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장 1~10절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중략)…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금문교는 현대 토목 건축물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이 다리를 건축하는 건 사실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고 불렸어요. 수면 아래 지형이 복잡하고, 강한 조류, 바람, 안개로 인해 설계과정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이 금문교의 설계자였던 조셉 스트라우스(Joseph Strauss)의 발언이 참 인상적이어서 영적인 문제를 돌파해 낼 때마다 가끔 그의 발언이 떠오르고 곱씹게 됩니다.

조셉 스트라우스는 이 다리를 디자인할 때 세 가지 하중, 즉 압력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는데요. ‘죽음의 하중’, ‘생명의 하중’, 그리고 ‘바람의 하중’입니다. ‘죽음의 하중’이란 다리 그 자체의 무게 곧, 자기의 무게에요. ‘생명의 하중’은 다리가 수용해야 하는 하루 교통량의 무게입니다. 그리고 ‘바람의 하중’은 다리에 불어치는 폭풍과 비바람의 압력이죠. 다리 설계사는 이 모든 하중을 다리가 다 감당할 수 있는 버팀대를 설계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런 세 가지 압력 속에서 인생의 하중을 짊어지고 삶을 살아가게 되죠. 나 자체의 무게가 있어요. 오로지 나 자신의 무게. 내 삶의 내용 자체일수도 있고요. 나의 한계와 결핍의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내 인생을 밟고 지나가는 문제들을 동시에 감당합니다. 타인으로 비롯된 무게일 때도 있고요. 돌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찾아오는 상황의 무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처럼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런 코로나19의 상황과 같이 말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때로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하중을 수용할 수 있는 버팀대가 필요합니다. 이 무게를 견뎌내야 인생의 다리가 건설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설계할 때 반드시 이 세 가지 하중을 고려한 버팀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버팀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직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이에요. 이 믿음이 없이는 우리 인생의 하중을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한 시대와 민족과 가정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 하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설계를 통해 어떻게 실현 불가능해 보였던 하나님의 약속이 은혜 안에서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데요. 끊어진 소망을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믿음의 다리가 세워집니다.

당시의 상황은 이집트의 왕 바로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번성하고 강해진 이스라엘 백성의 힘을 꺾기 위해 남아 살해 명령을 내렸을 때였어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할 때 여자아이면 살려두고, 아들이면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죽음이 선포된 가장 깊은 어둠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죠.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때 레위 지파의 한 남자가 레위 사람의 딸과 결혼 했습니다. 여자가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너무나 잘생겨 3개월 동안 숨겨 두고 키웠습니다.”(우리말성경)

그렇게 어둡고 고통스러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로맨스는 있어요. 한편으로 마음이 시린 말씀이에요. 게다가 죽음이 선언된 자리에서도 여전히 생명 또한 계속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속에 그런 대사가 나와요. ‘사운드 오브 뮤직’인데요. “하나님께서는 문을 닫으실 때 또 다른 창문을 열어두신다”라고요. 우리는 고난이 찾아오고, 사방에 어둠이 임할 때 인생에 생각지 못한 출구를 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고난이 깊어질 때,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게 돼요. 고통이 시작될 때, 구원의 계획도 함께 시작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말씀과 임재를 더듬어가며 그 새로운 출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남아 살해 정책이 온 이스라엘에 선포되었을 때, 정작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사명자를 그 가운데서 부르셨어요. 온 이스라엘에 아들을 낳은 산모에게 슬픔과 탄식이 터져 나올 때, 한 생명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에요.

옐로우스톤 공원에는 라쥐포울이라는 특이한 상록수 종류의 소나무가 있는데요. 이 소나무의 솔방울은 수년 동안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떨어져도 솔방울로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 솔방울들은 오직 강한 열에 의해서만 열리게 되어 있어요. 아주 특이한 소나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솔방울을 그렇게 만드신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

옐로우스톤에 이런 대규모 산불이 났을 때의 일이었어요. 공원의 모든 산림과 초원을 다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불이었어요. 생명이 자라는 모든 땅이 폐허가 된 느낌으로요. 너무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이 완전히 피폐해졌을 때, 모든 생명이 다 사라진 것 같은 그 척박한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바로 라쥐포울 이라는 소나무였어요. 숲에 불이 나서 공원을 휩쓸고 지나가면 공원에 있던 모든 나무가 타 없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불의 열기가 라쥐포울 소나무의 솔방울을 열리게 하여 이 지역에서 제일 먼저 자라나는 첫 번째 나무가 됩니다. 바로 이 나무가 불 타버린 옐로우스톤의 새 숲이 됩니다.

