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장 7-13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 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 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설교 한눈에 보기

서론

우리보다 2천여 년을 먼저 산 시므온의 이때는 어떤 때였을까?

본론

1. 사랑은 여기 있으니…

2.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요구 ‘사랑’

3.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

4. 마땅한 일에는 수고가 따른다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적용하자.

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 신앙인들의 기독교인으로서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권위주의’와 ‘권위’는 서로 다릅니다. 권위주의는 없어져야 하지만 권위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권위는 사라지고 권위주의만 남았다는 것 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교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때, 교회는 비로소 권위를 갖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가장 강력한 권위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7)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권위는 없습니다. 교회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랑’입니 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은 아 마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서 목양을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깨닫게 된 진리 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무섭게 변질될 수 있는지, 사랑이 없는 소망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교회 공동체를 통해 경험한 듯합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 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의 덕목은 모두 ‘사랑’ 안에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지요.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몸을 내어줘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사랑이 중요할까요?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좋은 것도 사랑이 없으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소망을 붙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때로는 그것을 위해 싸우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랑은 싸워서 쟁취하는 것 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그 사랑이 어떤 ‘정의’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싸워서 한쪽만 남지만, 사랑은 둘이 함께 남는 것이니까요. 부부 간에 서로 옳다고 싸우다가 갈라지지 않습니까? 형제간에 서로 옳다고 주장하다 얼굴을 보지 않고 사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정의는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을 주장하며 ‘나의 편’을 만들려고 주장하지 만,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내가 그 사람 편이 되어주는 것이지요. ‘정 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정의밖에 보이지 않지만, ‘사랑의 눈’으로 보면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 사랑이 가진 능력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사랑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에게 ‘정의’를 따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2.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요구 ‘사랑’

C. S. 루이스(C. S. Lewis) 교수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에로스(Eros)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Storge)에 의해 양육되고, 필리아(Philia)에 의하여 성숙하고, 아가페(Agapē)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사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랑은 오직 한 가지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 것은 ‘아가페’라는 말인데, 요한일서에는 ‘아가파오’라는 동사만 28회, ‘아가페’라는 명사만 18회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아가페’라는 말은, ‘주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조건을 뛰어넘는 사랑,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순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격과 관계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 랑은 아직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할 만한 조건이나 관계를 요구하셨다면, 우리들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우리 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우리 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사랑’을 통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1-12)

3.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따라 살아가려 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면, 그 신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는 다 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아들을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주심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임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은 여기 있으니’의 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 꿀 수 있을까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으로 행동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함이 마땅한 이 유는, 그 사랑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권위는 그 사랑을 받은 확신 가운데 살아가면서 생깁니다.

4. 마땅한 일에는 수고가 따른다

요한일서 4장 11절의 말씀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주목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Dear friends, since God so loved us, we also ought to love one another.” (NIV)

NIV 성경의 표현 “We ought to love”는 ‘must’보다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의무의 차원에서 말씀하셨다면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천하는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기 싫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정 의 내려 볼 수 있지요.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대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표현하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상대방을 당신보다 더 중요한 사람처럼 대접해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고가 필요한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여러분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낫게 여긴 경험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 게 주시므로” (요일 4;13)라고 되어 있는데,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마음의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순간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사랑의 중매자이십니다. 이 사랑의 중매자로 인해서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교인들을 너무 나 몰라요. 글쎄 목사님이 보는 데서는 열심히 봉사하는데, 누가 보지 않으면 절대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이지 못할 텐데, 그분은 그렇게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고 마음이 평안할까요? 사람이 보는 데서 그렇게 했다고 과연 사랑의 열 매가 맺혀질까요?

사랑의 열매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음으로, 우리 육체의 소욕과 인간의 욕심이 꺾일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가면 고인에 대 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오는 도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떤 목사로 기억할까? 열심히 일한 사람, 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목회에 성공한 사람…”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가 있다면, “우리 목사님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셨어”라는 말입니다. 다른 어떤 평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사역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입니다.
그러기에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로 모든 가치의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 – 매춘부, 세금 징수원, 종교적으로 모자라는 사람들 –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열렬히 받아들였다. … 그 들(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려 하지 않았고, 간음한 여인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으며, 죄인의 의로운 자와 교제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적’으로 보게 되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수고한다는 것은 나의 욕망과 나의 방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에게 쉬운 방식에 서 벗어나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세족식’입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을 때, 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을 닦을 때,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섬김의 방식’입니다. 세숫대야에 물을 담을 때, 차가운 얼음물이나 80도가 넘는 물을 담아오면 발을 담근 사람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누군가의 발을 닦는데 물이 없이 맨손으로 발을 닦으려 한다면 얼마나 뻑뻑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 사랑의 요구를 피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이 마땅한 일을 위한 수고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방식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병삼 목사

월드휴먼브리지 대표
하늘다리호스피스 이사장
(現) 만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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