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장 3-6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남자들은 군 생활을 할 때 교회에 간다는 이유만으로 선임병이나 간부로부터 기합이나 욕설을 들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 가는 것이 무슨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싫어하고 욕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주는 것 없이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는데 밉습니다. 미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그냥 밉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취향이나 성향과 맞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자신과 성향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미워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정작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윤리적,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서 싫어하는 때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 목사님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떤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옆에 성도가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듣고 멈칫하더니, 꺼림칙한 듯 타지 않더랍니다. 그 목사님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 목사님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에게 거북한 말이나 행동을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마도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이 요즘 교회 또는 교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저 목사도 코로나 확진자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목사를 ‘혐오’의 대상으로 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교회가 이러한 취급을 받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성(自省)해야 한다며 글을 올렸습니다. 저도 100번 동의합니다. 그러나 비단 그리스도인만 자성할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기피와 혐오의 행동을 한 그 사람도 자성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은 많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넘어 ‘코로나블루’(코로나 우울증)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론가 그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마침 적당한 대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욕하는 일에 신났습니다. 직장에서도 월요일에 출근하면 “주말에 교회에 갔다 왔느냐?” 하고 묻고, 심지어 병원에서도 원무과에서 “교회에 갔다 왔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비난합니다. “아니 왜 교회는 가고 난리야?”

아마 성도 여러분도 근래에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에 대한 비난, 목사에 대한 비난을 들었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모 교회 때문에 모든 교회가 사회적 비난을 받으니까 “창피해서 교회를 떠나겠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일부 교회의 잘못이지만, 방역지침을 잘 지키지 못해서 사회적 피해를 준 것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요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크리스천과 교회를 비난하고 욕하는 이유는 그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롬 1:28)

‘죄’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요,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어느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까? “왜 그렇게 열심히 믿어? 적당히 믿어라!” 이런 핀잔이나 받았지요!

아니, 어른에게는 열심히 일하고, 학생에게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소방관이 불을 끌 때 적당히 꺼야 합니까? 아니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진화해야 합니까? 경찰이 범인을 적당히 잡아야 합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잡아야 합니까? 그런데 꼭 교회 다니는 것은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적당히 신앙생활을 해야지 ‘광신자’처럼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과 광신적 행위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세상의 칭찬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신앙생활이 세상의 찬사와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마귀가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과 영광을 주겠다고 하는 유혹에 넘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길 원합니까? 세상의 칭찬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을 보세요. 저들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비난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 나라에서 찬사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선조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고난당하고 순교의 자리까지 갔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 결과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0-13)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질서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또 비도덕, 비윤리적 행위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교회뿐 아니라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비난이나 모욕을 당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으로 천국을 선물로 받기 때문이요, 하늘의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하나’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엡 4:4-6)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도 한 분, 예수도 한 분, 하나님도 한 분, 다시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것에 다른 의견을 내면 ‘이단’이 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믿음’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하나인가?” 이것은 매우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의 성도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믿음이 하나입니까? 아니면 각기 다른 믿음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둘도 아니고 하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하나인데 왜 교회 안에 성도들 간에 다툼과 분열이 있습니까?

어떤 교회에서 성도들 간에 큰 분쟁이 생겼습니다.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회에서 ‘화해조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위원회의 위원장 목사님이 양측의 분쟁 당사자들을 모아 놓고 물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어떤 색깔입니까?” 그 질문에 교인들이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보라색”이라고 각기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떤 색깔이 참된 것이냐는 질문에 그들은 서로 자신의 믿음의 색깔이 옳고 타인은 틀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색은 무엇일까요?”

교인들은 대답하지 못했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주님의 믿음은 ‘빨간색’입니다. 바로 십자가 보혈의 색입니다. 이 이야기는 ‘믿음이 하나’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노란색 믿음, 파란색 믿음, 초록색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믿음은 주님의 믿음이 아닙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예수의 마음은 둘일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 마음은, 곧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붉은 보혈을 흘려주신 사랑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보혈, 그 예수의 피가 바로 우리 주님의 믿음의 색깔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옳은 믿음이며 무엇이 참된 믿음입니까? 구원을 선물로 주실 수 있는 믿음이 옳은 믿음입니다. 그 구원을 선물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은 오직 ‘예수의 믿음(Faith of Jesus)’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 예수의 마음, 예수의 믿음,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마음, 다른 믿음,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십니까?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 예수의 은혜, 예수의 믿음, 예수의 구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두 동일한 예수의 마음, 예수의 믿음을 소유했다면 가정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싸울 일이 없습니다. 교인끼리 다투고 교회 안에 분열이 생기는 원인은 ‘예수의 마음’, ‘예수의 믿음’ 이 아니라 ‘내 마음’, ‘내 믿음’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하나님이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지 교회를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임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主)라고 시인하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신 증거입니다. 더 놀라운 은혜는 그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해주시는 것입니다.“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뺑소니 사고에서 그 차를 보았다는 증인이 나타나서 법정에서 증언한다면 그것은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결정적 증언을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님이 임재하면 우리의 믿음은 하나의 믿음, 같은 믿음이지 서로 다른 믿음일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도박에 빠지는지 아십니까? ‘본전 생각’ 때문입니다. 한 판만 더 하면 잃었던 돈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때문입니다. 그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순전히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그것을 폐기하고 ‘예수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자는 메시지를 전했더니 어떤 분은 ‘본전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전 생각 때문에 ‘내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과연 들쑥날쑥한 내 믿음이 과연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 구원받을만한 능력이 있는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때는 컨디션이 좋아서 내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어떤 때는 이 믿음 갖고는 어림도 없음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함이 없는 ‘예수의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시느니라” (히 13:8)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어야 진리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십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3)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우리의 믿음을 힘써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왜 힘써 지켜야 합니까? 빼앗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빼앗는 자가 없다면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 원수 마귀는 쉬지 않고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을 파괴하였습니다. 그것이 마귀가 하는 멸망과 심판의 행위입니다.

생일날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선물을 집에 가지고 갈 때까지 잘 간수(看守)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예수의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의 믿음을 잘 지킬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어떤 이들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딤전 1:19)라고 디모데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믿음에서 파선하였을까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 예수의 믿음을 성령의 선물로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열두 제자 중 가룟유다는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따르다 결국 예수님을 은30에 팔았고 가책을 느껴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의 믿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끊임없이 세워나간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고 쉽게 대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면 당황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그저 믿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만났는지를 물으니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나 자신의 이성과 지성으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만나면 내 믿음은 폐기되고 ‘예수의 믿음’이 ‘내 믿음’을 대체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는 3년 동안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쓸모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후’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그 믿음대로 복음사역을 하였고, 주님을 위하여 순교의 자리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바리새인으로 누구보다도 유대교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다마스커스로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넣었으며 심지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길 위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유대교 믿음에서 ‘예수의 믿음’으로 대전환을 받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예수의 믿음’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하였고, 그 예수의 믿음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이 귀한 믿음 곧 ‘예수의 믿음’을 받았습니다. 이 예수의 믿음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예수의 믿음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장승권 목사. 청주서남교회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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