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 6절, 요한복음 18장 37-3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며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지난 시간에 우리가 반드시 만나야 할 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찾아서 그 길을 걷는데 만약 그 길이 잘못된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가짜의 길이라면 어떨까요?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필수적으로 우리가 찾은 예수의 길은 참된 진리의 길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다.” 다시 말해 “내가 길이면서 동시에 이 길은 참되다”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진리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너도나도 모두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진짜 진리는 증발을 하고, 가짜 진리가 진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가 구분되지 않아 사라진 시대입니다.

진리의 상대주의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시대는 지금 진리는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서 그때그때 다르다고 믿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 자체에 엄청난 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상대주의라는 말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스승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상대주의란 모든 것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것이다. 회색이 검은 나라에 가면 흰색이 되고, 흰색 나라에 가면 검은색이 되는 것처럼 절대적인 회색은 존재하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곳에서 통하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바뀌고, 사람에 따라 바뀌고,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이 진리이지,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가치도 상대적이고, 윤리도 상대적이고, 지식도 상대적이며, 심지어 진리까지도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합니다.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 명제가 가지는 가장 큰 모순이 무엇일까요?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 자체를 절대적인 진리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는 없다’라는 그 말을 ‘절대 진리’처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순입니다.

두 번째, ‘내가 생각하는 것이 진리이다’라고 하는 이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라는 말은 보통 절대자, 즉 신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진리, 참된 이치, 절대로 오류가 없고 항상 변함이 없고, 시공간을 초월해 늘 그 성질을 유지하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 바로 진리’라고 한다면 ‘내 생각은 항상 옳고, 틀림이 없고,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내가 신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내 생각이 진리다’라는 말은, ‘내가 신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 생각이 진리라는 생각처럼 큰 코미디가 있을까요? 내가 나를 너무도 잘 아는데 말이죠. 어떻게 내 생각이 진리가 될 수 있습니까?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도 잘 결정하지 못 하고 사는 우리입니다. 다이어트하는 와중에 치킨 한 조각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진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는 내 생각이 진리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내 생각이 진리로 생각되니 다른 진리를 밀어냅니다. 절대 진리인 하나님마저 예외는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 대신에 그 자리에 내가 앉아 내가 결정하여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성경의 가르침 대신 내 생각을 따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는 인구 숫자만큼 5천 164만 개의 진리가 있고, 세계에는 77억 8천 6백만 개의 진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제 누가 누구에게 진리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예의범절에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오랜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를 가르치더라도, 자녀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건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진리이고, 제 생각은 따로 있어요. 간섭하지 말고 존중해 주세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도덕이나 사회나 윤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옛적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이 가르쳐도 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선생님 생각이고, 제 생각은 따로 있어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처럼 ‘그건 네 생각이고. 알았어. 알았어, 뭔 말인지 알겠지마는 그건 네 생각이고’를 부르는 세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미 70-80년 전에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 교육을 국가의 기본 교육이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철학은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말고, 학생이 스스로 자기주도학습을 할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만 하고, 학생이 질문할 때 답을 주지 말고 너의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만 보라. 답은 학생이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이 무슨 대답을 하든지 그 생각을 인정해 주어야 하며 그래야 그 속에서 잠자던 창의성이 깨어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교실에서 기준이 되는 진리가 사라지고 30명, 40명 학생이 모두 저마다의 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창의성이라는 좋은 결과물도 얻었지만, 미국의 공교육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것도 제시할 기준을 잃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교육가들은 모두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진리의 상대주의는 더욱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성별도, 남자와 여자로 나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남자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성은 내가 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모두 상대주의에서 나온 생각들입니다. 가지고 태어난 성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니 따를 필요가 없고, 내가 생각하는 성이 바로 나의 성이기에 신이 준 성별이 아닌 스스로가 선택하는 성별을 가지라고 권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신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별보다 내가 생각하는 성이 더 정확하다는 것은 하나님 생각과 판단보다 내 생각과 판단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생각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AB1266(2013-2014)이라고 하는 법은 학생 자신이 생각하는 성 정체성에 따라 남학생이 여학생의 화장실, 탈의실, 심지어 샤워실까지 사용하는 것을 법적으로 허락했습니다. 성 정체성이 그때그때 바뀌게 되면, 바뀐 정체성에 따라 어디든 원하는 대로 화장실, 탈의실, 샤워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성전환 수술을 통해서만 정체성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날의 감정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소위 우리나라에서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라고 하는 것 속에는 장애인, 여성, 외국인, 등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차별 금지도 있지만, 결국 그 법안에는 성을 차별하지 말라는 명목 하에 동성애를 찬성하고 보호하는 법이 들어있기에 성경을 진리로 따르는 기독교가 그 부분까지 동의할 수 없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성보다, 하나님이 주신 성이 더 정확하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이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통과된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피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법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자기 자녀에게 동성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나 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 배우자를 데리고 오는 것은 반대해도 괜찮지만, 아들이나 딸이 동성 배우자를 데리고 오면 반대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차별 금지법이 아니라,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향하는 지점이 어딘지 아시나요? 당신의 자녀가 학교에서 신앙에 따라 식사시간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소수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수 종교는 기도해도 됩니다. 소수라서 다수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는 지금 학교에서 모슬렘들을 위한 기도 처소는 마련해 주는데, 기독교 기도실은 폐쇄하고 있습니다. 교사인 당신이 당신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학생들에게 말할 수 없고 대신 모슬렘이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따르는 성경책을 교과서와 함께 학교에 가져갈 수 없지만, 코란은 가능합니다.

