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1-11절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말과 속셈

봄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생명과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의 교회력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해주신 주님과 더욱 깊은 사귐의 기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짐을 버리고 길을 묻다』에 비교되는 두 사람의 기도가 나옵니다. 먼저 종교회의에 참석한 한 어르신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길모퉁이에 사는 저 친구는 정부의 보조금으로 먹고살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리를 배회하는 저 창녀는 에이즈에 걸렸지만 나는 깨끗합니다. 술집에 앉은 저 주정뱅이는 술이 없으면 못 살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 동성연애자에게는 도덕성 회복이 정말 시급하지만 내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 같은 인간을 세상에 존재케 하신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가 하면 전혀 칭찬받지 못할 사람 하나가 또 기도합니다. 그는 죄를 뉘우치는 마음이 사무쳐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정부 보조금으로 사는 저 형제처럼 저도 주님의 은혜에 기대어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에이즈에 걸린 저 자매처럼 저도 나쁜 행실에 물들었습니다. 술에 절어 사는 저 친구처럼 저에게는 고통을 덜어 줄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저 동성연애자들을 사랑하시고 바른길을 알려 주신 것과 같은 은혜를 제게도 베풀어 주소서. 주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두 사람은 기도라는 같은 행동을 하지만 그 말과 속셈이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본문은 그들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율법학자’는 오직 이곳에만 나오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과 함께 바리새파 사람들이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6절)을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를 나타내고자 본문은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 앞에서 예수님을 고발하고, 없애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이들이 생각한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 그리고 신명기 22장 22절에 따르면 결혼한 여자나 정혼한 여자가 간음을 한 경우 모두 돌로 쳐서 죽이는 투석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에 비춰서 이미 죽은 목숨의 한 여자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손에 개처럼 끌려와 서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주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4-5절) 여자에 대한 심판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처결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저들의 말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대답

이 상황이 얼마나 참담한지요. 이야기 장면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사회적 심판이 끝났고, 처결만 남은 여인입니다. 그 여인을 주님 앞에 끌고 온 것은 그 여인을 빌미로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의 관심이 여자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기 위한 포석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여자의 생명은 의미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지금, 우리 사는 세상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면 어떻습니까? 권력자들, 기득권자들, 힘으로 역사까지 바꾸는 자들은 힘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시지요? 이들의 가장 큰 적은 자신들이 쫓고 있는 그것, 권력과 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권력과 힘으로 자기 기반을 견고히 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방식으로 관계하는 사람이 생명을 사랑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사실 그것과 상관없이 이 여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이 여인에게 주목합니다. 정황상 이 여인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자신의 죄를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이 소란한 현장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 한 것이겠지요. 그녀를 끌고 온 사람들은 이미 율법에 의한 심판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녀에게 묻지 않습니다. 변명의 기회도 없습니다. 자신을 살려달라고 소리칠 수도 없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들이닥쳐 던진 질문에 예수님은 잠시 당황하셨고, 사람들은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광기 어린 눈빛들로 여자를, 또 예수님을 쏘아보았을 것입니다. 여자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나와 함께 있던 남자는 어디로 간 거지? 아, 함정이었던 말인가? 그럼 난 예수를 잡기 위한 도구, 미끼인 것인가? 예수님은 뭐라고 하실까? 나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고 마는 것인가? 하고 여자는 생각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도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죄짓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리 안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이 모습 말입니다. 낯설지 않은 것은 왜입니까? 세상에서 돌림 당하고, 권력과 물질의 유혹을 받아 혼미해진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사람. 기득권의 견고함에 희생을 강요받고 탈진한 젊은이들 그리고 어머니들…….

그러나 끝까지 거기 서 계십시오. 마침내 우리는 얽매이고, 살기 가득한 눈빛의 사람들을 물리쳐 주신 주님께 “주님, 이제 한 사람도 없습니다”(11절)라고 말할 날이 옵니다. 죽음을 직면하는 이 여인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이용해 예수를 잡으려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만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고,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비로소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이 바로 복음의 현장입니다. 이보다 운 좋은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죄인인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누가 있습니까? 그분이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주님은 다가오시고, 일으켜주시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게 도우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살립니다. 살아갈 이유와 힘을 제공해주십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 사순절에 주님의 길에 동행한다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말 없이

