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콤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며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소비에트의 동향을 살피던 정치 활동가입니다. 말년에는 영국의 BBC에서 왕성한 방송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의 이야기』(Chronicles of Wasted Times)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회고했습니다.

그는 40이 되던 해에 환멸이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보낸 4년은 가장 쓸모없고 암울한 시기라고 정의를 내렸으며, 인도에서 보낸 3년은 모든 종교관을 파괴시켰고,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면서 보낸 러시아에서의 2년은 스탈린 치하에 400만 명의 아이들이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고발기사를 쓰고 떠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을 했지만, 꿈꾸던 스파이와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 하루 종일 독일군의 선박을 감시하면서 꼼짝도 못 하는 자신에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극심한 고독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권태와 싸워야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그는 자기가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을 선택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차를 몰고 해변으로 가 차를 세우고 어두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헤엄을 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에서 해방된듯한 자유가 몰려옵니다. 그렇게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맞이하면 되는 것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유를 모르지만 몸을 떨기 시작하면서 특별한 결단 없이 다시 해변으로 헤엄쳐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해변으로 향해 헤엄을 치는 그의 눈에 코스타 다 솔(costa da sol) 해변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불빛이 보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지겨워하면서 살던 그곳의 불빛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거기에 가야 했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뒤따랐다. 황홀경처럼.”

이것이 생명을 향한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죽음을 사랑하고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명을 향한 몸부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큰 관심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다.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 삼일 아프고 죽는다.) 노래도 100세가 되어 ‘날 데리러 와도 못간다고 전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유전공학 기술이 점점 발달되어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환갑잔치라는 말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UN도 2015년에 체질과 평균수명을 고려해 청년을 18-65세라고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이 수명은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암도 점점 불치병에서 치유 가능한 병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모두 생명에 대한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유전공학의 발전이 아무리 발달된다고 해도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실제 인물을 영화화한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실제 주인공 크리스 카일(Chris Kyle)은 미 해군 네이비실(Navy SEAL)에서 훈련을 받고 이라크 전투에 여러 번 저격수로 파병을 받아, 신출귀몰하는 저격 능력으로 적군을 무력화하고 놀라운 업적을 세웁니다. 전쟁에서 그는 적군을 모두 공포에 몰아넣는 저격수였습니다. 그렇게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귀국한 그는 전쟁 트라우마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전쟁터에서 온갖 총알을 다 피하면서 살아 돌아온 그는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은 이처럼 불현듯 찾아옵니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사람의 수명이 늘어났다고 그 생명을 내가 누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도 밤마다 음주운전 차량들이 거리를 과속하고 있고, 대낮에도 운전하면서 문자를 주고 받는 운전자가 반대 차선에서 당신을 향해 질주해오기도 합니다. 편히 잠든 밤에 화재가 나서 33층짜리 건물을 태우고, 난간에 발을 헛디뎌 건강한 몸이 병원 한번 못 가고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면, 몸에 좋다는 약이 오히려 독이 되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응급실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평균수명이 120세가 된다고 해도, 내가 120세까지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늘 죽음 이후에 있는 천국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재물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쌓아둔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이 오늘 밤 네 생명을 찾으시면 그 많은 물질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살고 싶어 합니다. 추석 기간에 읽었던 책 중에 『죽은 자의 집 청소』가 있습니다. 한때는 시인을 꿈꾸었던 김완이라는 분이 죽은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집을 청소해 주면서 그곳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사연을 쓴 책입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도, 방금 전에 먹은 음식까지 분리수거를 다 해놓고 죽은 사람, 어떤 사람은 남긴 글에 죽을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갑자기 생을 포기한 사람, 어떤 사람의 집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을 친 흔적이 역력한데 생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합니다. 죽으러 가면서도 달려오는 차를 피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정기검진을 받으며, 비타민과 각종 건강음식을 챙겨 먹는 것도 살려고 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들입니다. 이런 생명을 향해 몸부림을 치며 달려가는 인생 앞에,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불러 세워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이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하는 이 뜻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고, 그 생명을 얻어 우리 평생의 소원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다”라는 말을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인간이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생명,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그 비결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 반대말인 죽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인간은 왜 죽게 되었을까요? 성경에서는 인간이 죽게 된 분명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죄 때문에 사망이 왔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적 죄의 정의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붙어있으면 생명이 흘러 들어와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깨어진 상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지 못합니다.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 죽음입니다. 그게 사망입니다.

꽃병의 장미는 아무리 향기가 좋고 아름다워도 원줄기에서 꺾이어 나왔으니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꺾이는 그 순간에 이미 죽은 것입니다. 관계가 끊어지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향기로워도 향기는 곧 사라지고, 시들어 죽게 됩니다. 그게 사망입니다.