직장에서도 소수인 차별 금지법에 따라 똑같이 승진의 기회가 있어도 동성애자가 먼저 승진하는 가산점이 있기에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먼저 올라가 대부분 기업의 임원 중에 상당수가 동성애자들이 많고 결국 그 기업은 친 동성애자가 되어 막대한 재정을 동성애 프로그램과 장려 기금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반대할 것입니다. 반대해도, 시간이 지나면 통과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이 법이 통과되었을 때 엄마 아빠는 그때 무엇을 했냐고 우리 자녀들이 나중에 물어볼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 대신 최선을 다해 반대했다고 말해야겠습니다.

기독교 안에도 이 진리의 상대주의가 들어와 있습니다. 소위 말해, 다원주의 사상입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타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서 주장하는 구원론입니다. ‘기독교를 통한 구원의 길이 있고, 불교, 이슬람, 힌두교, 무속 종교를 믿어도 된다. 모든 종교는 형태만 다르지, 가다 보면 정상에서 만난다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길이 있기 때문에 종교를 강요하거나 포교나 선교나 전도를 하지 말고, 각자의 종교를 존중해 주자’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 내에서 일어난 것은 최근의 일이고, 불교, 천주교 등에서는 이미 종교 다원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모든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에 어느 종교를 택해도 괜찮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는 상대주의가 모든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에,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고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는 말이 사람들에게 너무 당연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깨어있는 사람이고, 대인배가 되고, 그 종교야말로 마음 넓은 참 종교가 됩니다. 반대로 구원의 길이 우리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면, 편협하고, 가짜 같고, 아주 앞뒤가 꽉 막혀서 대화하고 싶지도 않아 하는 기피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은 적이 없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조차도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건축자들이 깨버린 돌같이 쓸모없어 보이던 것을 가장 중요한 모퉁이 돌로 삼으셨습니다. 아무리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같이 진리가 버려진다고 해도 진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또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자유롭게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진리를 정말 찾고 싶은 사람에게 즉, 진짜 진리에 목말라 찾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믿는 것이 진리다”라는 이 말이 얼마나 무관심하고 아픈지 모릅니다. 반대로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내가 믿는 진리를 당신에게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그 말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지 모릅니다.