여러분! 참 신비롭죠. 모든 생명을 휩쓸고 간 듯한 불길 가운데에서 움트는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있다는 것이요. 죽음을 가져온 그 불이 생명을 피웠던 것이에요. 우리의 영혼도 그렇습니다. 시련의 불 속에서만 열리는 영혼의 솔방울이 있어요. 뜨거운 불 속에서만 열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때에만 드려지는 믿음이 있어요. 고난의 불, 고통의 불, 시련과 역경의 불속에서만 열리는 믿음의 솔방울이 있고 기도의 솔방울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통과 슬픔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채 우리의 삶을 다 태우고 소멸시킨 것 같아 보이지만, 바로 그때 드려진 믿음, 그때 열린 기도가 우리 인생의 새 숲을 이룹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절망할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 어둠을 지날 때 우리는 이 믿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요.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세요? 가장 깊은 어둠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새 역사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쓰이고 있음을 믿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의 엄마 요게벳은 아이에게서 출중한 기운을 느끼고 3개월간 아이를 숨겨두고 키웠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릅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여자는 갈대 상자 하나를 준비하고 거기에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기를 그 안에 뉘었습니다. 그리고 갈대 상자를 나일 강 둑을 따라 나 있는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우리말성경)

삼 개월 동안은 어떻게든 아이를 숨겨서 키웠는데요. 이제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아이가 너무 우는 거예요. 아기의 울음소리는 숨길 수 없었어요. 발각되기 쉬웠겠죠. 여러분! 이때 요게벳을 보세요. 그녀는 우리에게 믿음의 첫 단추를 보여줍니다. 요게벳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잘 알고 있었어요.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낀 요게벳은 아이를 갈대 상자 안에 넣어, 갈대숲 사이에 두었어요. 그다음 어떻게 했을까요? 갈대숲 사이 물 위에 상자를 올려둡니다.

그리고 아마 기도했을 거예요. 이 아이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면서 강물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는 갈대상자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을 다한 후, 하나님이 하실 최선을 기대하면서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의탁하는 것이에요.

저는 대학에 다닐 때 교양 수업으로 수상스키를 수강한 적이 있었는데요. 제가 뭐 그런 스포츠를 워낙 좋아해서는 아니었고, 일주일 동안 수상스키를 타고 자격시험을 보면 한 학기의 학점을 바로 딸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운동은 웬만큼 하니까 짧게 굵게 한 학기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였죠.

그래서 종강이 되고 일주일간 청평 강에 가서 수상스키를 배우고 자격시험을 봤습니다. 수상스키의 첫 번째 난관은 배가 달리기 시작할 때 물속에 들어가 있다가 수면 위로 일어서서 스키를 타는 것까지였습니다. 일단 일어서는 데 성공하고 스키를 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쉬워집니다. 그런데 대부분 물속에서 버벅대다가 끝나거나 물속에 잠긴 채 고문을 당하듯이 얼굴에 물 싸대기를 맞으면서 끌려가는 것이었어요.

처음 물에 동동 떠 있을 때 조교가 해준 말이 있어요. 절대 손잡이를 당기거나 힘을 줘서 일어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어깨 힘을 풀고 손잡이를 잡고 배가 가는 대로 끌려가 주는 것이에요. 그럼 물속에 잠겨서 한동안 끌려가는데, 그러다가 수면 위로 몸이 올라오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그때 일어서라는 거예요. 물에 저항하면 결코 수면 위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말이 쉽죠. 사람들에게 의외로 힘을 빼고 흐름에 자신을 맡기라고 하면 그걸 참 어려워해요. 자기 긴장을 푸는 일이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몸에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기면, 그때서야 몸이 물 위로 뜹니다. 무력에서 부력이 생겨요. 내가 무력해져야 하나님 은혜가 나를 띄우는 부력이 되는 것이에요. 바다의 파고가 높고 바람이 너무 거셀 때는요. 배의 시동을 꺼야 한다고 하죠. 동력을 없애고 저항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게 배가 위기를 맞서는 최선이에요. 요게벳은 자신을 휩쓸고 가는 인생의 파도가 너무 거세지자 자신의 동력을 완전히 끄고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의 인생을 섭리의 물결 위에 올려두기로 했어요.