인간이 80년을 살고, 100년을 살아도 점점 죽어가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생명이 흘러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하고 끊어진 관계로 사는 사람은 꽃병 안에 꽂힌 장미와 같은 신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로 사는 인간도 반드시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피울 수 있는 방법, 생명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1-2)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에게만 있는 생명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있는 생명을 이 땅에 가지고 오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구원받을 자녀들에게 그 생명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마치 죽어가는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심장을 기증받아 앰뷸런스에 심장을 싣고 환자에게로 달려가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심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인다. 영접한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가져오신 그 생명을 내 몸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실 때 그 생명을 내 안에 가지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실 때, 죽은 우리의 심장을 빼내고, 살아있는 예수님의 심장이 우리 안에 넣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심장 이식수술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5장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그런데 이 예수님의 생명이 있든 없든 사람은 모두 한 번은 다 죽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죽고 난 뒤가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9장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겪는 것인데, 죽음 이후에, 가는 길이 달라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상을 받는 시상대로 가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는 심판대로 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시상대에서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한 교회를 다니는 집사님과 장로님이 우연히 도박장에서 만났다고 해보세요. 그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입니까. 가서는 안 되는 장소에서 서로 만났을 때 그것만큼 어색하고 부끄러운 것이 없는데… 그것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창피스러운 일이 같은 교회 30년 다니고, 둘이 심판대 앞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 우리 성도들 간에는 연출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천국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1. 내가 와서 놀라고, 2.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안 와서 놀라고, 3. 안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와서 놀라고. 그런데, 제일 놀랄 일은 지옥문 앞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지옥에 가는 것을 두 번째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 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 지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왜 둘째 사망이라고 말했을까요? 사망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생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생명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하나님이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지옥이 왜 무섭냐면, 그곳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가 지옥으로 오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괴롭힐 텐데,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마귀가 마음대로 통치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옥은 원래 사람이 가라고 만든 곳이 아니라,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마귀를 가두는 교도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귀가 좋아서 마귀를 따라가다 보니, 마귀가 가는 곳에 사람도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절대로 나타나셔서 도와주시지 않기 때문에 마귀가 영원토록 왕 노릇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 인간은 아무 소망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명이신 하나님이 없는 곳, 곧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단테(Alighieri Dante)의 신곡의 지옥 편에 보면,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나를 지나 고통의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지나 영원한 비탄으로 들어가고, 나를 지나 저주받은 무리 속에 들어가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지옥은 어떤 곳이냐 하면,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여러분, 함부로 믿음 생활하기 힘들다고 하나님 날 좀 내버려 달라고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 내버려 두시는 순간 마귀의 종이 되고, 여러분의 삶은 비참해집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내버려 두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나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28-31)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곳이 지옥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생, 믿지 않는 집, 믿지 않는 사업, 믿지 않는 곳은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면, 그곳은 마귀가 다스리는 곳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곳도 지옥을 닮은 곳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 나를 좀 가만 내버려 두세요”라고 하지 말고, “나의 인생을 다스려 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안 믿어도 두 번 죽고 예수님을 믿어도 두 번 죽습니다. 그런데 죽는 때가 다릅니다. 흔히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한번 죽고, 그 죽음 후에 다시 두 번째 사망인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 번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두 번 죽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두 번 죽는데 죽는 시기가 다릅니다. 첫 번째 죽음은 예수 믿는 날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20년 전에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 믿던 그날 여러분은 죽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2장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a)

내가 예수님을 믿던 그날이 내가 첫 번째로 죽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던 그날 내가 죽던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골로새서 3장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 3:3)

이것을 사무엘상 25장 29절에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싸개에 싸여져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닫게 되면 빌립보서 1장에 이런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1, 23) 죽음이 두렵지 않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목적도 달라집니다.

“…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b)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바울이 왜 목숨이 열 개나 되는 사람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았는지.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날 다메섹 도상에서 죽었고, 하나님은 그의 심장을 빼내어 생명 싸개에 싸셔서 하늘에 감추어 두셨기 때문에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 있다가 가는 세상이지만,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그 심장을 소유한 사람은 살든지 죽든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그것이 가장 큰 마음의 소원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왜 이렇게 생애 대한 집착이 많고, 남보다 잘 살려고, 부자로 살려고 하고, 자존심 상하면 잠도 못 자고, 무시를 당하면 복수를 꿈꾸면서 이토록 시퍼렇게 살아있냐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던 여러분의 다메섹의 그날에 제대로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내 안에 하나님이 시퍼렇게 살아서 역사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내가 생명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오늘 나를 향해 사망 선언을 하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함으로, 살아도 주께 영광, 죽어도 주께 영광으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입성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병락 목사

침례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졸업(B. A.)
사우스웨스턴신학교 졸업(M. Div. Biblical Language)
Dallas Theological Seminary(M. A. 성서연구과정 수학)
사우스웨스턴신학교(Th. M. Evangelism 수학)
(前) 세미한교회 Founding Pastor 및 담임목사
(現) 사우스웨스턴신학교(D. Min. 과정 중)
(現) 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
■ 저서
『다시 일어남』, 『부족함』, 『쏟아지는 은혜』, 『자라가라』, 『모든 것을 살리는 예배를 회복하라』, 『어둠 속에 부르는 노래』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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