저의 경험을 잠시 나누어 보겠습니다. 스무 살 신학교 1학년 때 신학생 친구와 떠났던 추운 겨울날의 무전여행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신학교를 들어가고,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가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진 우리는, 겨울방학을 맞아 울산 집에서 온돌방 아랫목을 이리저리 뒹굴면서 ‘진리가 무엇일까?’를 서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겨울보다 마음속의 겨울이 더 추워 떠난 무전여행의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보자…’

울산에서 경주 가는 기차표만 끊어서 무작정 경주로 갔습니다. 그리고 초저녁 무엇에 끌린 듯 십자가만 보고 찾아간 곳이 성당이었습니다. 성당 직원들이 퇴근 준비를 하는데, 우리 둘은 대뜸 ‘진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알면 말씀 좀 해주세요”라고 했더니 모두 당황을 했는데, 사무장 즈음 되어 보이는 분이 고개를 흔들며 ‘진리가 따로 있나요? 내가 믿는 것이 진리지…”하면서 귀찮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눈빛을 보내니 그 눈빛을 받은 곁에 있는 직원 한 명이 교황이 쓴 책 한 권씩을 선물이라고 주기에 난로 옆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앞마당에 신부복을 입은 분이 서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께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신부님, 저희는 진리를 찾아다니는 청년들입니다. 신부님이 믿으시는 진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당황스러운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신부님은 주변으로 여신도들이 족히 대 여섯 명은 둘러서 있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일 분쯤 뜸을 들이고는 하는 말이 “진리는 내가 있다는 것이 진리이지요.” 이에 친구가 대뜸 쏘아붙이듯이 되묻습니다. “그건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의 말이고요, 신부님이 믿는 진리를 말씀해 주세요.”, “진리를 왜 누구에게 물어요? 스스로 찾아야지. 돌아다닐 시간에 동굴이나 파고 들어가 스스로 찾으세요”라고 그 신부님도 화가 난 듯이 저희에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 진리 우리가 동굴 파고 찾을 테니… 신부님이 찾은 진리라도 말씀해 주세요.” 그때 신부님의 대답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런 것을 왜 묻나요? 각자 각자의 진리가 있는 거지… 진리가 어디 따로 있나?” 그 대답을 듣고 인사를 하고 그 성당을 나서는데 마음이 참 씁쓸했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경주 불국사 앞으로 갔습니다. 온종일 불국사 앞에서 구걸해 얻은 몇 천 원으로 어묵 몇 개를 사서 먹고 허기를 달랜 다음에 사찰의 스님을 좀 만나자고 백방으로 노력하니, 교회 담임목사 만나기 어려운 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스님은 반짝이는 뒤통수도 못 보게 철저하게 차단되었습니다. 저희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라고 하니, 사찰 지기 정도 되는 분의 말이 “진리가 따로 있나요? 세상의 모든 것이 진리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 진리지… 스님 만나도 똑같습니다. 당신이 부처입니다.” 단순하게 떠난 여행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너무 추워 경주 역사 안에 난로가 있어 그 옆에서 잠시 앉아있는데, 갑자기 수염이 길고 딱 봐도 도인처럼 보이는 분이 한겨울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난로 곁에 서서 온기를 쬐고 있었습니다. 저의 털옷을 벗어서 그분에게 선물이라고 전해드린 후에 도사가 분명하다싶어 마음속에 있던 질문을 했습니다. “어르신, 범상치 않으신데… 혹시 어르신이 아시는 진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분의 대답입니다. “글쎄요… 저는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다니는 인생이라 그런 것은 모릅니다.”