오늘 본문의 ‘갈대 상자‘에서 ’상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테바’라는 단어인데요. 이것은 오늘 갈대 상자라는 단어와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를 가리킬 때 외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아주 특별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갈대 상자와 노아의 방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으로 항해하기 위해 갖췄던 이 두개의 테바의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은 배의 속도를 내는 노와 그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이 갈대 상자에는 노와 키가 없었어요. 그저 물결에 의탁해 가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두 개의 테바에는 자기 결정이 없었어요. 속도를 의식할 필요도, 방향을 의도할 필요도 없었죠. 그저 물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어떤 물길일까요? 여러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섭리’는 많은 크리스천이 그저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난날을 은혜라는 시선으로 재해석하면서 자주 하는 말이에요.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는데 돌아보니 은혜더라.”,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더라.” 뭐 이런 의미로요. 우리는 섭리를 적극적으로 기대하진 않습니다. 섭리는 그냥 과거 회상용으로만 쓰여요. 하지만 우리는 의지할 거라고는 오로지 흐르는 물결밖에 없던 이 갈대 상자의 운명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의 물결이 인생의 어떤 저항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갈대 상자 속에 담긴 아이인 모세만큼 성경에서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이 없습니다. 모세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요. 우리가 그토록 과거 회상용으로 쓰는 이 해석의 관점이 인생의 어떤 거친 저항을 거스르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시겠어요? “아기의 누나는 멀찌감치 서서 어떻게 될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말성경)

오늘 아이 누나의 행동을 보세요. 그녀는 멀찌감치 서서 어떻게 될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손을 떠난 일들을 경험할 때가 있어요. 나의 능력과 나의 지혜를 이미 넘어선 일,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요. 그런 문제 앞에서 우리가 흔히 내려놓는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자포자기 하듯 그 문제를 손에 놓는 것과 그것을 하나님 손에 맡겨드린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의탁하는 것과 포기하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시선에 있습니다.

지금 미리암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와 삶을 의탁한 사람들은 그것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어떻게 행하실지를 주목하며 바라봅니다.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포기한 사람은 그 문제로부터 뒤돌아서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쳐다보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아프고 보면 고통스러우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나는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 드렸다고 말한다면, 그 의탁에는 반드시 믿음의 시선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바라보는 것이에요. 바로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 드리고 그 일이 어떻게 될지를 기대하며 기다리세요. 저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바로 이런 믿음의 시선이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기까지 고정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5-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때 마침 바로의 딸이 나일 강에 목욕하러 내려오고 그녀의 시녀들은 강둑을 따라 거닐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딸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고는 자신의 여종에게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바로의 딸이 상자를 열어 보니 울고 있는 한 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의 딸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가 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말성경)

“그때 마침, 바로의 딸이, 나일 강으로, 상자를 보고, 열어보니,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여러분 이 기가 막힌 타이밍과 조합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죠. 히브리 원문을 보면 ‘와우 계속법’이 사용되었는데요. ‘와우 계속법’은 어떤 행동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상자를 열자마자 아기가 울기 시작했고, 아기가 울자 공주의 마음에 긍휼히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마치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함께 반응하듯 말이죠.

여러분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아이는 왜 한계 상황을 맞고 이 나일 강에 버려졌습니까? 날로 우렁차지는 그의 ‘울음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더 이상 감출 수 없었고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아이는 그 울음 때문에 나일 강에 버려지게 되었는데 ‘그 울음’ 때문에 건져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울음이 인생의 한계였지만, 그 울음이 새로운 인생을 가능하게 했어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의 섭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도 여러분의 한계를 결정하는 울음소리가 있을 거예요. ‘아 더 이상 안 되겠다.’,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분의 그 울음소리에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섭리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고통의 문제 한복판에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애통의 씨앗이 구원의 열매가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울음소리 때문에 더 이상 살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 울음소리 때문에 살 수가 있게 됩니다. 이 인생의 아이러니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로만 해석할 수 있죠.

