어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어도 괜찮은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야 할 의미만 찾는다면 얼마든지 죽을 사람도 살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는 빈민 구호단체인 엠마우스(Emmaus)라는 단체를 만든 프랑스 최고의 휴머니스트 아베 피에르(Abbe Pierre) 신부는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입니다. 평생 50년 동안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집짓기에 나머지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의 저서 『단순한 기쁨』은 저에게 많은 감동을 준 책입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그에게 조르주라는 한 중년의 남성이 찾아옵니다. 기구한 자기의 인생을 설명하면서 자기가 최근 자살을 시도했는데 미수로 끝이나 괴로워하면서 다시 자살을 원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고는 도움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때 아베 피에르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잘 됐소. 당신은 이미 자살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죽는 거야 나중에 죽어 도 되니 급한 일이 없겠군요. 죽기 전에 부탁 하나 합시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집을 짓는데 손이 필요한데, 나를 도와 집을 몇 채만 지어주고 죽으면 어떻겠소.”

그때 조르주가 흔쾌히 당신을 돕고 죽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을 짓기 시작 하는데, 그곳에서 평생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자신감과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조르주가 나중에 아베 피에르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다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습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 야 할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는 존재입니다. 기독교는 동양철학이나 진화론이나 유물론과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의 작품이라 고 믿습니다.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물건 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다 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 니라” (엡 2:10)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저는 성경 속에서 우리 가 살아가는 이유를 대략 세 가지를 찾아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물론 더 많지만, 세 가지만 나누어도 충분히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조금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하루하루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만물은 질료와 형상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형상은 질료로부터 만들어졌고, 그 만들 어진 형상은 또 무엇을 위한 질료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 는 질료입니다. 형상은 대들보입니다. 그러나 대들보는 또 집이라는 더 큰 형상을 만들기 위한 질료입니다. 다시 말해 대들보는 나무의 형상이면서 집의 질료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가 이것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흙은 질료이고, 사람은 형상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또 질료입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형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입니다. 우 리의 최종적인 형상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아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우리가 가져야 할 최종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인간의 목적은 우리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완전히 닮은 삶을 사는 것, 이것 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

이제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왜 사냐고 묻거든, 웃지만 마시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산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 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하루하루 닮아간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닮았다고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눈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 이 보여야 하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당신 예수 닮았소…’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사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예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가면,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보게 되어있습니다.

“아. 당신을 보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겠소.”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헛되게 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살아가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을 하루하루 닮아가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이 구절을 보면 먹는데도 목적이 있고, 마시는데도 목적이 있고, 무엇을 하든지 그곳에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뭐냐면, 하나님의 영광 을 드러내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먹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고, 어떻게 마셔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마시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인가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르게 접근 해보겠습니다. 설령,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고 해도, 우리는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먹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의 논쟁이 생겼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감사함으로 먹으면 괜찮다. 어차피 우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기를 먹 지 않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형제들과 함께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라도 고기를 먹는 것을 보면 시험이 드는 형제가 있다면, 그 형제의 믿음을 위해서 나 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먹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형제들에게 가린다면 나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영광을 돌리는 법은 몰라도, 안 먹으면서 영광을 가리지 않는 법은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영광을 받으실지 모르지만, 무엇을 함부로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지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때문에 구타를 많이 당했습니다. 목욕탕에 끌려가서 찬물을 끼얹고 두들겨도 맞고, 부당한 대우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구타를 당한 이유가 먼저 선임병 누구누구는 예수 믿지 만 술을 잘도 마시는데, 너는 왜 마시지 않느냐가 이유였습니다. 술을 마시는 예수 믿는 선임병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후임인 제가 밤마다 구타를 당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술을 마심으로 군 생활 구타 없이 교회 잘 다니면서 지냈는지 몰라도, 그 사람 때문에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던 사람들은 모두 힘들어졌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것 때문에 하 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것입니다.