성당도, 절도,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는 도인도 진리를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밤이 깊어 또 십자가를 보고 교회 하나를 찾아갔습니다. 교회에는 불이 다 꺼졌고, 경비실에서 목사님을 찾으니, 교회 옆에 기와집 하나를 가리키면서 저 집에 우리 부목사님 사택이니 가보라고 했습니다. 저희 키보다 낮은 담장 너머 기와집의 마루가 보이는데, 방안에 불이 켜진 것이 보여, 밖에서 불렀습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방문이 열리고, 지금 생각하면 30대 중반 정도 되시는 분이 신발을 끌고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 쪽을 와서 누구냐고 묻습니다. “저희는 진리를 찾아다니는 청년입니다. 목사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목사님께서 반가이 맞으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방이 두 개이었던 것 같은데, 서재로 사용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니, 방에 책이 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저녁은 먹었냐고…‘ 물어보시는데, 진리가 따로 없더군요. 이틀이나 굶어 배고픈 사람에게 ‘밥은 먹었냐?’는 말이 진리더군요. 저녁을 못 먹었다고 하니, 당장에 부엌으로 가셔서 몇 개인지 모르지만, 라면을 풍성히 끓여 김치와 함께 상에 담아 오셔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처가 아이를 낳아서 몸조리 중이어서 건넛방에 있는데 인사도 못 드리고, 식사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라면에 밥까지 말아서 다 먹어치우고 밥상을 물리고, 저희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한 가지 진지하게 여쭈었습니다. 신학생인 것을 숨기고, 불신자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진리를 찾아다니는 청년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때 그 목사님이 잠시 침묵하시더니,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침을 한번 삼키시고 우리 눈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지요.” 그 말에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인지 구약부터 신약까지 복음으로 연결해서 설명하는데 불신자라고 생각하고 들어도 그 말이 너무 절묘하고 합당하여 마음속에 큰 환희가 올라왔습니다. 그 내용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날 밤 제 마음이 가장 기뻤던 것은 오히려 진리의 내용이 아니라 진리를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그 젊은 목사님의 모습이 저를 울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박또박 전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설명이 그토록 진실하고 진지하게 들릴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당신이 진리를 찾으라.”고 하는 말처럼 무관심한 말이 없고,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에게 “진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진리”라는 말처럼 매정하고 아픈 말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진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그 말이 가장 사랑이 넘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수 때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처럼 모두 물난리가 나서 넘치는 게 물이지만, 정작 마실 생수가 없는 시대가 바로 진리의 홍수시대인 오늘날입니다. 네가 진리라고 말해주고, 절대자를 찾지 말고 네 안의 신을 깨워라. 네가 신이다. 네가 진리라고 하는 그 말이 너무 달콤해 따라가 보니, 결국 네 갈 길을 가지 왜 나를 따라오느냐고 외면하고 자기의 길로 가지,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진리가 없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네가 신이라고 말하며 네가 원하는 것을 위해 살라고 하는 무책임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흔들 깃발이 없는 시대, 따를 리더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때 한 분이 나타나서 말씀합니다. “너 길 잃어버렸구나. 나를 따라오너라.” 이 혼탁한 세상, 진리의 춘추전국시대를 살아가는 혼탁한 이 시대에 내가 진리라고 외치는 그 유일한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다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낭독의 발견’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원재훈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잠자리 한 마리가 사무실로 날아왔습니다. 사무실에는 아홉 개의 창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잠자리가 나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잠자리는 아시다시피 곁눈, 홑눈 합해서 만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 개의 눈이 다 필요 없었습니다. 창밖으로 나갈 수 있는 한 개의 눈만 있으면 되는데, 그 한 개의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아, 난 지금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개만 필요한데….’ 만 개의 지식이 있어도 결정적인 한 가지 지식이 없어 무너지고 맙니다.

이 예화가 오늘 설교를 모두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만개의 눈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만개의 눈을 가져보았더니, 만 개를 보느라 정작 보아야 할 하나를 보는 눈을 잃어버렸습니다. 진리의 춘추전국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믿음을 돌아보시면서, 수만 가지 진리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 외에는 진리가 없는 절대 진리로 믿는지를 점검하십시오. 그래서 길 잃고 헤매는 영혼이 없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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