상자는 가장 위험한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죽음을 선언한 곳, 절망과 어둠의 그림자를 짙게 만들었던 바로의 궁에서 무슨 선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에요. 여러분! 바로의 궁은요. 대적의 처소예요. 그런데 바로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던 바로의 턱 밑에서 모세가 자라납니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안전하게 보호를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의 역사이죠. 여러분 이러한 역사를 지켜보면서 과연 그 어느 누가 인생의 문제를 속단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절망이 여기 있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구원이 바로 여기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구원의 손길을 소망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제 이 믿음의 시선이 무엇을 불러오는지를 보세요. 하나님께 의탁하고,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주목하고 있던 미리암은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바로의 공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간파하고 즉각적으로 준비된 답을 제시합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어요? “공주님 대신 젖을 먹일 히브리 여자를 한 명 데려 올까요?” (우리말성경)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며 믿음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 이때 미리 암이 머뭇거리거나 준비된 답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바로의 공주도 다른 방법이 없었을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의 개입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주목하지 않아요. 문제가 좀 해결되는 듯하면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상황에 변화에 안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기까지 자신의 소명을 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시선을 떼지 마세요. 끝까지 여러분의 몫을 하십시오. 보세요.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죠.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로의 딸은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대신해 젖을 먹여라. 내가 대가를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여 키웠습니다.”(우리말성경)

미리암이 생각한 최대의 은혜는 자신의 어머니 요게벳을 데려다가 모세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하신 은혜는 모세를 그 집으로 데려다가 젖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대가를 받았어요. 월급을 받은 거예요. 자신의 아이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양육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자기 아들을 키우면서 월급을 받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내 인생 최대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린 그것마저도 우리 인간의 제한된 생각으로 한계를 짓습니다. 이 정도만 해결되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그 너머의 은혜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주시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처럼 겹겹이 쌓인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대하십시오. 소망하세요.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십니다.

모세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을 거슬러 흘러가나요? 당시 모세는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모세가 처한 역사적 정황이 너무나 극적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한 개인이 완전히 종속된 역사조차도 거스릅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궁에서 왕자로 자라게 됩니다. 한 개인의 맞물린 모든 관계와 인생의 한계도 거스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예요.

여러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었어요. 그 정세와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여러분 인생의 계획표와 시간표가 모두 수정되고 어긋났을 테고요. 여러분의 삶이 그 혼란 중심에서 방황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실제 경제적 관계적 타격이 여러분을 휩쓸고 지나갔을 수도 있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 혼란의 중심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하며 살고 계세요? 인생이 이렇게 급류에 휩쓸려 가는 것 같은데, 이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기대하냐고 하시겠어요? 여러분 삶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때, 갈대 상자로 나일 강에 띄워진 모세를 기억하십시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생후 삼 개월 만에 엄마의 품으로부터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낳자마자 죽음이 기다리고 엄마의 품에서 성장하기도 전에 이별이 앞에 있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죽음과 상실의 문제를 넘어 그 안에 구원이 있었습니다. 은혜가 있었어요. 이별 뒤 섭리를 만났습니다. 주님이 거기 계세요. 그분이 예비하신 구원과 함께요.

오늘 본문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칠흑같은 어두운 현실 속에 하나님의 존재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죠. 이런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이 느껴지지 않고, 그분은 침묵하고, 숨어 계시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방관하시고 우리의 아픔에 무관심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서운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을 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분의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새 길을 만들고 계신 분이고, 겹겹이 싸인 은혜를 예비하신 분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의 삶에서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 섭리의 물결에 여러분의 삶을 맡기세요. 의탁하십시오. 오늘 저는 이 밤 캄캄한 어둠 가운데에서도 그분이 열어두신 새 문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한복판에 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목도하기를 축복합니다.

원유경 목사

서울 여자 대학교 학사
횃불 트리니티 M.div.
(現) 온누리 교회 SNS 청년부 담당
(現) 온누리교회 대학 청년부 예배 기획 담당
(現) 홀리 임팩트 예배 인도자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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