주님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공개적으로 율법을 어기자고 주장하면 그대로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고, 혹시라도 예수님이 율법에 따라서 여인을 돌로 쳐 죽이자고 말씀한다면 그 또한 문제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자의적으로 사형 집행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체포할 확실한 구실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처신을 요한복음은 ‘그러나’로 이어갑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6절) 도대체 무엇을 쓰셨는지, 왜 그와 같이 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예수님께서 거기 모인 사람들,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죄를 쓰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설명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일체 모든 행동은 그 자체가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본문의 기록 자체가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즉, 종교 지도자들의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서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는 바로 그런 주님의 뜻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주님은 저들의 속셈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간음죄를 드러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허위를 폭로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이란에서 불리고 있는 어느 노래의 가사입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내 마음 우울하고 내 영혼 지칠 때
괴로움 몰려와 내 마음 무거울 때
나는 여기서 가만히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잠시 내 곁에 머무실 때까지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기에 산 위에 우뚝 설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기에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받쳐줄 때 나는 강해집니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나를 더 큰 존재가 되게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아무 말 없는 여인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여인 앞에서 주님은 아무 말 없이 말씀을 하십니다. 침묵의 말씀이 죄인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위선자들에게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바닥에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죄인만이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이제 이 장면은 절정으로 향합니다. 주님께서 7절과 같이 말씀하신 후에 그 자리를 피하셨더라면, 자신의 위기는 피할 수 있어도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살기 가득한 사람들이 광분한 채 모여 있으니, 주님의 말 한마디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몸을 굽히십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몸 굽힘은 이전과는 다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난 군중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이 여인을 치려면 나도 함께 쳐라’ 말입니다. ‘이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리가 여인과 가까이 있는 곳이고, 정서적으로도 곁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제 여인만을 향해 날아들 돌들이 주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앞세운 저들의 속셈은 이제 무력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율법보다 큰 이가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진짜, 죄 된 여자 하나를 위해서 같이 죽겠다는 것인가?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저 사람은 누구인가, 메시아인가?’ 하는 생각의 전복들이 저마다 일어났을 것입니다.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납니다. 그것도 ‘나이가 많은’ 이들부터 말입니다. 살면 살수록 죄를 짓는 것, 또 그것을 자각할 만한 염치를 기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저들의 속셈이 이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율법에 충실하여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잣대가 자신들을 향하자 율법을 회피하고 돌아선 것입니다. 권력과 기득권의 힘은 폭력을 양산하고 그 폭력으로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생명의 존엄까지도 해칩니다. 그들의 명분은 율법이지만 실상은 욕망입니다. 우리들의 명분은 교회와 공동체, 예수님이지만 실제로는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거창한 이념도 아니요, 종교적 신념도 아닙니다. 아주 단순히 그것은 욕망이고 거짓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마침내, 예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여인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유일하게 심판할 수 있는 주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리스에는 용서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용서를 발견한 사람은 나사렛 예수다. … 하루에 7번씩 70번을 용서해야 할 것이다. 용서는 보복의 정반대다. 보복은 죄에 대항하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용서’는 현대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관용’과는 다릅니다. 우리 시대에서 나에게 ‘죄’라는 개념 자체를 함께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가치를 상대화합니다. 윤리의 잣대를 상실한 시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성취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욕망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서받고, 인정받고 참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용서하십니다. 그의 위대한 희생이 위대한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죄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분명히 여인에게는 죄가 있지만 주님은 율법을 고집하는 대신 생명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이셨습니다. 보십시오. 죄 된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사순절의 시작을 요한복음 8장으로 하는 것은 죄 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 하던 그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는 이야기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59절). 주님을 만난 한 여인이 어떻게 용서를 받았고,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구원이 어디로부터 오는지요? 우리의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도, 출세하는 것도 아니라 하던 박노해 시인은 ‘봄은 누구에게나 봄이어야 한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올해도 농사짓는 것이다. 허리 숙여 불볕 이랑을 기며 태풍 장마에 애간장을 졸이며 누구도 대신하고 싶지 않은 일, 올 봄에도 내 땅에 씨 뿌리는 것이다. … 우리들 이간의 봄을 시작하겠다. … 평화의 봄을 씨 뿌리겠다. … 봄은 어디에서나 봄이어야 한다. 봄은 누구에게나 봄이어야 한다.” 죄 된 모습으로 세상의 힘과 권력에 끌려 다니는 우리 곁에 마침내 예수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 올 봄에도 허리를 굽혀 이랑을 갈고, 씨를 뿌리는 데 우리의 마음과 몸을 다 바칩시다. 이 말씀으로 우리의 사순절은 시작 됩니다. 평화를 위한 위대한 걸음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말없이 행동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김인규 목사

한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졸업
한세대학교 일반대학원 구약신학(Th. M.) 졸업
한세대학교 일반대학원 구약신학 박사 과정 중
(現) 동네마당 배움 대표
(現) 청주 다리놓는교회 부목사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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