회사에서 교회 잘 다니는 부장님이 술을 마시면, 방금 들어온 교회 잘 다니는 신입사원은 무조건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장님도 교회 다니는데도 마시는데, 네가 뭔데 안 마시냐고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위해 마실 것인가, 남을 위해 마시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게 믿음의 사람입니다. 내가 마심으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면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는지는 몰라도 어떻게 먹고 마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지는 너무도 쉽습니다. 영광 을 위해서 살겠다는 높은 포부보다, 영광을 가리지 않는 삶을 먼저 하나하나 실천하며 살겠다는 소박한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안 할 것을 우선 안하다보면, 해야 할 것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셋째, 찬송을 부르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적과 이유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최근에 저의 신간 『어둠 속에 부르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책을 사서 사 인을 해달라는 분, 또는 선물을 드리는 분들에게 몇 자 써서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쓰기 시작한 문구가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라고 하지 않고, 찬송이 되세요.’ 어쩌면 인생은 입으로 몇 곡 찬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온통 찬송이 되는 것이 하나님 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내가 살아온 전체 인생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한 곡의 찬송이라고 표현한다면 큰 감동이 됩니다.

노래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높은 음표도 있고 낮은 음표도 있듯이, 잘 나갈 때도 있고, 인생의 골짜기를 헤맬 때도 있습니다. 쉼표처럼 쉬어가야 할 때도 있고, 스타카토처럼 끊어가야 할 때도 있고, 일이 점점 잘 풀리는 크레센도도 있고, 일이 점점 막혀서 어려운 디크레센도도 있습니다. 약한 몸으로 살아야 할 피아니시시모도 있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능히 이기는 포르티시시모도 있습니다. 삶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휘몰아치듯 살아가야 하는 프레스토도 있고, 마음은 급한데 일은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라르고도 있습니다.

1절은 기쁨으로 부르지만, 2절은 슬픈 가사를 불러야 할 때도 있고, 3절 은 다시 희망의 노래가 되어 부르면서 4절에는 장엄한 영광의 찬송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습니다. 외로이 혼자 부를 때도 있고, 배우자를 만나 듀엣 을 부르다가, 자녀가 생기면 4중창을 부르며 화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녀들이 출가를 하면, 다시 독창을 부르면서 찬송을 마무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가사를 잊어버려 당황할 때도 있고, 부르다가 내가 감동해서 눈물로 목 이 맬 때도 있고, 이제 모든 일이 잘 끝나는 것 같은데, 갑자기 도돌이표가 되어 다시 불러야 하는 인생의 고단함도 있습니다. 외로운 독창도 있고, 함께 부르는 중창도 있고,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합창의 때 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가 음표가 되어 삶이 하나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찬송을 어떤 찬송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떤 찬송이 될지도 궁금합니다. 우리 장로님 들이 인생을 걸고 만들고 있는 노래는 어떤 찬송이 될지도 궁금하고, 평생 우리 교회 새벽제단을 지키며 기도하던 할머니, 어머님 권사님들에게는 어떤 소리가 날지 그 노래가 궁금합니다. 지금 투병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식지 않는 그분들에게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올까 궁금합니다. 평생 선교지에서 인생을 보내신 선교사님 부부에게는 또 어떤 찬송이 나올 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러분에게 노래하는 나무 한 그루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가문비’ 나무입니다. 바이올린의 재료로 쓰이는 ‘가문비’ 나무는 나무가 살 수 있는 수목한계선의 가장 추운 곳에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 추위를 견디고 비바람과 싸우며 나무는 더욱 단단해지고, 그런 나무 1만 그루 중의 단 한 그루만 잘려 바이올린이 됩니다. 그 바이올 린이 되어 울리는 노래는, 그 추위와 비바람과 세월을 견딘 나무에서만 나오는 아름다운 노래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것은 노래를 부르게 하심이 아니라, 노래가 되게 하심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가 하나의 노래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오늘을 사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분 안에서 온전히 이룰 때까지 하루하루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는 것, 마시는 것 하나까지도 신경 쓰면서 이왕이면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멋진 찬송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멋지게 살아가십시오.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찬송이 되기 위 해 사는 것입니다.

최병락 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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